US Daily Logs

UCD 교환학생 일지 - 05. 샌프란시스코 재방문

도미니크앙셀 분당점 2022. 2. 17. 13:50

어느샌가 블로그 작성하기는 가장 귀찮은 일들 중 하나로 전락해 버렸고... 오늘 드디어 중간고사 시즌이 대략적으로나마 막을 내린 덕분에 다섯 번째 교환학생 일지를 쓰기로 결심했다. 사실 작성 중이던 원고가 있었는데, 조금은 민감한 주제를 너무나 감정적이고 노골적으로 다뤘던 나머지 전부 폐기했다. 본격적으로 샌프란시스코 재방문기로 넘어가기 전에 요즘 일상을 간소하게 정리하고 싶다. 사실 2월 첫 주부터 UCD에서도 대면 수업이 부활한 이후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지냈지만 - 무언가를 콕 집어 열심히 했다기보다는 그냥 학교를 통학하고, 저녁 밥 해 먹고, 일주일에 네 번 정도는 꼬박 헬스장에서 운동하고, 마감일에 맞춰 과제를 부랴부랴 하다 보면 책을 읽거나 영화를 시청할 새도 없이 시간이 훌쩍 흘러간다 - 그 와중에 싱가포르, 홍콩, 한국, 일본에서 온 교환학생들과 구정 맞이 파티도 하고, 밥도 같이 먹고 하는 등 나름 알차게 지냈다. 이 말인즉슨, 집에 틀어박혀 공부나 핸드폰만 하면서 시간을 보내지는 않았다는 말씀. 어쨌든, 2월 첫째 주까지는 여전히 일본 음악을 자주 들었는데 - 마츠토야 유미는 1월에 하도 많이 들어서 덜 들었고, 애플뮤직이 무작위로 추천해 주는 재생목록으로 자주 들어서 구체적으로 어떤 가수를 선호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 지금은 심리적으로도 미국에 정착해서 그런지 나름 영미권 노래도 자주 듣고 있다. 특히 얼마 전에 Joss Stone이 무려 7년 만에 정규 앨범을 발매해서 소울 장르 위주로 열심히 듣고 있는 중이다. ㅋㅋ Joss Stone의 신보는 그다지 인상적이지 않지만, 그녀의 작품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곡의 가사 두 줄을 적는다.

I've got a right to be wrong
My mistakes will make me strong

노래 제목은 "Right to be wrong"이다. 그런데 막상 이 글을 쓰는 당장은 2007 BoA The Live 콘서트 영상을 '듣고' 있다. ㅋㅋ

1. 버클리 - 1月 14日

데이비스와 샌프란시스코 사이를 왕복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네 번째 교환학생 일지에 자세하게 소개했다. 이번에는 짐도 별로 없었기에 - 애초에 배낭 하나, 크로스백 하나만 맨 채 출발했다 - 당연히 UCD-UCB(UC Berkeley) 셔틀 버스를 타고 버클리까지 가서 BART를 타고 샌프란시스코 시내로 이동했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토요일에는 셔틀을 운행하지 않는 관계로 어떡할까 고민하던 찰나 UCB를 다니는 고등학교 동창(MJC)네 기숙사에서 금요일 밤만 숙박하기로 했다. 그리고 만나는 김에 금요일에 저녁도 같이 먹고, 다음 날인 토요일에는 샌프란시스코도 같이 여행하기로 했다. 참, 고등학교를 졸업한 해 여름에 친구들 몇 명 더 껴서 - 정확히 말하자면 여행 계획 막판에 내가 '초대 아닌 초대'됐지만 - 3박 4일인가 부산 여행을 떠난 것이 그와의 마지막 만남이었는데, 그로부터 1년 반이나 지나서 캘리포니아에서 재회하게 되다니. 정말 웃기지 않은가. 확실히 국제부를 나오면 해외 여행할 때 이런 이득이 있구나, 싶었다. 어쨌든 친구네 기숙사에서 하룻밤 묵을 수 있었던 덕분에 나로서는 돈도 아낄 수 있고, UCB처럼 '저명한' 외국 대학교의 기숙사도 구경할 기회가 생겨서 일석이조였다. 생각해 보니 옥스퍼드대 기숙사에도 나흘이나 머물렀고, UCB 학생 기숙사 아파트도 방문했지만 정작 서울대 기숙사에는 한 번도 발 들인 적 없다는 점이 어이없다. 제발, 학교 행정 직원 분들 중 누군가 이 글을 읽게 되신다면, 분당에 거주하는 학생들도 기숙사 지원이라도 할 수 있게 해 주세요. ㅠㅠ

UCB Campus 1 - 흔들린 야경.
UCB Campus 2 - 흔들린 야경.

4시 반쯤 UCB 서쪽 정문으로 향하는 셔틀을 탔고, 6시쯤에 목적지에 도착했다. 가는 길에 샌프란시스코 만을 배경으로 해가 지는 장관이 펼쳐졌는데, 안타깝게도 내 자리가 바다에 접한 좌석이 아니라서 사진을 찍을 수도 없었을 뿐더러 그 기가 막힌 풍경도 힐끔힐끔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주변에 앉은 학생들을 슬쩍 둘러보니까 쿨쿨 자는 사람도 있던데, 그렇게 잘 거였다면 차라리 나랑 자리를 바꿔 줬음 얼마나 좋을까, 속으로는 이렇게 발칙한 상상을 하면서도 겉으로는 애써 태연한 척했다. 원래는 MJC와 단 둘이 저녁 식사를 하려 해서 버클리 지역 맛집에 데려가 달라고 부탁했는데, 출발 당일 낮에 MJC가 전화로 자기 친구들 두 명과 같이 식사해도 괜찮냐고 물어 봐서 그러자고 했다. 식사 메뉴는 친구들이랑 알아서 정해 주면 고맙겠다고 말했더니 Chengdu Style이라는 중화 요리 식당 메뉴판을 문자로 보내 왔다. 솔직히 버클리에서밖에 못 먹는 음식을 시도해 보고 싶기는 했지만 - 지금 생각해 보니 요즘 같은 세계화 시대에 그런 음식이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 - 중화 요리에 상당한 호감을 품고 있던 때라 괜찮았다. 하지만 중화 요리를 먹으려고 하면 막상 어떤 메뉴를 시켜야 할지, 그리고 그 메뉴가 도대체 어떤 음식인지 가늠되지 않는다는 문제점이 발생한다. 그럴 때에는 역시 가장 만만한 마파 두부 - 아는 것이 마파 두부밖에 없기에 - 를 먹겠다고 퉁 치면 된다. 그래서 나는 그날도 어김없이 '마파 두부'에 의존했다. UCB 캠퍼스의 서쪽 게이트 안으로 일단 들어가 걷다가 마파 두부를 주문하겠다는 답장을 보내고 다시 MJC와 만나기로 한 Sather Gate를 향해 걸었다. 1월 중순이라 그런지 6시보다 조금만 늦은 시각이었음에도 주변은 깜깜했다. UCB 학생들의 눈에 비친 나는 어느 모로 관광객 혹은 외지인이었을 테다. 떡 진 머리에 바람막이를 입고 상당한 부피의 배낭과 크로스백을 매고 스마트폰을 수시로 들여다 보며 다니는 사람이 재학생 일리는 만무하니까. 조금 민망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주위에 완전한 어둠이 깔린 덕분에 내 행색이 적나라하게 드러나지도 않았고, 무엇보다 내가 버클리에 다시 올 일이 있겠냐는 훌륭한 관광객 마인드를 장착해서 이동하는 중에 간간이 사진도 찍었다. 그런데 그 당시에는 관광객 마인드가 아직 부족했나 보다. MJC의 기숙사에서 잠들기 전, 당일 찍은 사진을 확인했더니 죄다 불빛이 번져 있었다. 핸드폰 카메라 셔터를 누르고 나서 바로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앞으로 나아가기 바빴던 나머지 밤에는 카메라가 물체를 인식하고 사진을 저장하는 데 5초 정도 소요된다는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그래도 몇 장의 사진은 건졌다만, 여전히 아쉽다. 왜냐하면 버클리를 재방문할 확률은 0에 수렴하기 때문이다. 만약 토요일에 Berkbus 셔틀이 운행했다면, 아마 버클리에 체류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내가 고등학생이었다면 UCB 캠퍼스를 한 번쯤은 방문하고 싶어했겠지만 - Bay Area에 온 김에 스탠포드도 기어이 가려고 했을 것이다 - 현재의 나는 대학생이므로 대학교 투어에 열의를 완전히 잃어 버렸다.

UCB Campus 3 - 약도.
UCB Campus 4- Moffitt Library.
UCB Campus 5 - Main(?) Library 앞 Builders of Berkeley.
UCB Campus 6 - Sather Tower.
UCB Campus 7 - Sather Tower.

늦은 시각에 UCB를 둘러 봤지만, 그래도 명물은 다 보고 온 듯하다. Sather tower도 지나쳤고, 중앙도서관 입구에도 가 봤고, 무슨 커다란 자연대 건물도 봤다. UCB는 아직 개학하기 전인 데다가 밤이어서 학생들은 별로 없었지만, UCB의 고풍스러운 건물들은 은은한 조명을 받으며 웅장하게 서 있었다. 모든 건물이 단층 내지는 2층에 불과한 UCD와는 여러모로 비교됐다. 확실히 캘리포니아 주립대 중에 가장 먼저 설립되고, 가장 잘 나가는 캠퍼스는 다르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어디선가 미국 명문대는 유럽의 유서 깊은 건물과 별반 다를 바 없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것 같은데 - 실제로 고등학교 1학년 때는 하버드에 가서 하버드 동상 발도 만지고 왔는데... ㅋㅋ 그런데 정작 미국 대학에 지원할 때 하버드는 고려하지도 않고 프린스턴에만 원서를 넣었다고 한다 - 그 말이 꼭 들어맞았다. Sather gate 근처에 위치한 건물을 지나다가 우연히 중년 남성 한 분이 주황색 불빛과 책으로 가득 찬 방 안에서 무언가를 읽고 있는 모습을 목격했는데, 그 순간만큼은 내가 있는 곳이 미국이 아니라 유럽인 듯했다. 아마도 그 남자는 교수가 아니었을까 싶다.

UCB Campus 8 - Sather Gate.
UCB Campus 9 - 냇물.

내가 걸음이 빨라서 그런지 MJC보다 Sather gate에 먼저 도착했다. 지난해 여름 <대학신문>에서 능력주의 기획 1부를 편집하고 있을 때 해외 대학교 영상이 필요해서 MJC한테 혹시 UCB 정문을 배경으로 학생들이 돌아다니는 영상을 촬영해서 보내 줄 수 있냐고 급전을 쳤는데, 근사한 청록색 정문이 보이는 영상을 금방 보내 줘서 참 고마웠다 (https://youtu.be/U7lpYZ8brD8?t=1170). 그런데 알고 보니 그 청록색 철제문이 바로 Sather gate였고, 이번에 그 실물을 직접 보게 돼 감회가 새로웠다. MJC로부터 받은 영상을 편집할 때는 '얘는 이렇게 근사한 캠퍼스에서 공부하는구나. 내가 한평생 저기 가 볼 일은 있으려나.' 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로부터 1년도 채 지나지 않아 영상 속 대문 앞에 내가 서 있다니! 참 인생은 함부로 예측할 수 없음을 절감했다. 그리고 여담이지만, 영상을 유튜브에 게재하고 난 뒤에 MJC에게도 링크를 보내 줬는데, 걔가 UCLA 교수를 인터뷰했는데 어떻게 UCB 캠퍼스를 인서트로 썼냐고 농담조로 지적했는데, 나는 거기에 "어차피 한국인 시청자들은 못 알아 봐~"라면서 받아 쳤던 기억이 난다. ㅋㅋ 어쩌면 UCLA 교수님께서는 살짝 언짢았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내 지인 중에 UCLA에 재학 중인 사람이 없었기에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그렇게 MJC를 기다리면서 Sather gate를 꼼꼼히 살펴보기도 하고, 캠퍼스 내부를 기준으로 정문 왼편에 시냇물이 흐르고 있어서 그곳을 구경했다. 정문 밖으로 나가니 대학 기념품 가게 등이 나열돼 있었고, 미세하게 대마초 냄새가 났다. 더 이상 볼 것도 없겠다 싶어 핸드폰을 보려는 찰나 MJC로부터 전화가 와서 고개를 들어 보니 400m 정도 떨어진 지점에 MJC와 그녀의 친구들이 보였다. 너무 오랜만에 만나서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뇌에서 미처 결정하기도 전에 MJC가 내 쪽으로 막 달려 와서 너무 반갑게 나를 맞아 줬다. 그에 비해서 내가 너무 떨떠름하게 인사해서 나는 당황했지만, 걔는 내가 그렇게 반응하리라 예상이라도 했듯이 아무렇지 않아 하면서 자기 친구들한테 "나는 이렇게 반가워하는데 얘는 이렇게 덤덤한 것 좀 봐"라면서 나를 소개해 줬다. ㅋㅋㅋㅋ MJC는... 고등학생 시절의 그녀와 비교하는 행위 자체가 실례일 정도로 맵시가 났다. 또 여담인데, 그녀의 식사량이 고등학교 때보다 너무 줄어 버려서 약간 실망했달까나... 나만 마구마구 먹는 느낌이 들어 조금은 자제할 필요를 느꼈달까나. ㅋㅋ 한마디로 MJC는 그야말로 미국 숙녀가 돼 있었다~

Chengdu Style 1.
Chengdu Style 2.
MJC네 기숙사에서 즐긴 Chengdu Style 만찬.

MJC의 친구들 중 한 명은 샌디에고에서 온 그녀의 1년 선배였고, 다른 한 명은 중국에서 온 1년 후배였다. 앞으로는 AVL과 CY로 지칭하겠다. 사실 AVL과 CY는 MJC의 SNS 피드에서 가끔씩 봤는데, 실물을 영접하니 마치 Sather gate 실물을 본 것마냥 감회가 남달랐다. 만날 일이 전혀 없겠다고 판단했던 사람들을 실제로 보게 되니 만화 속 캐릭터가 현실 세계로 툭 튀어나온 듯했다. AVL, CY와 간단하게 서로를 소개하고 미리 주문한 음식을 받으러 Chengdu Style로 향했다. 가는 길에 약간의 정적도 있었지만, 뭐 나름 괜찮았다. 애초에 이제 막 만난 사이에 무얼 기대하는가. 어떻게 해서든 말문을 트기 위해서 주변에서 듣기로는 버클리가 캠퍼스를 벗어나면 상당히 위험한 동네라던데 생각보다 훨씬 조용하고 마약 냄새도 거의 없다는 둥, 실제로 버클리가 위험하냐는 둥 이것저것 정신없이 말했던 것 같다. MJC와 그녀의 친구들 모두 버클리가 그렇게 평화롭기만 하지는 않다고 답했지만, 적어도 내가 있는 동안에는 사이렌 소리도 한 번 울리지 않았다. Chengdu Style은 그 구조가 아주 인상적이었다. 건물은 조악한 색의 페인트로 칠해져 있기는 했지만, 나름 자그마한 중국식 정원도 있었고, 옛날 중국식 전통 가옥처럼 중문도 한 개였나 두 개 정도 서 있었다. 물론, 레스토랑 내부는 지극히 현대적으로 꾸며졌다. 주문한 음식을 찾아서 MJC네 기숙사로 가서 넷이서 열심히 식사했다. 그런데 다들 양이 너무 적어서 '열심히'라는 수식어는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다. 마파 두부, 가지 요리, 치킨, 이름 모를 국수, 그리고 밥을 나눠 먹었다. 굉장히 맛있었다. 특히 가지 요리가 인기가 많아서 가장 먼저 동났고, 다른 메뉴는 절반 가량이 남았다. 모든 메뉴에 기름기가 많아서 MJC와 CY는 먹으면서도, 먹고 나서도 더부룩해했지만, 나는 식사를 마치고 나서 한 시간 뒤에서나 속이 조금 니글거렸을 뿐 큰 문제는 없었다. 버클리에서 먹었던 Chengdu Style이 너무 맛있어서 나중에 데이비스에서도 Chengdu Taste라는 레스토랑에 가서 마파 두부를 주문했는데 - 그때는 Chengdu Style이 체인점인 줄 알았다 - 내 입맛에는 전혀 맞지 않았다. 정말 솔직히 말해서 '배 고픈 생리적 느낌이 가라앉을' 정도로 먹었을 때 다른 세 명이 너무 배부르다면서 아무도 음식을 더 먹지 않아서 나도 집어 가는 음식의 양을 점점 줄이다가 '배 부른 정도'의 3/4 지점에 젓가락을 완전히 내려 놓았다. 누군가 나랑 같이 계속 먹어 줬다면 아마 치킨 정도는 다 먹지 않았을까. 뭐, 그래도 맛있게 먹어서 전반적으로 만족스러웠다.

커피 타는 MJC.
MJC가 내려 준 커피.

식사를 마치고 MJC가 손수 커피를 만들어 (내려) 줬다. 알고 보니 AVL이 커피 메이커를 사 줬다고. 커피 메이커와 같은 생존 필수품을 사 주는 친구가 가까이에 있다니, 너는 복 받았다고 MJC에게 일러 줬다. ㅋㅋ 커피를 마시면서 <Never Let Me Go>라는 영화를 시청했다. 어쩌다 보니 movie night이 돼 버렸는데, 버클리 기숙사에서 스크린 띄워 놓고 빔 프로젝터로 영화까지 볼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원작 소설을 너무 좋아하는 데다가 내가 선호하는 마스크의 배우들이 주연을 맡아서 - 나는 원작을 다 읽고 영화 포스터만 봤을 때 당연히 키이라 나이틀리가 Kathy일 줄 알았는데, 캐리 멀리건이 Kathy 역이라서 불만족스러울 뻔했으나, 다들 연기를 잘해서 그냥 그러려니 하고 봤다 - 한껏 기대했다. 그런데 영화는 정말 형편없었다. 배우들의 연기는 그럭저럭 괜찮았지만, 연출가의 능력에 의심을 품을 수밖에 없었달까나. 원작의 미묘한 감정 묘사는 시각적으로 전혀 드러나지 않았으며, 무엇보다 소설 속 세계의 진실을 전개하는 방식에 있어서 너무나 실망스러웠다. 어쨌든, 영화를 보고 나서 영화에 대한 감상평도 나눴는데, 그때 AVL이 정말 똑똑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AVL을 제외하고 CY, MJC, 그리고 나는 원작 소설을 다 읽은 상태였는데, 소설을 읽었을 때도 그냥 그러려니 했던 설정, 즉 고칠 수 없는 병을 치유하기 위해서 클론을 양성하고 나중에는 장기를 축출함으로써 클론을 죽인다는 내용을 두고 "그런 결정이 윤리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냐"라고 되물었던 사람은 AVL뿐이었다. 그러면서 자기는 설령 클론의 장기로 생명을 보존할 수 있다고 해도 그렇게 생을 연장하고 싶지는 않다고 답했는데, 나랑 MJC는 너무 확고하게 "부끄럽지만, 나라면 그냥 클론 장기 받을 것 같아"라고... 그런데 이 문제는 너무나 복잡하고, 나는 애초에 <Never Let Me Go>에서 가즈오 이시구로가 그런 생명 윤리 문제를 직접적으로 논하기보다는 인간이란 무엇인지, 인간성은 어디서 기원하는지, 그리고 무엇보다 되돌릴 수 없는 과거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이런 주제를 파헤치는 듯하다고 답하면서 어물쩡하게 넘어갔다. ㅋ

Berkeley Streetview 1.
AVL네 기숙사에서 먹은 초콜릿 아이스크림 샌드.
Berkeley Streetview 2.

영화까지 다 시청하고 수다도 조금 떨다 보니까 시간이 벌써 자정을 넘겨서 CY와 AVL을 각자의 집에 바래다 주고 왔다. AVL네 기숙사에 가서 또 10분 정도 앉아 있다가 왔는데, 내가 초콜릿을 좋아한다고 하니까 AVL이 냉장고에서 Trader's Joe에서 산 초콜릿 아이스크림 샌드를 꺼내 줬다. 완전 감동. ㅠㅠ 또 나랑 MJC가 다시 기숙사로 돌아가기 전에 24시간 편의점에 들르고 싶다고 하니까 자기 UCB 학생증을 내게 건네주면서 버스 타고 다녀오라고 했다... 그 다음날 샌프란시스코에서도 내 BART 패스가 오작동을 일으켜 AVL의 UCB 학생증을 한 번 더 썼는데, 여러모로 AVL에게 은혜를 많이 입었다. AVL네 기숙사에서 나와서는 MJC와 같이 버스를 타고 7-eleven에 가서 주전부리를 샀다. 나는 라임맛 페리에를 한 병 샀고, MJC는 뭘 샀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ㅋㅋ 그리고 버스 기다리기 귀찮아서 그 야심한 시각에 그 위험하다는 버클리 거리를 둘이서 걸어 올라갔다. 기숙사로 돌아가는 길에 노숙자들의 텐트가 즐비하게 늘어선 공원도 지나쳤는데, 거짓말 않고 만약 혼자 밤거리를 돌아다니면 정말 상해를 입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기숙사로 돌아와서는 또 한 시간 정도 MJC랑 '너는 잘 지냈니' '고등학교 시절' 등등의 키워드로 수다를 떨다가 - 아마 일 년 반 동안 밀렸던 안부를 묻느라 대화가 계속 길어진 듯하다 - 어느 새 새벽 2시가 넘어서 씻고 소파에서 잠들었다. 그렇게 버클리에서의 첫 번째이자 마지막 밤이 지나갔다.

UCB Streetview 3.
UCB Streetview 4.
UCB Campus 10 - 냇물.
UCB Campus 11 - Sather Tower.
UCB Campus 12 - Sather Gate.
UCB Campus 13.
UCB Campus 14.
UCB Campus 15.

그다음 날 8시 반 즈음에 일어나서 아침 9시까지 나갈 채비를 했다. 아직 MJC는 자고 있었는데, 일단 나부터 준비를 마치고 나서 걔를 깨웠다. 아 참, MJC가 자기 방 안도 구경시켜 줘서 전날 저녁에 들어가 봤는데 - 영광스럽게도 - 너무 좁아서 놀랐다. 사실 기숙사 유닛에 딱 들어 갔을 때 아무리 8명 정도의 사람들이 같이 산다고 해도 부엌이나 거실이 무척 넓어서 쾌적하겠다고 생각했는데, 정작 제일 중요한 방이 너무 작아서 금세 긍정적이었던 첫인상을 회수했다. MJC한테는 차마 말하지 못했지만, 그렇게 공동 소유 공간을 넓게 만들기보다 차라리 각자의 방 면적을 늘리고 거실은 최소한의 공간으로 구성하는 편이 나은 듯하다. 한 마디로 별로 중요하지 않은 공간은 쓸데없이 넓고, 중요한 공간은 쓸데없이 좁달까나. 그런데 이것은 토종 한국인인 나의 개인적인 견해이므로 미국인들은 다르게 사고할지도 모르겠다 - 예를 들어, 홈파티를 자주 개최하는 대학 문화를 고려하면 공유 공간을 넓게 배정하는 것이 한편으로는 이해된다. 어쨌거나, MJC도 나갈 준비를 마치고 9시 반이었나 10시 즈음에 드디어 샌프란시스코를 향해 출발했다. 바로 버클리 다운타운 BART역으로 가기 전에 MJC가 '해가 떴을 때의 캠퍼스'를 구경시켜 주고 싶다며 캠퍼스를 경유해 다운타운으로 갔다. 그 길목에 전날밤에는 가 보지 못한 작은 숲도 가로질렀다. UCD도 캠퍼스 전체가 나름 자연 친화적으로 조성돼 있지만 - 정확하게는 자연 속에 위치한다 - UCB는 역사가 오래 돼서인지 나무 한 그루 한 그루가 무척 장대했다. 그 작은 숲을 지나면서 굳이 레드우드 국립공원에는 안 가도 되겠다고 멋대로 정해 버렸다. ㅋㅋ 그렇게 캠퍼스를 약간 돌아서 다운타운으로 나갔는데, 정말 별 것 없었다. 그냥 데이비스보다 건물만 더 높은 근교 도시의 인상을 풍겼는데, 어쩌면 행인이 별로 없어서 그렇게 느껴졌을지도 모른다. 아, 그런데 다운타운 BART역 바로 앞에 파리 바게트 버클리 지점이 있었다. 나름... 한국인으로서 자부심을 느꼈다... ㅋ 미국 현지인들은 파리 바게트가 한국 식품 대기업 SFC에서 출범시킨 대형 체인임을 알고 있을지 내심 궁금하다. BART에 탑승하기 전에 MJC가 스타벅스에 들르고 싶다고 해서 걔는 어쩌구 저쩌구 이름이 긴 음료 벤티 사이즈인가를 주문했고, 나는 톨 사이즈 라떼 한 잔에 비건 시금치 랩 같은 브런치 메뉴를 구매했다. 그 브런치가 미국에서 내가 먹은 최초의 비건 메뉴였는데 - 최초이자 마지막이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 생각보다 배도 부르고, 맛도 있었다. 그때 좋은 인상을 남겨서 타겟 데이비스 지점에서 장을 보고 난 뒤에 점심으로 사 먹었는데, 그때는 별로였다. 어쨌든, 지하철 안에서 음식을 먹기에는 냄새도 나고, 코로나에 감염될 위험도 컸기에 음식만 먼저 다 먹었다. 라떼는 아마 지하철 타고 가는 내내 들고 가다가 샌프란시스코 시내에 당도해서야 길가의 쓰레기통에 버렸던 것 같다. 아, 참고로 스타벅스에서 나오는 과정에도 나름의 일화가 엮여 있는데, MJC 메뉴를 한참이나 기다리다가 - 나보다 먼저 주문했는데 내 주문 내역보다 훨씬 늦게 나왔다 - 걔가 주문한 것처럼 보이는 음료가 나와서 그것을 들고 매장을 나갔는데, 알고 보니 걔가 주문한 메뉴가 아니었다. 보통 미국 스타벅스에 가면 이름을 불러 주는데, 하필 우리가 갔던 곳에서는 주문자의 성명을 부르지 않아서 메뉴를 판별하기 어려웠다. 어쨌든, MJC는 그 음료를 조금 마시다가 자기는 휘핑크림을 추가하지 않았는데 자기 손에 들린 음료에는 휘핑크림이 얹혀 있다는 사실을 통해 남의 음료를 들고 나왔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다시 스타벅스로 돌아가서 원래 주인에게 이실직고할까, 1분 정도 고민했는데, 그냥 내가 일말의 죄책감만 느끼면서 마시라고 했다.

Berkeley Downtown.
Berkeley Downtown Starbucks에 걸린 직원 소개글.
Downtown Berkeley BART Platform.

2. 샌프란시스코 - 1月 15~16日

1. Squat & Gobble에서 브런치
2. Marina District 구경
3. Palace of Fine Arts 방문
4. Crissy Field East Beach에서 금문교 바라보기
5. Union Square 방문 및 Macy's 둘러보기
6. Chinatown 구경
7. California Fish Market에서 저녁 식사
8. Chancellor Hotel에서 숙박
9. Sears Finer Food에서 아침 식사
10. Grace Cathedral 방문
11. Chinatown 재방문
12. SF MoMA 관람
13. Yerba Buena Center for the Arts에서 점심 식사
14. Westfield에서 쇼핑
15. 귀가

1月 15日

주말에 버클리에서 샌프란시스코로 BART를 타고 가려면 중간에 한 번 환승해야 한다. 나랑 MJC는 가는 중에 수다 삼매경에 빠진 나머지 원래 환승하려 했던 정류장을 지나쳤는데, 다행히도 그 다음 역에서도 똑같이 환승할 수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두 번째 기차로 환승했을 때 그 기차가 Antioch로 향하는, 즉 우리가 가려는 방향과 정반대로 가는 기차여서 결국 원래 환승하려 했던 정류장에 다시 내려서 샌프란시스코행 열차에 무사히 몸을 실었다. 그렇게 바다를 건너서 샌프란시스코 Civic Center에 도착했다. Civic Center에 대해서는 안 좋은 기억만 넘쳐흐를 뿐, 이 글을 쓰는 지금도 내 마음 속 샌프란시스코에서 다시 가고 싶지 않은 곳 1순위를 차지하고 있다. SFO에서 BART를 타고 Civic Center역에 내렸을 때, 샌프란시스코의 극악무도한 첫인상은 이미 세 번째 교환학생 일지에 상세히 기술해 놓았으니 내가 왜 그곳을혐오하는지 알고 싶다면 한 번 읽어 보기를 권장한다. 주의 사항은, 밥 먹는 도중에는 읽지 않기를. 다시 만난 Civic Center는 여전히 노숙자 천지에 대마초 냄새로 가득했다. 다행히도 우리가 샌프란시스코를 여행하는 내내 날씨가 화창했기 때문에 첫 번째 방문만큼 분위기가 암울하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그래도 신기할 노릇이다. 코앞에 시청이 떡하니 자리했는데, 왜 그 어떤 공무원도 시청 앞의 노숙자들을 '정리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을까? 인격체에게 '정리한다'라는 동사를 쓰는 것에 대해 거부감이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어제 뉴욕 차이나타운의 아파트에서 한국계 여성이 흑인 노숙자에게 몇 번이나 칼에 찔려 살해당했다는 보도를 접하니 노숙자에 대한 일말의 연민과 동정조차 싹 사라졌다. 그래도 우리의 목적지는 시청이나 그 근처가 아니었으므로 시청 바로 옆에 위치한 Asian Art Museum 길 건너 버스 정류장으로 걸어 가 버스를 타고 Marina District로 이동했다. 버스가 출발하기 직전에 '누가 봐도 한국인 행색을 한' 남자 두 명이 가까스로 탑승했다. 영어 억양이나 버스에 타고 난 뒤 서로 나눈 대화를 통해 한국인임을 '확인'했지만, 옷차림 - 솔직히 나는 한국인이나 중국인이나 얼굴은 비슷하게 생겼다고 생각한다 - 으로써 그들이 한국에서 왔음을 '확신'했다. ㅋㅋ 아, 그 아저씨들은 우리보다 한 두 정거장 앞에 내리셨다.

SF Civic Center Station.
SF Orpheum.
SF City Hall.

샌프란시스코 브런치 맛집을 검색하던 중에 문득 초콜릿 시럽을 뿌린 크레페가 먹고 싶어져서 Squat & Gobble에 가자고 당당하게 MJC에게 권유했다. 걔도 나를 어느 정도 믿고 동의한 듯했지만, 결과는... 약간 암담했달까나. 두 번째 샌프란시스코 여행의 동선을 짜다가 MJC가 날씨가 좋으면 해변에서 피크닉을 하자고 제안해서 Marina District에서 브런치를 해결하고 피크닉용 먹을거리를 구매해서 그 근처 Palace of Fine Arts를 갔다가 The Presidio를 쭉 따라 Baker Beach에 도착한 다음 피크닉을 즐기려고 했다. 물론, 목차에 이미 나와 있듯 원래의 계획은 변경됐다. 어쨌든, 그래서 골라 놓은 브런치 맛집 목록 중 Marina District에 위치한 가게를 가게 됐고, 그것이 Squat & Gobble이기도 했다. 나는 Nutella with strawberry crepe를 주문했고, MJC는 시저 샐러드인 듯한 메뉴를 시켰다. 가게에 손님은 꽤 있었지만, 솔직히 말해서 그 거리의 다른 가게들보다는 현저히 손님이 적었다. 그래서 조금은 불안했는데, 아, 한 입 먹은 순간 이 가게는 맛집이 아님을 깨달았다. 크레페가 맛있다더니, 맛있기는 개뿔, 정자동 버터핑거에서 파는 팬케이크가 훨씬 맛있다. 표정을 보니 MJC도 딱히 식사에 만족하는 눈치는 아니었다.

Squat &amp; Gobble.
Marina District - Books Inc. 1.
Marina District - Books Inc. 외국 독립 서점들은 대부분 이렇게 직원 메모가 부착돼 있더라.
Marina District Streetview.

Squat & Gobble에서 브런치를 먹고 나서 Marina District를 조금 둘러 보기로 했다. 참, 브런치 가게에 가는 길에 애플 매장이 있어서 에어팟 케이스도 구경할겸 거기도 들렀다. 정말 솔직히 말해서 요즘 젊은 세대가 세계 어딜 가나 애플 매장에 한 번쯤은 꼭 방문하고 싶어하는 심리를 이해하지 못하겠다. 해당 애플 매장에서만 판매하는 지역 특산품 같은 굿즈가 있다면 모를까, 가격만 다를 뿐 전 세계에 똑같은 제품을 천편일률적으로 전시하고 판매하는데 말이다. 그래도 이번 경우에는 에어팟 프로 케이스 구매라는 구체적인 목적이 있었으므로 들어갔다. 나는 첨단 제품에 상당히 관심도 없고, 욕심도 없어서 최근 나온 아이폰이 몇 세대인지조차 모른다. 게다가 아이폰은 팀 쿡 체제하에서 점점 못생겨지고 디자인 면에서의 혁신도 전무하므로 더욱 더 애정이 가지 않는다. 그러면서 아이폰 SE2를 사용하는 나 자신이 모순적이지만, 진지하게 군대를 제대하고 나서는 갤럭시 기종으로 갈아탈까 고민 중이다. 가격이 말도 안 되게 비싸기는 하지만, 연보라색 갤럭시 Z 폴드에 자꾸만 눈이 간다. 어쨌든, 들어가서 처음 몇 분 정도는 MJC랑 새 아이폰 기종을 만지작거리다가 이내 에어팟 케이스가 걸려 있는 매대로 직진했다. 내 에어팟에 들어맞는 사이즈의 상품이 두 개 정도 보였지만, 죄다 별로라서 결국 아무것도 사지 않았다. 사실 글을 쓰는 지금까지도 마음에 드는 케이스를 발견하지 못해서 아무것도 씌우지 않은 채 가지고 다니는 중이다. 케이스 없이 다니면 흠집이 난다는데, 잘 모르겠다. 그리고 케이스 없이 들고 다니다가 기스가 나서 제 기능도 하지 못하게 된다면 그것은 '하드웨어나 제작하는 애플이라는 기업의 문제'지 절대 내 잘못은 아니라고 판단한다. 마음에 드는 제품이 없어서 애플 스토어에서 빈 손으로 나왔고, 브런치를 먹고, 그다음에 브런치 가게 바로 옆에 자리한 지역 서점을 구경했다. 꽤 오래 있었던 것 같은데, MJC랑 나랑 서로 다른 코너를 둘러 봤다. Joan Didion 에세이 코너가 따로 마련돼 있어서 쉽게 눈길이 갔다. 아직 그녀의 작품을 읽어 보지는 못했지만 - 지금 도서관에서 The White Album을 빌려 왔다 - 캘리포니아 출신 유명 작가라는 점에서 내가 캘리포니아에 체류하는 동안 한 권쯤은 접해 보고 싶다. 그런데 지난번 샌프란시스코 여행에서 John Steinback 에세이를 사 놓고 읽지 않았기 때문에 내 책은 추가로 구매하지 않았다. 대신 IBDP 시절 TOK 교과서에서 자주 보던 Calvin and Hobbes 만화책이 있길래 동생 선물로 한 권 샀다. 동생은 별로 마음에 들어하지 않을 것이 뻔하지만, 그래도 보면서 영어도 조금 익히고, 간간이 담긴 철학적 내용도 자기 나름대로 음미할 수 있기를 바라며...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까 열심히 공부해서 꼭 하나고에 진학하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다.

Palace of Fine Arts 근처 주택가 1.
Palace of Fine Arts를 향해 걷고 있는 MJC.
Palace of Fine Arts 근처 주택가 2.
Palace of Fine Arts 근처 주택가 3 - 정원 1.
Palace of Fine Arts 근처 주택가 3 - 정원 2.
Palace of Fine Arts 근처 주택가 5.&nbsp;
Palace of Fine Arts 1.
Palace of Fine Arts에서 찰칵.
Palace of Fine Arts를 찍는 중인 MJC.
Palace of Fine Arts 앞 주택가.
Palace of Fine Arts 2.
Palace of Fine Arts 3.
Palace of Fine Arts 내부에서 찰칵 1.
Palace of Fine Arts 내부에서 찰칵 2.
Palace of Fine Arts 4.
Palace of Fine Arts 5.
Palace of Fine Arts 6.

Marina District는 참 별 볼 일 없는 동네였다. 그냥 브런치 카페와 각종 로컬샵 밀집 지역인 듯한데, 밥은 아까 전에 먹었고, 로컬샵들은 그다지 흥미롭지 않았다. 서점에서 나와서 또 얼마간 돌아다니다가 인테리어 가게도 방문하고, 문구점도 들어가 봤는데, 그냥 그랬다. 어떤 가게에 입장해서 무언가를 꼭 사서 나와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관광객이라면 웬만해서 뭐라도 사고 싶을 텐데, 그런 마음이 전혀 일지 않았다. 더 이상 구경할 것도 없는 듯해서 Palace of Fine Arts까지 걸어갔다. Lombard Street을 따라서 일직선으로 걷다가 중간에 한 번 Marina District 안쪽으로 꺾어 들어갔는데, Palace of Fine Arts 바로 앞에 있는 주택 단지가 너무 아름다웠다. 간간이 산책하는 현지인이 있어서 사진으로 남기지는 못했지만, 딱 봐도 부촌임을 알 수 있었다. 역시 부촌이 관광하기에도 가장 좋다는 것은 만국 공통인 듯하다. 집들도 하나같이 다 반듯하게 지어져서 번지르르하게 관리되고 있었고, 현관 옆의 정원도 가꾼 티가 폴폴 났다. 캘리포니아 날씨에 걸맞게 이국적인 꽃들과 풀로 개성 있게 장식됐으며, 커튼을 치지 않은 창문 사이로 보이는 집들의 내부는 마치 휴양지 호텔처럼 꾸며져 있었다. 동네의 전반적인 분위기도 고즈넉해서 산책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그렇게 서서히 여행의 즐거움이 차오르던 찰나에 Palace of Fine Arts가 떡하니 우리 눈앞에 나타났다. 와, 사진으로만 봤을 때는 굳이 여기를 가야 하나 싶었는데, 실제로 보니까 정말 멋있었다. 크기도 사진에서보다 훨씬 웅장했고, 신전의 기둥 양식도 로마의 것을 본떠 만든 것처럼 우아했다. 더군다나 날씨도 좋아서 그 앞 잔디밭에 돗자리를 깔고 피크닉을 즐기는 현지인들도 많았다. 나보다도 MJC가 더 들떠서 둘이 사진을 엄청 많이 찍어댔다. Palace of Fine Arts 내부로 들어가니 기둥의 규모가 더욱 실감 났다. 입구 앞에 안내 표지가 있었지만, 읽어 보지 않아서 그 건축물이 어떤 용도로 지어졌는지는 아직도 모른다. 위키피디아에 검색해 보면 나오겠지만, 굳이 알 필요는 없는 듯하다. 어떤 뚜렷한 기능을 한다기보다는 그저 장식용 건물인 것 같았다.

Crissy Field East Park에서 찰칵. 포즈는 금문교를 따라했는데...
Crissy Field East Beach 1.
Crissy Field East Beach 2 - 까마귀인 듯 까마귀가 아닌 새.
Crissy Field East Beach 3 - 허스키 덥겠다.
Crissy Field East Beach 4.
Crissy Field East Beach에서 찰칵.
Crissy Field East Beach에서 보이는 Alcatraz.

Palace of Fine Arts를 구석구석 구경하고 나서 바로 앞에 위치한 Crissy Field East Beach로 걸어 갔다. 계획대로라면 Palace of Fine Arts에서 Presidio로 넘어가 긴 산책로를 따라 걸어서 Baker Beach에 가야 하지만, 이미 Palace of Fine Arts까지 걸어오기도 했고, MJC가 더 이상 걷기를 원하지 않는 듯해서 그냥 가장 가까운 해변으로 목적지를 변경했다. 사실 해변에서 피크닉을 즐기자는 아이디어는 이미 버린 지 오래됐기에 - 그래서 Marina District에서 먹을거리도 사지 않았다 - 우리는 지친 다리도 쉬게 할 겸 해변의 콘크리트 데크에 앉아서 금문교를 꽤 오랫동안 말없이 바라봤다. 할 말이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아서 그랬던 것 같기도. Crissy Field East Beach에는 사람들이 무척 많았다. 관광객들도 많았지만, 텐트를 가져와서 아이들과 함께 놀거나 반려견과 함께 산책하러 나온 가족 단위 현지인들이 더 많은 듯했다. 바닷가라서 그런지 갈매기는 물론 많았고, 의외로 까마귀처럼 생긴 검은색 깃털의 새도 군집을 이뤄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 까만색 깃털이 반질반질하게 빛나서 살짝 호감이 갔다. 적어도 비둘기처럼 생기지 않아서 좋았다. 콘크리트 데크에 걸터 앉아 바라보는 오후의 금문교는 아름다웠다. 샌프란시스코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떠올리는 명실상부 최고의 랜드마크 구실을 제대로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샌프란시스코에 다시 간다면 금문교를 보러, 혹은 건너러 굳이 하루를 빼고 싶지는 않다. 오히려 그 앞의 Presidio는 산책하러 꼭 가 보고 싶고, 금문교 건너에 있는 소살리토라는 작은 마을을 방문할 의사도 있지만, 금문교 자체에 관해서는 흥미를 잃어버렸다. 반대로, 다들 금문교, 금문교 거리니까 금문교에 대한 기대치만 높아져서 실제로 봤을 때는 별다른 감흥이 일지 않았달까나. 그래도 날씨가 좋았던 덕에 금문교가 선명하게 잘 보였다. 첫 번째 샌프란시스코 여행에서 흐릿하게만 금문교를 볼 수 있었던 아쉬움을 드디어 달랬다. 그런데 금문교보다도 사실 바닷가 풍경이나 그 일요일 늦은 오후 같은 여유로운 분위기 자체가 훨씬 마음에 들었다. 등에 매고 있던 짐이 꽤 무거웠다는 점만 제외하면 모든 것이 완벽했다. 샌프란시스코 앞바다에는 요트를 타는 사람들도 꽤 있었고, 웨이크보드를 즐기는 무리도 보였다. 출렁이는 파란색 물결 위로 보이는 세련된 하얀색 조형물들이 푸른 하늘과 어우러져 나름 휴양지 같은 분위기를 형성했다. 우리가 앉아 있던 자리 오른편으로는 Alcatraz 섬이 보였다. 먼젓번에 Coit Tower에서도 봤지만, 이번에는 새로운 각도에서 그 교도소 섬을 조망했다. 딱히 인상 깊지는 않았다. 슬슬 해가 질 기미가 보여서 Crissy Field East Park 건너편에 있는 버스 정류장으로 걸어가 버스를 타고 Union Square로 이동했다.

Crissy Field East Park 앞에서 귀여운 카트를 타는 사람들.
Union Square.
Powell Street Cable Car Stop.
Chinatown 가는 길 - Transamerica Pyramid.
Chinatown 전경.

사실 Crissy Field East Beach에서 Union Square로 가는 버스를 탑승할 때도 나름의 일화가 발생했다. 샌프란시스코로 넘어오기 전 버클리 다운타운 역에서 20불이나 Clipper card에 충전했는데, 세상에 버스 카드 리더기에 카드를 댔더니 자꾸 잔액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결국 버스 기사님께서 요금 안 내도 되니까 그냥 자리에 앉으라고 해서 졸지에 공짜로 버스에 탑승했다. Union Square에 도착하기 전에 내 핸드폰의 Apple Wallet에 Clipper card를 등록하려고도 해 보고, BoA 카드도 등록해 보려고 했지만, 이러나 저러나 다 실패해서 나도 포기해 버렸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꿈을 꾸는 것 같았는데, 금세 나는 여전히 현실 세계에 속해 있음을 상기했다. 나중에 저녁 식사를 하고 다시 Union Square 쪽으로 넘어갈 때는 하는 수 없이 그 전 날 AVL에게 건네받은 UCB 학생증 - 은 Bay Area에서 교통카드로도 사용할 수 있다 - 을 사용했다. 그렇게 정신없이 Union Square에 다다랐다. 사실 첫 번째 샌프란시스코 여행 도중 Union Square는 가 본 적이 없어서 - 아이러니하게도 말이다 - 이번이 첫 방문이었다. 그런데 딱히 볼거리는 없었다. 가운데 사각형 광장을 둘러싸고 호텔과 쇼핑 센터가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MJC가 AVL에서 선물할 MAC 립스틱을 사야 한다고 해서 근처에 위치한 Macy's 백화점에 들어갔다. 백화점 1층에 있는 MAC 매장에서 신나게 립스틱을 골랐는데, 이것이 웬걸, 아무리 기다려도 매장 직원이 나타나지를 않아서 그냥 Powell Station 근처의 또 다른 MAC 매장에서 해당 립스틱을 구매했다. MAC 매장에서 나와 Chinatown 끝자락에 위치한 Sotto Mare라는 식당으로 향했다. 대중교통을 타고 이동할까 고민했지만, 내가 그냥 걷자고 해서 그 구불구불하고 엄청난 경사의 언덕길을 우리는 걸어갔다. 가는 도중에 내심 후회하기도 했지만, 글을 쓰는 지금 돌이켜 보니 걸어가기를 잘했다. 가는 길목에 Swatch 매장도 있어서 들어가서 구경했는데, 딱히 마음에 드는 시계 모델이 없어서 뭘 사지는 않았다. MJC는 그때가 Swatch를 처음 알았다고 했나, 뚜렷이 기억나지는 않지만, 꽤나 신기해했다. Swatch는 점점 추상화를 닮은 손목 시계를 제작하는 듯하다. 그런데 나는 시계에 무조건 숫자가 써 있어야 해서 - 나만의 기준이다 - 숫자가 표기돼 있으면서도 사이즈는 적당히 아담하고, 손목 밴드 디자인도 예쁜 모델을 찾을 수가 없었다. 아, Swatch 홈페이지에서 구경했던 뉴욕 MoMA와의 콜라보 작품 - 앙리 루소의 "꿈" 속 사자가 떡하니 인쇄돼 있다 - 의 실물을 볼 수 있었던 점은 흥미로웠다. 그 외에는 평범했다. 그렇게 굽이진 언덕길을 올라가고 내려가기를 반복하던 중에 다운타운의 Transamerica Pyramid를 배경으로 MJC의 사진을 찍어 주기도 했다. ㅋㅋ 지루한 길을 나름 재밌게 가려고 노력했다.

AA Bakery 1.
AA Bakery 2.

걷다 보니까 그 유명한 샌프란시스코의 Chinatown에 들어섰다. 지난번에는 정신이 하도 없어서 Chinatown의 정문 격인 Dragon Gate만 슬쩍 사진 찍고 Powell Street으로 돌아가서 내심 아쉬웠는데, 이번 기회에 아주 제대로 그 동네를 돌아 봤다. 애초에 저녁 식사를 하려고 점찍어 뒀던 Sotto Mare에 도착하기 전에 Chinatown의 로컬 베이커리도 들러서 에그 타르트 등을 살 요령이었기에 MJC에게 양해를 구하고 기어이 Chinatown까지 걸어갔다. 사실인즉슨, 그렇다. ㅋㅋ 그날 '멀리' 걷지는 않았다만, 경로의 경사가 워낙 심해서 MJC에게 미안했다. 어쨌든, 원래는 가장 유명한 Golden Gate Bakery를 방문하려고 했는데, 안타깝게도 우리가 갔던 날에 휴업하는 바람에 AA Bakery라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당일 검색해 보니 Golden Gate Bakery는 평소에도 장사가 불티 나게 잘 돼서 비성수기인 겨울에는 틈만 나면 오너 가족이 바캉스를 떠난다고 하더라. 그 이야기를 들으니 너무 부러웠다. 나도 나중에 그 정도로 잘 나가지는 않더라도 세련되고 고급진 맛으로 현지인들에게 사랑받는 파티세리의 제빵사와 친해져서 연말연시면 무료로 몽블랑 빵이나 케이크 같은 것도 받을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물론, 내가 직접 제과에 임해 볼 생각은 추호도 없다. 왜냐하면 나는 라면 물 조절도 못하는 역대급 요리 실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 어쨌든, AA Bakery에 들어가 보니 생전 처음 보는 메뉴가 유리 진열대 안에 빽빽하게 늘어서 있었다. 다 맛있어 보였지만, 비닐 포장지로 쌓인 과자도 꽤 돼서 이름표만 보고 어떤 메뉴를 주문할지 결정하기 나름 어려웠다. 한국인들에게도 익숙한 서양식 디저트도 많았지만, 호두가 박힌 쿠키 - 호두 과자라고 하면 천안의 명물을 떠올리기 십상이나, 그와는 전혀 다르고, 오히려 초코칩 쿠키 같이 생겼다 - 나 파인애플과 팥이 들어간 번, 망고 만쥬 - 개인적으로 너무 탱글탱글하고 예쁘게 빚어져서 하나 주문하고 싶었지만, 가격을 고려해 참았다 - 처럼 중국식 베이커리가 아니라면 찾아보기 힘든 메뉴가 훨씬 다양했다. 이처럼 한국이나 여느 장소에서 쉬이 찾기 어려운 것들을 경험할 수 있음이 해외 여행의 묘미 아니겠는가. 마음 같아서는 맛있어 보이거나 예쁘게 생긴 것들을 모두 구매하고 싶었지만, 어차피 조금 뒤에 저녁 식사도 해야 하고, 호텔에 냉장고도 없을 것 같아서 딱 두 개만 사기로 했다. 그런데 하필이면 내가 입장하고 나서 내 뒤로 줄이 갑자기 길어진 바람에 전 메뉴를 천천히 살펴볼 수 없었다. 물론, 두 개 중 하나는 이미 에그 타르트로 결정됐지만, 나머지 하나에 대해 상당히 고민했다. 옆에서 지켜보던 MJC가 중국식 베이커리에서는 Moon Cake을 먹어 봐야 한다면서 가장 기본적인 맛이 white lotus니까 입문자인 내게 white lotus moon cake with yolk를 추천해 줬다. 그때 yolk가 계란 노른자를 뜻하는 줄 몰라서 점원 분께서 노른자가 추가된 것을 고를 것이냐고 여쭤 보는데 내가 당당히 아니라고 답했다. 그랬더니 옆에 서 있던 MJC가 황급히 "No, with yolk please"라고 말해서 다행히 노른자가 들어간 moon cake을 먹어 볼 수 있었다. 1월의 음식 리뷰에 이미 설명했지만, 만약 노른자가 없는 버전을 주문했다면 빵이 지나치게 느끼해서 아마 나흘에 걸쳐 먹지 않았을까 싶다. Moon cake 하나가 거의 $10에 달하는 가격이라서 설령 맛이 없었다 하더라도 기를 쓰고 다 먹었을 것이다. ㅋㅋ 한 가지 웃픈 사실은, 메뉴를 고르고 나서 마지막에 카드로 결제하려 했는데, AA Bakery에 카드 결제 시스템이 도입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리더기에 자꾸 오류 메시지가 떴고, 결과적으로는 무려 $13 어치에 달하는 음식을 공짜로 먹었다. 내 바로 뒤에 있던 베이커리의 단골 손님이 "이 집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현금 결제만 받았어"라고 알려 주셔서 알게 됐달까나. 내 뒤의 긴 대기줄 때문에 베이커리를 여유롭게 구경할 기회는 놓쳤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 덕분에 무료로 맛있는 음식을 얻었다.

 

AA Bakery에서 나와 Chinatown의 거리를 쭉 내려 갔다. 어느새 하늘은 어두워졌지만, 거리는 장을 보는 중국인들과 소수의 관광객들로 북적였다. 식료품점들이 모두 성행하고 있었는데, 모과처럼 외국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동북아시아 과일도 많아서 반가웠다. 무엇보다 그 향기로운 냄새와 산뜻한 색 조합이 좋았다. 그리고 Sotto Mare가 있는 거리로 건너 가기 직전 코너에는 건어물 가게가 자리했는데, 냄새는 상당히 비렸지만, 다양한 물고기로 만든 어포를 보니까 왠지 모르게 나도 하나 사 들고 호텔방에서 열심히 물어 뜯고 싶었다. Chiantown 끝자락과 Sotto Mare 사이에는 도로가 두 개 놓여 있는데, 그중 하나를 건넜더니 바로 앞에 사탕 가게(Z. Cioccolato)가 있어서 MJC가 들러 보자고 했다. Judy Blume의 소설 제목으로나 알았던 'fudge'의 실물을 거기서 처음 봤다. Chocolate fudge... 초콜릿 마니아라고 자부하는 나조차 거부감이 드는 음식이라서 단 맛을 무척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면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싫어할' 지도 모르겠다. 문자 그대로 커다란 뭉텅이가 아무렇게나 잘려서 판매대에 놓여 있는데, 그 맛도 가지각색이었다. 카라멜 초콜릿 덩어리도 있었고 - 지금 생각해 보니 fudge를 번역한다면 초콜릿 덩어리나 뭉텅이가 적절하지 않나 싶다 - 다크 퍼지도 있고, 밀크 퍼지도 있고, 아무튼 참 다양했다. 눈으로만 가게를 둘러 보고 나와서 Sotto Mare로 향했다. 전날 예약하지 않고 가서 앉을 자리가 있을지 내심 걱정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줄도 서야 했고, 15분 정도 기다려서 대기 명단에 이름을 올리려고 했더니 40분이나 더 기다려야 한다고 해서 그냥 바로 옆에 있는 California Fish Market에 갔다. Sotto Mare가 얼마나 유명하냐면, 사실 파는 음식 자체는 특별할 것도 없는데 그 주변에서 그 가게만 사람이 북적이다 못해 '인파'라고 부를만한 규모의 사람들이 응집돼 있었다. 게다가 여행하면서 자주 목격하지도 않은 한국인을 그 가게에서만 세 팀이나 만났다. 그중에서는 나와 동일한 기간 동안 UCD에 파견된 연세대 교환학생 누나 B도 있었는데, 당시에는 B 누나가 맞을지 않을지 긴가민가해서 굳이 인사하지 않았다. 나중에 데이비스로 돌아온 후에 1월 15일 저녁에 Sotto Mare에서 식사했냐고 물어 보니 그렇다고 해서 B 누나임을 확실히 알았다. 여하튼 세상은 참 좁아 터졌다.

California Fish Market에서 AA Bakery 에그 타르트 먹는 나.
California Fish Market 1.
California Fish Market 2.
California Fish Market &amp; Sotto Mare.

우연히 가게 된 California Fish Market이지만, 음식 맛도, 분위기도 나름 괜찮았다. 캘리포니아 해안에서 잡은 싱싱한 해산물을 직접 - 이 맞는 표현인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어부들과 직거래하는 식당인 듯했다 - 공급받아 바로 요리를 만들어 줬다. 그래서인지 MJC가 주문했던 조개 찜 같은 메뉴의 조개가 상당히 신선했다. 음식을 주문하고 나서 시간이 꽤 흘러도 요리가 나오지 않자 약간 불안했는데, 지금 돌이켜 생각하면 미국에서 음식이 나오는 데 소요되는 평균 시간만큼 딱 걸린 듯하다. 우리는 야외 테라스석에 앉았는데, 식사하는 도중에 식당이 위치한 골목으로 차가 두 대 정도 들어오는 바람에 공연장마냥 헤드라이트로 번쩍이는 배경에서 열심히 음식을 먹었다. 두 대 중에 한 대는 운전자가 미숙했는지 골목으로 들어왔던 길 그대로 다시 나가는 데 5분이나 걸렸다. 그냥 후진하면 될 것을 차체를 180도 회전해서 나가려고 했는데, 좁기로 악명 높은 샌프란시스코의 골목에서 그러기란 여간 쉽지 않다. MJC나 나나 그 차가 건물을 박지는 않을까 비웃었는데 - 둘 다 못됐다 - 다행히 접촉 사고는 일어나지 않았다. 아, 그리고 우리 옆 테이블에는 어느 일가가 누군가의 생일 파티를 하고 있었는데, 너무 귀여운 남자 아이가 이 테이블 저 테이블 돌아다녀서 그 부모가 막 잡으러 다녔다. ㅋㅋㅋ

찍을 것은 또 다 찍었대요~ Chancellor Hotel 엘리베이터 내부.
Chancellor Hotel 호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버스를 타고 Union Square 방향으로 이동했다. MJC는 Powell Station에서 BART를 타고 귀가했고, 나는 걔보다 두 정거장 정도 앞에서 내리면서 작별 인사를 했다. 귀국하기 전에 한 번 더 만날 일이 있을지는 모르겠다만, 버클리를 재방문할 가능성은 희귀하므로 아마 샌프란시스코에 갔을 때 다시 연락하지 않을까 싶다. 나는 버스 정류장에서 조금 걸어서 Chancellor Hotel로 들어갔다. 호텔로 향하는 길에 매리어트 호텔이 있었는데, 나도 그냥 돈 더 내고 여기서 묵을 걸 라고 생각했다. 호텔스닷컴에 의하면 3.5성급이라는데, Chancellor Hotel은 전혀 그 정도 값어치를 하는 숙소가 아니었다. 아, 물론 위치가 샌프란시스코의 핵심을 여행하기에 매우 편리하기는 하다. 그래도 호텔 자체가 굉장히 낡았고, 로비도 '호텔 로비'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비좁았으며, 조식을 주는 - 나는 먹지 않았지만 - 식당도 호텔 프론트 바로 옆에 위치했다. 프론트에서 만 원 정도의 보증금을 지불하고 방 키를 받고 올라갔다. 나는 4층의 '옆 건물 뷰' 방을 배정 받았다. 방 자체의 첫인상은 나쁘지 않았으나, 짐을 풀고 둘러보니 여러모로 3.5성급에 걸맞지 않다고 생각하게 됐다. 첫째, 여관도 아니고, 모텔도 아니고, 간판에 호텔이라고 달아 놓았으면서 슬리퍼 한 켤레도 없다. 덕분에 샤워한 후에도 맨발에 신발을 신고 까치발로 돌아 다녔다 - 한 가지 다행이었던 것은, 애초에 내가 싱글 퀸 베드 룸을 예약해서 방 면적의 절반 가량이 침대로 가득 찬 덕에 신발을 다시 신을 일도 그다지 없었다. 둘째, 냉장고가 없다. 나의 불길한 예감은 현실이 됐고, 냉장고가 없으니 당연히 생수도 제공되지 않았다. 밖에서 물을 사 오지 않은 나는 그날 밤 Moon cake을 먹으면서 목이 멜 뻔 했다. 셋째, 욕실이 상당히 좁다. 그런데 방 자체가 작으니 욕실 크기는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넷째, 욕실 바로 옆 다용도실 안에 들어가 봤더니 다림판, 옷걸이 등이 있었는데, 제일 중요한 금고가 없었다. 사실 옷가지야 누가 훔쳐가도 다시 사면 되니까 - 좋아하는 옷들이니 아쉬울 테지만 - 괜찮은데, 지갑이나 집 열쇠 따위가 없어지면 대략 난감해지지 않은가. 그래서 지갑과 여권, 집 열쇠만 금고에 보관하고 크로스백 하나만 맨 채로 다음 날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려 했는데, 금고가 없어서 할 수 없이 다음 날에도 모든 짐을 다 들고 다녔다. 다섯째, 다용도실에 먼지가 쌓인 듯했다. 제대로 청소하지 않나 보다. 상당히 치명적이었던 여섯째 불만 사항은, 바로 호텔이 워낙 오래된지라 각 호실마다 냉난방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았다. 게다가 현대식 냉난방 기구가 있는 것도 아니고, 방 천장 한가운데에 거대한 팬이 돌아가고 있었는데, 호실 벽에 적힌 매뉴얼을 그대로 아무리 따라 해도 팬이 꺼지지 않았다. 덕분에, 나는 데이비스 집에서도 하지 않았던, 겉옷 조끼 입고 잠들기를 시전했다. ^^ 심지어 프론트에 전화도 했는데, 당연히 프론트맨은 받지 않았다. ^^ 고로, 아무리 위치가 좋다 하더라도 Chancellor Hotel에 다시는 묵지 않으리라 결.의.했.다. 아, 그리고 마지막 일곱 번째로 와이파이가 엉망이었다. 그런데 와이파이의 경우에는 UCD Shields Library도 굉.장.한. 퀄.리.티.를 자.랑.하.니. 치명적으로 꼽지 않겠다. 내가 베푸는 관용에 부디 Chancellor Hotel의 호텔리어들이 감사하기를. 호텔에 도착해서 가장 먼저 샤워를 했고, 그다음에 엄마와 안부 영상 통화를 한 다음에 프랑스 유학생 H와 다가오는 6월 프랑스 여행 계획을 구체화했다. 1~2시간 가량 의논한 듯한데, 막판에 내가 거의 초인적으로 일정을 정리해 버렸다. 그러나... 그 정리본을 H에게 불러 주는 동안 걔가 내가 말하는 내용을 구글 문서에 받아 적을 줄 알고, 호텔 메모지를 버리고 왔는데, H는 그냥 듣고'만' 있었다. ㅋㅋ 그래서 그다음에 만났을 때 원래 정리본을 최대한 복기했다. 어쨌든, 나름 숙소에 들어가서도 최대한 효율적으로 시간을 보냈다 - 여행은 시간을 널널이 쓰려고 가는 것 같다만, 어째 나는 최대한 '뽕'을 뽑는 데 혈안이 돼 가는 듯하다.

 

1月 16日

1월 16일, 즉 일요일에는 적어도 오후 4시 반까지는 UCB 서쪽 정문 버스 정류장에 도착해야 했기 때문에 Union Square 근방의 다운타운으로 활동 범위를 한정했다. 게다가 계속 배낭을 메고 돌아다니기가 예상했던 바보다 훨씬 노동 집약적이었기에 동선도 '걸음을 가장 줄일 수 있게끔' 조정했다. 따라서 원래 가려고 했던 브런치 가게를 포기하고, Chancellor Hotel 바로 옆에 위치한 Sears Finer Food에 가서 아침을 먹기로 계획을 변경했다. 사실 Sears Finer Food도 충분히 유명한 가게이기는 하나, 15일 브런치로 이미 크레페를 먹었기 때문에 아보카도가 들어간 에그 베네딕트를 다시 먹고 싶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목적지 목록에서 제외했지만, 내 저질 체력을 고려해 그냥 가까운 곳에서 식사를 해결했다. 아침 8시 40분 즈음에 기상해서 9시까지 나갈 준비를 마치고 호텔 프론트에서 체크아웃하고, 9시 20분경 Sears Finer Food에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아마 내가 줄을 서지 않고 바로 앉을 수 있던 마지막 손님이었다. 내 뒤로 도착한 손님들은 다들 어느 정도 대기했다가 앉아야 했기에... Sears Finer Food에서는 미니 팬케이크와 오렌지 주스를 주문했는데, 맛은 그럭저럭 괜찮았다. 오렌지 주스가 진.심.으.로. 맛있었다. 글을 쓰는 지금 시점까지 내가 캘리포니아에서 마셨던 주스 중에 가장 상큼하고, 적당히 달고, 기분 좋은 맛이었다. 식사를 끝내고 Chinatown 중앙에 위치한 Grace Cathedral로 향했다. 밀라노의 두오모나 영국 성당 및 교회에 비해서는 그냥 평범한 외관과 내관의 건축물이었다. 어떻게 생겼는지는 검색하면서 진작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가고 싶었다. 알게 모르게 나는 성당 방문하기를 좋아한다. 비록 불가지론자지만, 성당 특유의 엄숙하면서도 따뜻한 분위기 속에 가만히 앉아 있으면 속세로부터 잠시 벗어나 치유받는 느낌이 든다. 그리고 가톨릭 신자들이 기다란 원목 의자에 앉아 기도하는 모습을 쳐다 보는 것도 재밌다. 성당 입구 바로 옆에 Grace Cathedral의 역사를 소개하는 자료가 전시돼 있어서 시간을 내서 읽어 봤다. 다섯 명인가 여섯 명의 신부들이 와서 성당을 설립했고, 그중 몇 명은 동부 등 타지역으로 옮겨 갔다고 한다. 어쨌든, Grace Cathedral은 Bay Area의 중국 이민자들의 역사에서 중요한 상징성을 지니는 듯했다. 설명문을 다 읽지도 않은 데다가 글을 쓰는 지금은 여행 시기로부터 한 달이나 지나서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아, 그리고 Grace Cathedral은 유럽 성당들처럼 '고요'하지는 않았다. 내가 방문했던 당시 내부에 있었던 대부분의 신도가 중국인 중년 여성이나 할머니였는데, 서로 건너 건너 아는 사이인지 수다를 떨고 계셨다. 그렇다고 기분이 나쁘거나 하지는 않았다. 애초에 나는 외지인이니까 기분 나빠할 이유도 없고, 오히려 현지 일상의 단편을 3인칭 관찰자처럼 구경할 수 있어서 영광이었다.

Sears Finer Food.
Chinatown Streetview.
Grace Cathedral.
Grace Cathedral 내부 1.
Grace Cathedral 내부 2.
Grace Cathedral 문.
Grace Cathedral 내부 3.
Grace Cathedral 내부 4.
Chinatown Dragon Gate 옆의 골동품 가게.

Grace Cathedral에 약 20분 가량 머물렀다가 Chinatown의 주요 대로를 쭉 따라 Dragon Gate까지 내려갔다. 아직 오전이라 그런지 대부분의 상점이 닫혀 있었다. 그래도 샌프란시스코 관련 기념품 가게는 영업 중이었는데, 안을 쓱 들여다 보니까 하나 같이 조악한 물건밖에 없어서 들어가지도 않았다. 그런데 Dragon Gate 양옆으로 엄청나게 화려한 골동품 상점이 있었는데, 거기는 한 번 둘러 보고 싶었다. 그런데 내 차림새가 누가 봐도 배낭 여행자인 데다가 수중에 돈이 넉넉해 보이지도 않아서 그냥 밖에서만 슬쩍슬쩍 쳐다 봤다. 들어가서 엄마, 아빠 기념품이나 골라 볼까 싶기도 했지만, 너무 비쌀 것 같아서 포기했다. Dragon Gate에서 또 발걸음을 옮겨서 샌프란시스코 현대미술관 - SF MoMA - 으로 향했다. 전날 밤 16일 일정을 짜다가 늦게서야 알게 됐지만, 현대미술관에 입장하려면 미리 티켓을 구매해야 했다. 오미크론 확산세로 인해 하루에 정해진 수의 방문객들만 수용하는 듯하다. 어차피 미술관도 오전 10시에 개장해서 조금 늦게 도착해도 사람이 바글바글하지는 않을 것 같아서 다운타운의 명품 패션 가게들의 쇼윈도도 마음껏 쳐다 보면서 내려갔다. 그런 상점들 사이를 걷다 보니까 나도 모르게 내 최애 브랜드인 폴 스미스가 생각나서 지도에 폴 스미스 매장을 검색해 그곳을 경유했다. 시간만 맞았다면 매장 안까지 들어가서 티셔츠 몇 장 정도 사 왔을 텐데, 재수 없게도 폴스미스 매장이 11시 반인가부터 영업해서 그냥 지나쳐야 했다. 그렇게 여유롭게 현대미술관에 도착했다. 외관부터 현대적으로 생긴 것으로 유명하던데, 어째서인지 나는 구글에 SF MoMA를 검색했을 때 가장 위에 나오는 '그' 벽을 보지 못했다. 뭐, 그래도 안에 전시된 컬렉션이 더 중요하니까 지체 없이 입장했다. 미술관을 돌아다니다가 뒤늦게서야 알았는데, 알고 보니 2층이 상설 전시실이었고, 3층은 미술관 소장 작품 중 특정 전시 테마에 적합한 것들을 모아 놓은 특별 전시실, 4층은 미국 추상파 작품 전시실, 5층은 기획 전시실이었다. 애초에 1층 짐 보관소에 짐과 외투를 맡길 때 지도도 한 장 달라고 할 걸 그랬다. 순서가 약간 꼬이기는 했지만, 봐야 할 것들, 그리고 보고 싶던 작품들은 꼼꼼하게 다 관람했으니 괜찮다. 나는 나보다 먼저 입장했던 커플을 그대로 따라갔을 뿐인데 졸지에 3층부터 구경하고, 그 후에 2층으로 내려 왔다가 1층 디에고 리베라 벽화를 보고, 그다음에 4층, 5층 순으로 이동했다. 뭐, 이상한 루트로 관람한 덕분에 사람들이랑 부대끼지 않아도 돼서 오히려 다행이었다고 여기자.

SF MoMA 1.
SF MoMA 2.

SF MoMA는 작년부터 이글거리던 내 안의 현대 미술에 대한 열정을 그야말로 폭발시켰다. 나이를 먹으면서 가장 좋아하는 화가도, 화풍도 바뀌었다. 예를 들어, 한창 꿈이 일러스트레이터였던 초등학생 시절에는 모네를 필두로 인상파 작품을 제일 좋아했다. 그다음에 중학생 때는 마티스와 줄리안 오피의 작품에 매료되더니, 고등학생 때는 고갱의 "우리는 어디서 왔고, 우리는 무엇이며,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를 내게 가장 인상 깊었던 작품으로 꼽았다. 대학교에 입학한 직후에는 2020년 예술의 전당에서 큰맘 먹고 기획한 인상파 전시회에 다녀오더니 다시금 인상파 작품의 따사로움에 마음을 빼앗겼다. 내 본가 방에는 아직도 도비니의 "꽃이 핀 사과나무" 포스터가 걸려 있다. 그리고 그 전시회에서 특히 코로의 작품에 가장 많은 시간을 할애했던 것 같다. 코로와 도비니는 인상파 작가로 분류되기에 약간 어울리지 않는 감이 있다. 피사로보다 앞선 시대 사람들이고, 화풍도 인상파의 '빛이 굴절되고 왜곡되는 순간을 포착하려는' 기술이 명시적으로 사용되지 않았다. 어쨌든, 도비니랑 코로를 좋아하다가 또 작년 여름부터는 런던의 사치 갤러리에 미친 듯이 가고 싶어졌다. 그래서 이번 교환학생 프로그램이 종료되면 파리로 건너가기 전에 런던에 사흘 정도 머무를 예정이었는데, 코로나의 여파로 일정이 어떻게 될지 몰라 런던행은 포기해 버렸다. ㅠㅠ 그래서 현대 미술에 대해 갈증을 느끼고 있던 찰나에 SF MoMA에 가게 됐다. 첫 샌프란시스코 여행 당시에는 미술관에서 여유롭게 작품을 감상할 만큼 정신적으로도, 물리적으로도 준비되지 않아서 현대 미술관은 다음에 가기로 결심했는데, 글쎄 그 미술관 다녀온 경험이 샌프란시스코에서 내가 한 일 중 가장 잘한 일이 될 줄 몰랐다. ㅋㅋ SF MoMA의 입장권은 학생 할인을 받아서 $19에 구매했는데, 할인가가 한화로 2만 원을 넘기는 것을 보면 상당히 비싼 편에 속한다. 그래도 미술을 사랑하는 사람들, 혹은 미술관 특유의 분위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반드시 방문하기를 강력히 추천한다. 계획상으로는 2시간 정도만 머물고, 1시 즈음에 Yerba Buena Center 주변에서 점심을 먹고 Westfield에서 티셔츠와 바지를 '여유 있게' 쇼핑하려고 하는데 본의 아니게 미술관에만 3시간 반 동안 머물러서 일정이 촉박해졌다... 그래도 나는 쇼핑할 시간을 관람 행위에 끌어다 쓴 나의 선택을 절대 후회하지 않는다. 그곳에서 보낸 시간이 너무 황홀해서 아직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

SF MoMA 3.
SF MoMA 4 - Frida Kahlo. "Frieda and Diego Rivera." 1931. / Diego Rivera. "The Flower Carrier." 1935.

나 같은 일반인에게 잘 알려진 현대 미술 작가라고 한다면 앤디 워홀, 마크 로쓰코, 리히텐슈타인, 데미안 허스트, 조지아 오키프, 그리고 조금 더 시대를 확장해서 프리다 칼로, 디에고 리베라, 페르난도 보테로, 키스 해링 등이 거론된다. 이 중에서 보테로, 해링, 허스트의 작품은 보지 못했고, 나머지 작가들의 작품은 한 두 가지 걸려 있었다. 프리다 칼로와 디에고 리베라의 경우, 파란만장한 결혼 생활을 보냈으면서 미술관에는 두 작가의 회화가 나란히 전시돼 있어서 씁쓸했다. 2층 상설 전시관은 연대기순으로 작품이 나열돼 있어서 아마 프리다 칼로와 디에고 리베라가 동시대에 활동했기에 그렇게 배치했겠지만, 한편으로는 의도된 것이 아닐까 싶다. 워낙 유명한 부부니까. 그런데 애석하게도 두 작가의 작품은 내게 그다지 인상 깊지 않았다. 둘러 본 순서대로 SF MoMA에 대해 적겠다 - 그리고 미국에서 접한 작품들이니까 작가명도 영어로 표기하겠다. 먼저 3층 야외 테라스로 가서 조형물과 담쟁이 넝쿨로 뒤덮인 벽을 지나 Alexander Calder의 작품들이 전시된 방으로 이동했다. 아마 대학교 1학년 2학기에 수강했던 <예술의 가치와 비평>에서 교수님께서 Calder의 작품 몇 개를 보여 주시면서 어떤 개념을 설명해 주셨던 것 같은데, 기억이 희미하다. 어렸을 때는 모든 예술 장르 중에서 조각이나 조소가 제일 재미 없었는데, 이제는 나이를 먹어서 그런지 조형물 관람에도 나름 재미를 붙였다. 조형물은 특히나 2차원인 회화나 사진과 달리 3차원이라서 각도에 따라 조명, 색감, 모양이 다 달라져서 관객으로 하여금 다양한 해석을 떠올릴 수 있게 함과 동시에 개인적인 내러티브와 접목돼 어떠한 사적 경험으로 승화되는 듯하다. Calder의 모빌도 비슷하게 기능했다. 확실히 조형물은 규모가 있어야 눈길도 가고, 기억에도 잘 남는 듯하다. 왜냐하면 유리 상자 안에 들어갈만큼 작은 작품에 관해서는 어떠한 인상도 남아 있지 않은데, 전시실의 절반 가량을 차지했던 빨강-노랑-파랑 대형 모빌과 검은색 모빌은 뇌리에 선명하게 박혀 있기 때문이다. 모빌의 날개들이 다 고정돼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끈 같은 것으로 묶여 있어서 관객들이 전시실을 이동함에 따라 방 안의 공기가 날개와 모빌 몸체의 위치를 조금씩 변형시킨다. 말 그대로 공간 예술의 모범이라 할 수 있다. Calder의 작품에 감동받고 나서부터 이 미술관에 오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Calder 전시실에서 왼쪽으로 나가면 미국과 멕시코의 국경에 시소를 설치해 두 나라의 아이들이 자유롭게 함께 놀 수 있도록 한 작가들과 그들의 다른 프로젝트가 소개돼 있다. 설치 미술 자체가 실제로 국경 지역에 있기 때문에 - 그것을 미술관에 가져오는 순간 작품의 의미도 함께 퇴색되는 경우다 - 프로젝트의 도안과 작가 인터뷰 영상 등이 벽에 걸려 있었다. 3층의 다른 공간에서는 사진전이 열렸다. 사진전이라 해 봐야 SF MoMA가 소장한 사진들 중에 가장 인상깊고, 호응이 컸던 작품들을 선별해 걸어 놓은 것에 불과하지만, 회화를 보러 갔는데 사진도 같이 볼 수 있어서 내게는 일석이조였다. 사실 나는 사진전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중-고등-대학교 동창인 KJH와 WJO와 함께 관람한 전시회는 전부 사진전이다 - 퓰리처, LIFE, 로버트 메이플소프. 그래서 SF MoMA의 사진 컬렉션도 별다른 감흥은 없었지만, 이민자의 나라인 미국, 그리고 이민자가 발전시킨 주인 캘리포니아의 미술관답게 흑인, 아시아 - 주로 중국계 - 이민자, 인종 차별과 관련된 사진이 절대적으로 많았다. 그 외에 의외로 일본 사진 작가들의 작품이 많았는데, 알고 보니 90년대인가에 SF MoMA 사진 큐레이터가 일본 작품 수집하기에 맛 들려서 대량 구매했다고. 3층을 빙 돌고 난 뒤 2층으로 가는 (숨겨진) 계단이 있길래 거기로 내려가 2층의 상설 전시관으로 이동했다.

SF MoMA 5 - Sarah Cain. "Hello Darkness My Old Friend." 2006.

2층 상설 전시관이 연대기순으로 구성돼 있다고 적었는데, 내가 내려간 지점은 그 전시관의 끝자락, 즉 2000년대 작품이 전시된 방이어서 의도치 않게 나는 21세기 초에서 20세기 초 작품으로 역순행했다. 우연히도 계단을 내려가자마자 딱 보였던 작품이 SF MoMA에서 가장 인상 깊은 회화로 자리매김했다. Sarah Cain이라는 젊은 미국 여성 화가의 "Hello Darkness My Old Friend"라는 작품인데, 누가 봐도 현대 회화처럼 생겼다. 제목을 알기 전에도 묘하게 끌렸는데 제목을 읽고 나서 작가의 의도나 작품의 구성을 더 조밀하게 분석할 수 있었다. 커다란 타원형 테두리가 일종의 자아를 상징한다면 - 알과 자아의 유비 관계에는 유구한 전통이 깃들어 있다 - 마치 시곗바늘이 빠르게 움직이는 모습을 표현한 듯한 날개들이 타원의 가운뎃점을 중심으로 펼쳐져 있다. 그리고 그 날개들은 각기 다른 색깔을 띠고 있으며, 어떤 것은 다양한 색깔로 칠해져 있다. 맨 가운데에는 북쪽과 남쪽에서 올라오는 흰색, 빨간색 삼각형 모양이 서로의 꼭짓점을 맞대고 있고, 여러 가지 물감을 섞어서 만들어진 듯한 검은색 물감이 가운데 동그라미의 테두리를 칠하고 있다. 바로 그 검은색 중앙이 작가의 오랜 친구이자 나의 오랜 친구이기도 한 '내 안의 어둠'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알 모형 밖으로 뉴런처럼 생긴 물감들이 흩뿌려졌다. 작품 왼쪽에는 다채로운 색깔의 얇은 선이, 그리고 오른쪽에는 대체로 어두운 색조의 동그라미와 선이 그려져 있다. 어느 방향으로 물감이 흘러가는지는 모르겠지만, 양가적인 해석이 가능하다. 현실 세계에서 접한 다양한 경험들이 왼편에서 오른쪽으로 들어와 결국에는 어두운 물망울이 되거나, 아니면 내 안의 짙은 어둠으로부터 다양한 색깔이 발현되거나. 두 가지 모두 충분히 가치 있는 해석이자 예술적 경험의 산물이라고, 멋대로 치부해 버렸다. 하지만 현대 미술 작품을 보면서 이렇게 깊게 분석까지 하게 된 경우는 처음이었다. 게다가 SF MoMA 상설관에는 각 전시실 입구 근처 벽에 테마에 대한 설명만 적혀 있을 뿐 작품 옆에는 어떠한 해석도 제공되지 않아 작품의 감상은 온전히 관객의 몫으로 돌아간다. 예전에는 어딜 가나 도슨트를 꼭 들었는데, 예술의 형식과 의미를 스스로 사유하는 행위가 이렇게나 값지구나, 절감했다. 어쩌면 내가 지금 현대 미술을 좋아하게 된 것은 자아를 본격적으로 마주하고 탐구해야 하는 시기에 도달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SF MoMA 6 - Andy Warhol. "Self-Portrait." 1967.
SF MoMA 7 - Mark Rothko. "No. 14." 1960.

다른 2000년대 작품도 자아 탐구 및 표현이라는 유사한 맥락으로 묶을 수 있는 듯하다. 전시관 내부로 더 파고들수록 더 유명하고 친숙한 작가들의 작품이 등장했다. Andy Warhol의 자화상도 있었고, 모네의 "생 루앙 대성당" 연작을 패러디한 Richtenstein의 점묘 프린트도 인상적이었다. 여담인데, SF MoMA에서는 Richtenstein을 상당히 찬 밥 취급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발칙하게 상상해 봤다. 왜냐하면 4층으로 올라가면 나오는 미국 추상파 전시관의 외벽에 Richtenstein 작품 두 개를 아무렇게나 배치해 뒀기 때문이다. ㅋㅋ 사실 나도 개인적으로 Warhol이나 Richtenstein을 그렇게 좋아하지도 않고, 그들의 작품이 그렇게 높은 가치를 지녔는지 의문이다. <예술의 가치와 비평>에서도 Warhol의 캠벨 통조림 작품에 대해서 다뤘는데, 내 뇌는 어쩜 그렇게 모든 것을 다 까먹는지... 2층 상설 전시관의 중간쯤에 다다랐을 때 예상치 못하게 Mark Rothoko의 작품을 만났다. 마찬가지로 수업 시간에 Rothko의 작품 앞에서는 이유도 없이 많은 사람들이 격정적인 감정에 휩싸인다고 배웠다. 그 이야기를 들을 때 디지털 화면으로만 Rothko의 작품을 보고 있었으므로 나는 '말도 안 되는 헛소리'라고 치부했다. 하지만 직접 Rothko의 No. 14를 보니까 나도 모르게 감동받고 있었다. 사진이나 영상은 Rothko의 작품에서 뿜어져 나오는 카리스마를 절반도 담지 못한다. 직접 보기 전까지는 그의 작품이 지니는 중압감을 이해할 수 없다. 마치 내가 그랬던 것처럼. 2층 전시관의 입구 쪽으로 갔더니 앙리 마티스의 작품이 대거 전시돼 있었다. 벽에는 SF MoMA 설립 초기에 프랑스로부터 대서양을 막 건너온 마티스의 뜨끈뜨끈한 신작을 관람하기 위해서 북새통을 이뤘다는 이야기가 적혀 있었다. 당시에는 가장 인기 있는 작품이었겠지만 - 마티스의 명성을 생각하면 당연하다. 게다가 미국인들은 유럽 문화라고 하면 정신을 못 차리지 않은가 - 지금은 Rothko나 Georgia O'Keefe에 밀리는 듯하다. 아, O'Keefe 하니까 떠올랐는데, 애석하게도 나는 SF MoMA에서 그녀의 작품을 단 한 점도 보지 못했다. ㅠㅠ 인터넷에 검색하면 몇 점 있는 듯하던데, 왜 내가 갔을 때는 안 보였는지. 하긴, 알고 보면 내가 모든 구석을 다 살펴 보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래도 O'Keefe의 작품은 지금 내 방 벽에 걸린 달력을 통해서 매일 감상하고 있으니 됐다. 아, 몬드리안 작품도 한 점 걸려 있었는데, 그냥 그랬다.

SF MoMA 8.
SF MoMA 9.
SF MoMA 10 -&nbsp;Jay DeFeo. "Incision." 1958~60.
SF MoMA 11. Whanki Kim. "26-I-70." 1970.

2층 상설 전시를 다 관람하고 1층에 잠시 내려가 디에고 리베라의 커다란 벽화를 '슬쩍' 올려다 봤다. 주의 깊게 보지는 않았다. 그래서 어떤 메시지가 있는지 - 그런데 사실 딱 봐도 그냥 라틴 아메리카의 역사이거나 히스패닉 이민자들에 대한 작품이다 - 잘 모른다. 애초에 리베라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그리고 왠지 모르게 미국 역사는 참 지루하다. 서둘러 4층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4층에는 미국 추상파 작가들의 회화가 전시됐다. 그런데 '회화'라고 통일해서 말하기에는 Ellsworth Kelly 같은 사람들의 작품이 상당히 조형물처럼 느껴져서 적절한지는 모르겠다. 솔직히 그때쯤 되니까 다리가 아파서 한 작품을 지긋이 바라보지는 못했고, 눈길이 가는 작품들에 상당한 시간을 할애했던 것 같다. 일단 추상파 작품들은 대체로 무지막지하게 커다란 캔버스에 그려졌다. 전시관 입구 바로 맞은편에 걸려 있는 작품은 벽 하나를 다 차지하고 있었다. 규모에 압도되기도 했지만, 물감도 참 여러 가지 색, 그리고 상당히 진하고 강렬한 색조의 것이 사용됐다. 예외적으로 Richard Mayhew라는 흑인 작가의 작품은 약간 블러 처리된 사진처럼 희끄무레했다. 그래도 색깔이 다 강렬해서 여러 작품들 중에서도 독보적으로 '튀었지만' 그 테두리를 인상파 화풍마냥 흐리게 그려서 물체와 물체 사이의 선을 분간하기 어려웠달까나. 추상파를 넘어서 거의 초현실주의라 화가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로 Mayhew는 현실 세계의 물체와 180도 동떨어진 색깔로 나무나 언덕을 칠했다. 신기했지만, 별로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4층에서 수확한 보물은 아무래도 Jay DeFeo와 김환기려나. Jay DeFeo의 경우에는 전체적인 메시지나 테마에 감동했다기보다는 작가의 테크닉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물감을 얼마나 많이 쏟아 부었는지 가늠도 되지 않았고, 또 2차원 캔버스 위에 물감을 계속해서 덧칠함으로써 일종의 3차원적인 질감을 표현해 낸 창의력에 감탄했다. 얼핏 보면 그냥 마음대로 흩뿌린 것 같지만, 현대 미술 작품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모든 선과 위치가 다 치밀하게 의도됐음을 금방 눈치챌 수 있다. 나는 SF MoMA의 컬렉션 중 그 중요한 사실을 가장 뚜렷이 나타내고 있는 작품이 바로 김환기의 "26-I-70"라고 생각한다. 멀리서 보면 그냥 파란 배경에 똑같은 동그라미를 수백 개 그린 것 같지만, 가까이서 보면 그 형상은 동그라미로부터 멀찍이 떨어져 있음은 물론, 네모난 흰 사각형 안에 남색 물감이 일일이 찍혀 있는 모습이 선명하게 보인다. 김환기 화백이 어떤 의도로, 어떤 마음으로 그런 물방울 무늬를 그렸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적어도 관객에게 그 추상적인 미로써 독특한 예술적 경험을 전달한다면 그것만으로 그림의 가치는 충분하다. 4층에는 잭슨 폴락도 있었지만, 그의 그림은 뉴욕 MoMA에 걸려 있는 대표작에 비해 보잘 것 없었고, 4층의 가장 큰 전시실은 Ellsworth Kelly에게 할애됐다. Ellsworth Kelly... 는 뭐랄까, 그냥 고급진 미피 회화 같았달까나. 그의 작품들은 대체로 추상적인 '형태'를 띠며 밝은 계열의 원색 하나로 칠해져 있었는데, 왠지 모르게 미피 그림과 비슷하게 느껴졌다. 4층 미국 추상파 전시관의 맨 끝자락에는 Agnes Martin에게 할애된 원형 전시실이 자리했는데, 거기까지 들어오는 관람객도 없어서 정말 고.요.했다. 원형 전시실 바로 앞에는 유리 천장이 보였는데, 빛이 적절하게 들어오면서 기분 좋은 'ambience'가 만들어졌다. 마침 전시실 가운데에 원목 의자도 있어서 한동안 거기서 다리를 쉬게 했다.

SF MoMA 12 - Ellsworth Kelly Gallery.
SF MoMA 13 - Agnes Martin Gallery.
SF MoMA 14.
SF MoMA 15 - Joan Mitchell. "Salut Tom." 1979.
SF MoMA 16 - Joan Mitchell. "La Vie en Rose." 1979.
Joan Mitchell Exhibition - 그녀도 그랑다슈 제품을 썼다니! 내가 한창 화가 꿈을 꿀 때 쓰던 색연필인데...

어느 정도 기력이 회복되자 마지막으로 5층으로 올라가 Joan Mitcehll 기획 전시를 관람했다. 마침 1월 17일까지만 전시회를 한다길래 도저히 안 보고 지나칠 수 없었다. 샌프란시스코 현지인들도 나랑 비슷하게 생각했는지 그날따라 그 전시회에만 사람들이 북적였다. Joan Mitchell, 처음 들어보는 작가지만 상당히 매력적이었다. 추상화 작가답게 캔버스를 여러 개 붙여서 하나의 작품을 완성한 경우가 꽤 있었는데, 개인적으로 "La Vie en Rose"가 가장 좋았다. 마침 내가 그날 입고 있던 보라색 와이셔츠와 검은색 버커루 진과도 색 조합이 딱 맞아 떨어져서 만약 누군가가 동행했다면 그 작품 앞에서만큼은 사진을 찍어 달라고 부탁하고 싶었을 정도다. Mitchell의 작품은 전부 그의 개인사와 밀접하게 연관돼 있는데 - 사실 대부분의 예술 작품이 그렇다만 - 주로 사랑, 우정, 문학 - 특히 시 - 그리고 사랑하는 이를 잃은 슬픔을 다룬다. "La Vie en Rose"처럼 캔버스 배경이 전부 어떤 색으로 칠해져 있는 경우는 드물고, 대체로 배경은 여백 상태 그대로 남아 있다. 다만, 그림 자체가 공간을 많이 차지해서 '여백의 미'를 느낄 정도는 아니다. ㅋㅋ 이 전시회에서 뭘 열심히 읽고 보기는 했는데, 다리가 너무 아파서 그랬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어쨌든 SF MoMA에서 새로운 작가를 알게 돼서 영광이었다. 전시회를 다 보고 나서 대망의 기념품 가게에 가서 신나게 쇼핑했다. 챙겨야 할 가족들과 친구들이 너무 많아서 이것저것 고르고 하다가 - 게다가 SF MoMA가 미술관 아니랄까봐 확실히 굿즈를 너무 잘 만들었다 - 결국 20만 원어치나 구매해 버렸다. 비싸기는 하지만 내가 그때 뭘 많이 사기도 했고 - 정작 내 기념품은 도록과 엽서가 전부다 - 물건의 질이 다 좋아서 후회하지는 않는다.

이 날... 미술관 입장료까지 포함하면 거의 하루에 35만 원 쓴 꼴이네...
Yerba Buena Center for the Arts 1.
Yerba Buena Center for the Arts 2 - Martin Luther King Memorial.
Lemonade - 부담스러운 비둘기. 정말 이렇게 도망가지도 않고 계속 정면으로 째려 보고 있었다.
Yerba Buena Center for the Arts 3.

기념품 가게에서 나와서 정말 무거운 짐을 든 채로 SF MoMA 코앞에 위치한 Yerba Buena Center for the Arts에서 점심을 사 먹었다. 공원 한가운데에 있는 자그마한 연극 무대 같이 생긴 곳의 돌턱에 앉아서 뭘 먹을지 고민했다. 마침 날씨도 화창하고, 바람도 선선하게 불어 와서 배가 고프지만 않다면 그대로 계속 앉아서 쉬고 싶었다. 내가 앉은 곳 건너편으로는 Martin Luther King Memorial 인공 폭포가 보였다. 사실 이때 내가 샌프란시스코를 여행할 수 있었던 것도 1월 17일이 Martin Luther King Day라는 국경일이었기 때문인데, 그래서 시기상 나름 뜻깊다고 생각해서 사진도 몇 장 찍어 뒀다. 그런데 관광용으로 꼭 가 볼만한 명소는 아닌 듯하다. 결국 Yerba Buena 공원에서 가까이에 있는 Lemonade라는 가게에 가서 classic lemonade 한 잔과 turkey sandwich 하나를 주문했다. 가게의 테라스석에서 먹으려고 했는데 비둘기들이 자꾸 내 샌드위치를 노리고 접근해서 공원 한가운데 잔디밭으로 피신했다. 하... 비둘기는 제발 하루 빨리 멸종됐으면 좋겠다. 점심을 먹고 있는 도중에 2m 정도 옆에 여성 노숙자가 돗자리를 펴고 자리를 잡아서 약간 당황했다. 속으로는 별의별 시나리오를 떠올리고 있었지만, 겉으로는 애써 태연한 척했다. 아예 노숙자 쪽으로 눈길을 돌리지도 않았다.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 연기했다. 서둘러 점심을 해치우고 Westfield 안에 입점한 J.Crew 매장에 들렀다. 옷가지를 보니까 또 여러 가지 사고 싶었는데, 피팅룸에 가서 몇 벌 입어 보기도 하고 합리적인 시뮬레이션 끝에 베이지색 긴 바지 한 장만 사 왔다. 세금까지 붙으니까 바지 한 장에 거의 10만 원 돈이나 해서 '미국 옷이 한국보다 과연 저렴한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지금 잘 입고 있으니까 됐다. 우연의 일치로, 내가 그 베이지색 바지를 산 다음 날 한국에서 가져온 나의 최애 베이지색 바지의 속단추가 쪼개져서 정말 잘 샀다고 되새겼다.

버블티 마시기, 하루를 마감하면 좋은 방법.

원래는 늦어도 오후 4시 반에는 버클리에 도착해서 5시 셔틀을 타려고 했는데, 미술관에 너무 오래 있었고, 또 쇼핑을 하다 보니까 시간 가는 줄 몰라서 결국 오후 4시가 조금 넘어서 BART에 탑승했다. 그러다가 Berkbus 셔틀을 놓치는 것은 아닌가 조마조마하고 있었는데, 어찌어찌 잘 도착해서 - 전날 BART를 잘못 탄 경험이 거름이 됐달까나 - 무사히 데이비스에 도착했다. 데이비스에 도착하니 벌써 밤이었는데, 당시에는 자전거도 없어서 학교 캠퍼스에서 아파트까지 무거운 짐을 들고 30분이나 걸어갔다... 아, 그리고 그날 저녁 대신으로 iTea에서 버블티 하나랑 타코야키를 사 먹었는데, 타코야키가 정말 맛있었다. 그리고 집에 와서는 바로 짐을 정리하고, 샤워를 한 다음에 12시까지 제출해야 하는 과제가 있어서 부랴부랴 과제를 끝내고 남은 버블티를 홀짝홀짝 마시고 잠들었다. 그렇게 나의 두 번째 샌프란시스코 여행은 막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