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CD 교환학생 일지 - 06. 두 번째 단상 - 생활의 발견.
도미한 지 벌써 두 달 하고 조금이 지났다. 한국에서 교환 프로그램을 준비할 적에는 6개월이라는 기간이 길게만 다가왔다. 여기 와서 미국에 체류 중인 친지들한테 이런저런 안부 인사를 돌리니까 다들 "너무 짧게 머물다 가서 아쉽구나"라고 말씀하셔서 의아했는데, 이제야 여섯 달이라는 시간이 길면서도 짧을 수 있음을 실감한다. 2주 뒤면 UCD에서의 첫 학기가 끝나는데 - 시험까지 모두 - 3월 말부터 시작되는 봄 학기는 언제 끝나나 싶으면서도 돌이켜 보면 겨울 학기가 쏜살같이 지나가서 걱정 반, 아무 생각 없음 반이다. 차마 기대된다고 말할 수는 없겠다. 모처럼의 휴식을 즐기러 왔는데, 한국인 특성인지 아니면 나의 내성인지 어느샌가 학업에도 반쯤은 진심이 돼 버렸다. 그래 봐야 매주 쏟아지는 과제를 제출하고, 시험 직전에 공부하기밖에 안 하고 있기는 하다만. ㅋㅋ 내가 경험한 미국 학교는 UCD뿐이니 미국 대학 전체에 대해 일반화하기는 어렵겠지만, 서울대와 비교해서 너-무 널널하다. 우리 학교는... 시험도 어렵고... 과제도 어렵고... 그렇다고 성적에 반영되는 평가 항목이 UCD와 비교해서 적은 것도 아니고... 사람들도 지.나.치.게. 성실하고 똑똑해서 - 학부 공부는 그래도 성실함이 두뇌의 천재성보다 더 중요한 듯하다. 그런데 나는 그렇게 근면한 대학생은 아니었다. - 아무런 교외 활동을 하지 않더라도 좋은 성적 받기 힘들었는데, 여기 와서 그런 수업 외적인 스트레스로부터 벗어나 수업 내용 자체에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지게 돼 행복하다. 특히 통계학 전공 수업의 경우 - 물론 모교에서 내가 수강했던 전공과목들은 죄다 통계를 위장한 수학이었지만 - 교수님께서 가장 기본적인 단계부터 차근차근 설명해 주셔서 수업에 집중하기만 하면 머리에 쏙쏙 박힌달까나. 50분 수업의 초두에 10분씩이나 지난 수업을 복습하는 데 할애한다는 점과 가끔 영양가라고는 눈 씻고도 찾을 수 없는 질문들이 교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중에 쏟아진다는 점만 제외하면 그럭저럭 만족스럽다.
데이비스에서의 일상에 대해 마지막으로 썼던 것이 벌써 1월 30일의 일이니 시간을 한참 거슬러 올라가고 있다. 어디서 언제 누구와 무얼 왜 어떻게 했는지를 꼬치꼬치 기억해 내기란 여간 쉽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내가 프루스트처럼 비상한 기억력을 가지고 있다면 모를까, 불행히도 나는 고등학교 3년은 물론이요, 당장 작년의 일도 구체적으로 떠오르지 않는다. 아마 너무 치열하게 살았기에 작은 용량의 내 뇌가 과부하에 걸린 나머지 기억을 삭제했나 보다. 마치 우리가 새로운 사진을 잔뜩 찍기 위해 기존의 카메라 메모리를 지우듯이 말이다.
위 두 문단은 겨울학기 말미에 썼는데, 지금 이 문장부터는 졸지에 겨울 학기가 완전히 끝나고 나서 쓰게 됐다. 하여간 습관처럼 글 쓰는 일이란 상당한 의지를 요구한다. 현재 강원도 어딘가에서 - 분명 정확한 부대명을 알려 줬는데, 내가 까먹었다. 나란 인간이란 어쩜 내 일이 아니면 금세 잊어 버리는 하찮은 기억력과 이기적인 성격을 가졌을까. - 열심히 군 생활에 임하고 있는 내 친구 한 명은 거의 매일 같이 SNS에 짧은 길이의 글을 게재한다. 비록 그만큼은 아니더라도 나도 글쓰기에 있어 어느 정도의 성실함을 보여야 할 듯싶기는 하지만, 그동안 나도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지냈다 (변명). 일단 President's Day라는 미국 국경일을 끼고 2월 중순에 포틀랜드에 다녀오고, 그다음 주인 2월 마지막 주말에는 1박 2일 요세미티 투어를 떠났다가 어느새 겨울 학기의 마지막 강의 주간을 맞이해 과제 폭탄을 맞고, 이번 주에 기말고사를 치렀다. 그리고 그 사이에 6월 중순부터 9월까지 현재 내가 거주하는 아파트 방을 양도받을 사람을 '공격적으로' 모집하고, 겨우겨우 한 명으로부터 긍정적인 회답을 받아서 이틀 전에는 직접 집까지 구경시켜 줬다. 그런데 내 하우스메이트나 이전에 살던 사람이나 청소 한 번 하지 않고 살았는지 집 상태가 엉망 - 살기에는 나쁘지 않지만, 집을 사고 싶다는 사람에게 당당하게 보여주기에 민망한 - 이라서 마지막 기말고사가 끝나자마자 장정 3시간 동안 대청소도 실시하고... 물론 혼자 했다. ^^ 하우스메이트는 월요일에 대면으로 치르는 마지막 기말고사가 끝나자마자 본가로 튀었다. 이번 학기가 너무 지루하다가 평소에도 하소연하고는 했는데, 이만저만 꽤 스트레스 받았나 보다 - 그런데 옆방에서 지내는 내가 본의 아니게 엿들은 생활의 소음에 의하면 딱히 열심히 공부하지도 않는 듯하던데. 게다가 아빠 부탁으로 맡게 된 300쪽짜리 영문 소설 번역도 완전히 밀려서 지난주부터 간간이 작업 중이다. 여기에 최근 모래밭에서 바늘 찾기의 희박한 확률로 넷플릭스에서 마음에 쏙 드는 TV 시리즈를 발견해서 쉴 때마다 해당 드라마를 꼬박꼬박 시청하다 보니 도저히 글 쓸 짬이 없었다. 자, 그런데 앞에 상술했듯 그동안 여행도 두 번이나 다녀왔으니 기행문도 두 편 써야 하는데, 지금 이 글을 봄방학 여행 가는 기차 안에서 작성하고 있다. ㅋㅋㅋ 모든 일이 지연되고 있지만, 최대한 마음 내키는 순서대로 해치우려 한다. 작년에 원하지 않은 일도 꾸역꾸역 하다 보니 마음에 커다란 멍이 생겼기 때문에... 올해는 적어도 입대하기 전까지만이라도 스스로를 존중하고 배려하고 우선시하고 싶다. 나를 가장 사랑하는 사람은 엄마도, 아빠도, 동생도, 등등도 아닌 나 자신이어야 하기에.
참으로 완연한 TMI가 아닐 수 없다만, 나는 집과 기차역 사이를 오갈 때마다 항상 박정현 노래를 듣는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냥 박정현 음악을 듣고 싶을 때와 집과 기차역 사이를 걸을 때가 매번 겹친다. 오늘 새벽에는 정규 4집인 <Op.4>를 들었다. 정석원 짱~
오랜만에 혼자 집에 앉아 슬픈 노랠 들을 때마다 모두 내 얘기 같고
평소엔 있는지도 몰랐던 책장 속의 얇은 시집들 왜 그리 와닿는지
1. UCD 대면 수업 및 캠퍼스에 관해
2. UCD 학생증 발급
3. SISS 행사
4. 첫 번째 생활의 발견 - 귀여운 불청객
5. 음력설 모임
6. 두 번째 생활의 발견 - 스트레스 해소법
7. 성 발렌타인이 맺어준 인연 ~ Farmer's Market
8. 외국에서 첫 이발
9. 세 번째 생활의 발견 - 셀카봉과 전기 쿠커
10. Konditorei 폐점
11. 나는 볼링에 소질이 없다.
12. Vacaville Premium Outlet
13. 조슈아 벨, 그리고 작별 연습
14. 네 번째 생활의 발견 - 겨울 학기 마무리
2月의 일상.
1. UCD 대면 수업 및 캠퍼스에 관해
역시 데이비스와 UCD 하면 자전거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며칠 전 대학 동기가 유튜버 <겨울서점>이 라이브 방송에서 자신의 캘리포니아 교환학생 후기를 말하다가 손에 들고 있던 교환교 바인더에 UCD 로고가 찍혀 있어서 내 생각이 났다며 영상 리크를 보내 줬는데, 해당 영상을 보니까 아니나 다를까 자전거를 타며 유유자적 학교 생활을 했다고. 그런데 나는 '유유자적'이나 '잔잔'까지는 아니고, 한국에서의 대학 생활에 비해 상대적으로 안정되고 자유로웠던 것 같다. 잔잔하다고 표현하기에는 매일 아침 대면 수업에 늦을까봐 죽어라 자전거 페달을 굴리던 내 허벅지에게 너무 미안하다. 학기 말쯤에 다다라서는 교수님에 따라 전면 비대면으로 돌아간 수업도 있었고, 하이브리드로 진행됐던 수업도 있었고, 여전히 대면 방침을 유지했던 수업도 있었다. 그런데 2월 초중순 즈음에는 전교가 대면 시스템에 적응하는 중이었기 때문에 내 경우 아침 8시 심리학 전공 강좌를 제외하고는 전부 대면 출석을 요구했다. 지금 돌이켜 볼 때나 당시에나 대면 수업이 집중하기에는 훨씬 나았지만, 학교 가기 귀찮아서 몸 둘 바를 모르던 때도 있었다. 더군다나 한국에서는 오전 11시 기말 시험도 늦잠 자느라 10분 지각했던 나이기에 - 물론 지난 학기의 내 몸은 고등학교 3학년 시절과는 다른 의미로 상당히 망가져 있었음을 고려해야 한다 - 매일 아침 9시까지 등교하려 '발버둥'쳤다. ㅋㅋ 한 번은 9시 20분에 일어나는 바람에 미술사 교양 강좌의 대면 Discussion을 아예 결석했던 나름의 흑역사도 있지만. ;;
집에서 캠퍼스까지는 자전거로 대략 12분 정도 걸린다. 막상 집을 나오면 금방 학교에 도착하지만, 가는 길이 마냥 쉽지만은 않다. 데이비스라는 도시 자체가 완전히 평지이기에 이렇다 할 오르막길이나 내리막길로 고생하지도 않았고, 교통 체증이 심한 적도 없었지만, 자전거로 통학하는 학생에게 단 한 가지 치명적인 문제점은 바람이 미친듯이 불어 댄다는 것이다. 정말 바람이 사람 한 명 쓰러트리겠다고 작정한 듯 분다. 흔히 캘리포니아라고 하면 머리 꼭대기에서 내리쬐는 강렬한 햇빛, 이국적인 야자수와 길가의 꽃들, 기름이라도 바른 듯 번들번들하게 빛나는 두꺼운 잎의 수풀을 떠올리지 않은가. 그런데 내가 경험한 2월과 가장 최근인 3월의 데이비스는 무서운 일교차, 매서운 바람, 그리고 따뜻한 햇빛이 공존했다. 그래서 아침에 길을 나설 때마다 내가 가야 하는 방향과 반대로 불어오는 바람에 맞서 열심히 페달을 밟았더니 2월 말쯤에는 허벅지도 약간 굵어졌다. 어느 날 평소처럼 아파트 짐에서 운동하다가 거울에 비친 내 허벅지의 상태를 보고 깜짝 놀랐다. 그 충격으로 스쿼트를 한 세트씩 줄여 나갔다는 웃픈 사연도 있다. 여하튼 바람은 왜 항상 내가 자전거를 타고 가는 방향과 반대로 불어 대는지 도무지 모르겠다. 나도 한 번쯤은 바람에 몸을 맡긴 채 앞으로 나아가려고 힘들게 노력하지 않고 싶다. 아, 그리고 자전거를 매일 탈 수밖에 없는 특수한 상황과 평평한 도로라는 최적의 환경이 맞물려 졸지에는 양손 다 놓고 자전거를 탈 수 있게 됐다! 분당 집 근처 중앙공원의 광장에서 두 손 모두 놓고 자전거로 묘기를 부리는 사람들을 보면서 신기했는데, 나도 이제는 밑으로는 페달을 굴리는 한편 위로는 핸드폰 지도를 조정하거나 헬멧 끈을 다시 맬 수 있게 됐다는 말씀. 위험하게 들릴 수 있지만, 걱정할 필요는 전무하다. 아무도 없는 한적하고 평평한 도로에서만 가끔 연습해 보기 때문이다. ㅋㅋ 게다가 한국에서는 죽어도 안 쓰던 헬멧을 여기서는 항상 착용한다. 무엇보다 차도 바로 옆에서 자전거를 타야 해서 그런 것 같다. 자전거 도로에서 직진하다가 좌회전을 해야 할 때면 좌회전 도로로 차선을 변경해야 한다. 처음에는 그렇게 하기가 너무 겁나서 직진용 자전거 도로에만 머물다가 좌회전 신호를 받으면 그곳에서 크게 사분원을 그리며 좌회전했는데, 이제는 수신호 사용하기에 익숙해져서 뒤에 차가 있으면 왼팔을 들어 차선 변경 계획을 미리 알려 주고 좌회선 차도에서 원칙대로 이동한다. 뭐든지 연습이 중요한 듯하다. 그래도 차에 치이거나 행인을 치거나 다른 자전거와 충돌하는 등의 뜻밖의 일은 언제든지 생길 수 있으므로 매번 헬멧을 쓴다. 안 그래도 강의 8주차 정도에 미술사 수업이 끝나고 귀가하는 길에 내 앞의 어떤 동양인 여자와 가벼운 접촉 사고를 빚었다. 우회전하려 했던 그녀와 직진하려 했던 내가 문자 그대로 '부딪힌' 정도였기에 아무도 다치지 않았지만, 나는 바로 연신 사과한 반면 그녀는 "Jesus Christ!"라며 되도 않는 추임새부터 말하고 정신없이 미안해해서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내 과실이었을지도 모르겠지만, 내가 보기에는 처음부터 어리버리하게 운전하면서 좌우도 안 살피고 우회전하려 했던 그녀 잘못이 더 커 보인다. 다치지 않았으니 아무렇지 않게 회상할 수 있지만, 그때 이후로 헬멧의 필요성을 더욱 절감하게 됐달까나.
한 번은 H가 내게 비대면과 대면 수업 중 뭐가 더 낫냐고 물었다. 그래서 비용의 관점에서 내가 적절하게 답했더니 H가 의아해했다. 정작 경제학도는 자기면서. ㅋㅋ 비대면 수업은 외출할 일이 없어져서 좋다. 사실 집에만 틀어박혀 있기보다 가끔씩 밖도 돌아다니고 햇살도 쬐고, 신선한 공기도 마시는 편이 정신 건강에는 훨씬 이롭지만 일단 밖에 나가면 본의 아니게 돈 쓸 일이 생긴다. 그래서 추가적인 지출을 방지하기로 결심한 날에는 지갑 자체를 아예 놓고 외출한다. 그리고 대면 수업 시에는 매번 점심을 사 먹어야 하므로 기본적으로 매일 15불 정도가 나간다. 반면에 나의 집중력은 돈을 아끼는 만큼 낮아진달까나. 사실 수업 내용이 그리 어렵지 않아서 틈만 나면 딴짓하고 싶어진다. 그런데 교수님이 바로 앞에서 강의하시고, 주변에 다른 학생들이 앉아 있으면 눈치 보여서라도 열심히 필기하고 수업 내용에 집중하게 된다. 학부 생활을 2년 동안 하니 나 스스로에 대해 깨달은 점이 하나 있는데, 나는 공부 자체를 사랑한다기보다도 공부로써 얻게 되는 물질적인 보상에 더 혹한다. 예를 들어, 1등이라는 '지위'가 주는 남모를 우월감과 선민의식... 장학금, 그리고 공부를 잘해서 받는 온갖 특혜들. 뭐, 고등학생 시절에는 최대의 공부 동기가 '가장 효과적인 복수'였으니 말 다했지. 어쨌든 솔직히 말하면 그렇다. 그래서 요즘 대학원 진학 여부를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다. 그래서 정리하자면, 비대면은 돈을 아낄 수 있는 반면, 대면은 시간을 아낄 수 있다. 가족들이나 주변은 돈이 대수냐며 더 좋은 경험, 더 의미 있는 추억을 쌓고 오라지만 자유로운 소비 생활 다음에는 항상 마음 한구석이 불편해진다. 어쩌면 매일 아침 커피를 마셔야 하는 체질상의 문제일지도 모르겠다. 다른 사람들은 점심값만 내면 되는데, 나는 항상 기호 음료 한 잔 값도 계산해야 하니까. 그래 봐야 학교에서 제일 싼 커피를 마시니 - 일부러 가장 저렴한 메뉴를 고른다기보다는 그냥 따뜻하게 내린 다크 로스트 외에 다른 첨가물이 들어가는 것을 싫어해서 - 2불 정도만 더 들지만 말이다.
어쩌다 보니까 학교 생활에 대해 계속 불평만 늘여놓았다. 그렇다고 UCD 캠퍼스 생활이 싫었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너무나 만족스러웠다. 서울대에 비해 훨씬 여유로운 분위기와 다양한 인종 및 배경의 학생들, 그리고 무엇보다 '평지' 캠퍼스에 감동했달까나. 서울에 있는 대학은 죄다 가파른 언덕길이나 산등성이에 자리 잡았는데, 미국 학교들은 어쩜 그렇게 아름답고 적당히 넓은 평지 캠퍼스를 지녔는지. 지난번에 UCB에 들렀을 때도 녹지와 벤치도 많고, 걸어 다니기에도 안성맞춤이라서 인상적이었는데, UCD도 그와 비슷하다. 영화나 잡지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라 실제로 많은 학생들이 햇살이 따사로운 날에는 잔디밭에 앉거나 누워서 저마다 할 일을 한다. 잔디밭은 캠퍼스 구석구석 조성돼 있는데, Shields Library와 Memorial Union 사이에 위치한 East Quad가 가장 크다. 그리고 양옆으로 해먹도 설치돼 있다. 하루는 오전 수업과 오후 수업 사이에 3시간이 비어서 해먹에 누워 독서하고 싶었는데, 안타깝게도 해먹이 모두 다 차 있어서 그 앞 잔디밭에 앉아 망을 보다가 겨우 자리를 잡기도 했다. 그때 아무것도 모르고 퍽 잔디밭에 앉아 버렸는데, 오후였음에도 불구하고 잔디가 젖어 있어서 깜짝 놀랐다. 게다가 그날 하필이면 회색 츄리닝 바지를 입었던 바람에 젖어 버린 엉덩이 부분의 얼룩이 더욱 여실히 드러났다. 살짝 더럽지만, 속옷까지 젖어든 느낌이 들었다. 그래도 별 수 있나. 해먹에 자리가 나기를 계속 기다리다가 한 번은 다른 사람에게 선수를 뺏기고, 두 번째로 자리가 났을 때 거짓말 않고 뜨거운 커피를 들고 부리나케 뛰었다. 덕분에 왼손에 커피의 오분의 일 정도를 흘려서 미미한 화상을 입을 뻔했지만, 그만큼 해먹은 UCD 학생들에게 인기도 많고, 나 또한 커피까지 쏟아가며 차지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ㅋㅋ 아, 그리고 드디어 학교에서 내 보금자리를 찾았다! Hoagland Hall과 Mann Laboratory 사이에 작은 화단과 정원이 있는데, Mann Laboratory 안쪽으로 더 들어가면 적당히 그늘지고 정말 조용한 잔디밭에 벤치 두 개가 놓여 있다. 앞으로는 그곳에서 화요일 점심을 떼울 계획이다. 그 벤치 옆길을 지나는 사람들도 교수들밖에는 없는 것 같기도 하고... 여하튼 마음이 차분해지는 공간이다.
마지막으로 '사람'에 대해 느낀 바를 적고자 한다. 겨울학기 내내 가장 자주 만난 사람이라 한다면 지난 번 페인트볼을 하면서 통성명한 싱가포르 및 홍콩 교환학생들이다. 그중에서도 MF, PZ, PL과는 매주 월요일과 수요일마다 거의 항상 점심을 같이 먹었다. 알고 보니 MF와 PZ는 군대도 다녀왔다고. 졸지에 내가 교환학생 그룹을 통틀어서도 막내가 됐다. ㅋㅋ 사실 처음에는 홍콩 사람들이랑 더 잘 맞는 듯했지만, 지금 종합적으로 생각해 보면 별반 다르지 않았다. 물론, 긍정적인 방향으로. 혼자 점심을 먹을 때는 대부분 Silo의 Crepe Bistro에서 끼니를 때웠고, 다 함께 먹을 때는 Memorial Union 안의 가게들 중 한 곳에서 사 먹었다. 다들 저마다의 유머가 있는데, 특히 MF는 성적인 농담을 즐겨한다. 때로는 농담이 농담처럼 들리지 않을 때도 있고, 당황스럽기도 해서 얼떨떨한 표정으로 반응하기는 하는데, 아직도 어떤 행동을 보고 아무렇지 않게 '게이야'라거나 민망한 신체 부위에 대한 은유를 드는 농담에 어떻게 받아쳐야 할지 모르겠다. 불쾌하지는 않지만, 남이 들으면 어떡하지, 이런 심정이 간혹 들었다. ㅋㅋ 그래도 사람은 착하니 망정이다. NUS에서 온 MF는 UCD와 모교를 자주 비교하고는 했는데, 대체로 NUS에서의 수업이 훨씬 질도 좋고, 학생들도 똑똑하다며 싱가포르를 굉장히 그리워했다. 그러면서 자기 학교가 아시아 1등이라며 알게 모르게 수시로 자랑했는데 - 그런데 이 부분은 QS랭킹에 의하면 사실이므로 자랑이 아니라 그저 사실을 읊조리는 것이었을지도 - 그 학교에 다녀보지는 않아서 모르겠지만, 개인적으로 서울대 학생들이 더 똑똑한 듯하다. 그저 서울대는 국제화에 전혀 무관심하기에 세계 대학 순위에서 낮은 위치에 있지 않을까. 여러모로 '영어'권 대학들이 수치상의 특혜를 받는 점은 인정해야만 할 것이다. 어쨌든, 나는 이 말을 블로그에나 올리지 누군가의 면전에 하지는 않는다. ㅋㅋ 이렇게 써 놓고 보니 마치 내가 MF를 싫어하는 것 같은데, 그 또한 사실이 아니다. MF랑 같이 있으면 굳이 내가 어떠한 화제를 꺼낼 필요도 없어서 편했다. 게다가 내가 인생을 통틀어 최초이자 유일하게 만난 무슬림이었기에 여러모로 이슬람에 대해 배운 바도 꽤 된다. 예를 들어, 당장 기독교랑 대비해서 이슬람은 동일한 신을 섬기지만 교리나 신앙의 근본이 기독교적 '사랑'이 아니라 신에 대한 '공포'라는 점은 MF를 통해 처음 알았다. 이처럼 MF는 단순히 자기 전공인 전기공학뿐만 아니라 여러 분야에 걸쳐 상당한 지식을 갖추고 있어 옆에 두면 흥미롭다 - 더군다나 실리콘 밸리의 인텔(이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하청 스타트업에서 장학금까지 받고 UCD에 교환학생으로 와서 수업도 무려 6개나 수강할 정도로 대단하다.
PZ는 그냥 사람이 참 순했다. 그도 MF 못지않게 유식한데 - 심지어 현대 한국사는 한국인인 나보다 더 잘 아는 듯하다. 나도 안다, 자랑할만한 일은 아님을... - 그에게는 형언할 수 없는 단단함이 느껴졌달까나. 어렸을 때 큰 수술을 받았다는데 - 예전에 한 번 말해 줬는데 까먹고 있다가 언젠가 점심 먹으면서 다시 알려 줬다. ;; - 어쩌면 그 영향일지도 모르겠다. 성격이 얼마나 착하냐면, 예를 들어 싱가포르 사람들끼리 우연히 만나서 신나게 자기들끼리 수다를 떨면 보통은 은어를 사용하기 마련인데, 대화하는 도중에 옆에 있는 나 같은 비싱가폴인들에게 불쑥 튀어나온 은어의 뜻을 설명해 준다. 덕분에 싱가폴 현지인들에게는 영어로 말하다가 갑자기 말레이시아어 줄임말도 은어로 쓰는 등의 관행이 존재함을 목격했다. 홍콩과기대에서 온 PL과는 싱가폴 친구들만큼 자주 대화해 보지 못해서 성격을 구체적으로 파악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지금까지 겪어본 그를 종합하자면 책임감이라는 키워드가 도출된다. 우리끼리 점심 식사를 할 때면 보통은 밖에서 사 먹기 마련인데, 그는 돈을 아껴야 한다면서 2월 말부터는 집에서 자기가 직접 차린 음식을 유리 도시락 안에 담아 오기 시작했다. 그렇게 교내에 비치된 전자레인지에 도시락을 돌려 먹고는 했는데, 일단 그러려면 기본적으로 부지런히 행동해야 한다. 음식이란 이틀 전에 만들어 놓아도 금세 쉬어 버리거나 맛이 변질되기 때문에 그날그날 준비할 수밖에 없다. 이를 고려하면 PL은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서 등교하기 전에 요리해 온다는 뜻인데, 나라면 절대 그렇게 못한다. 일단 제시간에 기상하는 데 있어서부터 큰 고초를 겪고 있기에 전에도, 앞으로도 내가 점심 식사를 미리 준비해 학교에서 데워 먹는 일이란 절대 불가능하다. 돈을 아끼기 위해서 나도 2월 말부터 3월 초 즈음에는 거의 항상 수업이 끝나자마자 귀가해서 예전에 비축해 둔 햇반이나 라면을 해 먹었다. 그런데 단순히 물 데워 붓기나 전자레인지에 돌리기를 능가하는 수준의 요리는 평행 세계의 박창현이나 할 법하다. 앞으로도 점심을 도시락으로 때우는 일은 없다.
아, 정말 마지막으로 UCD에서 대면으로 수업하는 동안 '얼굴을 익힌' - '알게 된'이 아님에 주의하자 - 학생들에 대해 쓰겠다. UCD에는 아시아계 학생들이 매우 많다. 한국인도 많다는데 여태까지 딱 두 명 - 한 명은 통계 전공 강좌의 조별 과제 멤버, 다른 한 명은 커뮤니티 컬리지에서 편입한 학생 - 봤다. 그 외에는 전부 중국인이었다. 솔직히 생김새만 놓고 봤을 때 중국'계'와 한국'계' 학생들을 구별하기란 쉽지 않다. 그런데 중국'인' 학생과 한국'인' 학생은 손쉽게 알아볼 수 있다. 이 말인즉슨, 교포들은 미국의 그 기름진 음식의 영향인지 사람으로부터 풍기는 분위기가 대체로 비슷한데, 중국 본토에서 온 학생들은 확연히 다르다. 일단 왠지 모르게 촌스럽다. 미국 사람들이 평소 옷에 신경 쓰지 않는다는 풍문은 사실인데, 그 미국인들보다도 촌스럽달까나. 그래도 현지 여학생들은 다들 꾸미고 다닌다. 평범한 후드티에 약간 펑퍼짐한 바지를 입고 다니는 사람의 비율은 여학생보다도 남학생이 훨씬 높다 - 여기서 여자들의 '편안한' 차림이라고 하면 대게 검은 레깅스인 듯하다. UCD 남학생 중에 옷 잘 입는 사람은 딱 한 명 봤다. 그런데 그 한 명은 무슨 티모시 샬라메 UCD 버저인 것처럼 완벽했다 - 백인에 샬라메처럼 마른 체형이고 햇살이 비치면 금발로 보이는 연갈색 머리카락의 소유자다. 미술사 교양 수업에서 목격했는데, 나중에는 '그 아이는 오늘 어떤 차림새로 등교했을까'가 또 하나의 등교 동기가 됐을 정도다. 한국에서 유행하는 슬랙스니 후드티니 소위 '힙하다'라고 불리는 스타일은 내 눈에는 참 어설퍼 보인다. 90년대로 회귀하고 싶은 것도 아닐 테고 상당히 시대착오적이라고 해야 하나. 어쨌든 그 미술사 남학생은 '유행'에 따르지 않고 자기만의 확고한 기준을 지키며 묘하게 모던 클래식한 룩을 선보였다. 예를 들어, 하루는 '도대체 더운 날씨에 어떻게 입으라는 것이지'라는 생각이 절로 드는 황색 케이블 니트 반팔 셔츠에 약간 빳빳한 청색 진, 그리고 오케스트라용 구두처럼 지나치게 딱딱하지도 않고 닥터 마틴처럼 튀지도 않는 적당한 검은색 구두를 신고 왔다. 물론, 그의 사진은 단 한 장도 없다. 차림새가 인상 깊다고 몰래 사진이나 찍으면 그것이야말로 '몰래카메라'에 대한 정당화 아닌가. 어쨌든 나는 평소에 거지꼴로 하고 다니지만 - 2, 3월 내내 바람이 거세게 불어서 최대한 실용적으로 입고 다녔다. ㅋㅋ - 옷 잘 입는 누군가를 보면 매번 기분도 좋아지고 저절로 동경하는 마음이 우러난달까나.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통계 전공 수업에 특히 중국인 학생들이 많았는데 - 심지어 이번 학기에 수강했던 통계 전공 두 과목 모두 교수님들마저 중국인이셨다 - 그중 한 수업에서는 '수업을 굉장히 열심히 듣는' 여학생이 중국인 수업 조교에게 대놓고 중국어로 질문했다. 수업 도중에 그렇게 하지는 않고, Discussion 수업이 끝난 다음에 개인적으로 질문할 때 중국어로 질문을 문자 그대로 '폭격'했지만 말이다. 나중에는 조교와 친해지기까지 해서 수업 시작 전에 중국어로 인사까지 주고받고 다녔다. 사실 조교가 그녀에게 먼저 인사를 건넨 적은 단 한 번도 없었기에 나의 아니꼬운 시선은 오로지 그 여학생을 향해 있다. 마치 2014 소치 올림픽에서 김연아의 프리 점수가 공개되자마자 러시아인 피겨 심사위원에게 달려가 안긴 소트니코바가 떠올랐달까나.
그래도 그녀를 포함한 UCD의 모든 아시아계 학생들의 좋은 점을 언급하자면, '우리'는 결코 잘난 척하지 않는다. 반면에 서양 애들은 열어 보면 별것도 없으면서 으레 잘난 척하거나 으스대는 경우가 허다했다. 이번 학기에 수강했던 또 다른 통계학 전공 수업은 비대면과 대면 수업 참여를 동시에 허용하는 하이브리드 방식으로 진행됐는데, 나는 8할 정도 직접 강의실을 방문했다. 대면 강의에 출석하는 학생들은 대게 정해져 있다. 처음 봤던 그 집단이 끝까지 유지된다. 더해지지도 빠지지도 않는다. 대면 참여 인원의 반은 동양인, 나머지 반은 백인 남학생들이었는데, 백인 남학생들의 수업 태도에 기함을 금치 못했달까나. 수업에 방해되는 행동을 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지만 - 아예 없지는 않았다. - 교수자에 대한 예의가 없었던 것 같다. 예를 들자면, 젊은 교수님께서 중국에서 나고 자라 학부까지 다니셨으니 영어가 미국인마냥 술술 나오지 않아서 가끔 말 실수도 하시고, 계산기 사용법을 소개하시다가 중간에 일이 꼬인 적도 더러 있었는데, 그럴 때마다 그 백인 남학생 무리 - 서로 아는 사이다 - 가 자기네들이 아직도 고등학생인마냥 대놓고 코웃음을 쳤다. "Hah" 하는 소리가 분명하게 들릴 정도로 '불필요하게' 민감히 반응했는데, 그것이 자기들이 남들보다 잘났음을 '반증'하는 증표인 줄 착각하는 듯했다. 그렇다. 적어도 내게는 그것이 그들이 얼마나 무례하고 멍청한지 '반증'했다. 해당 수업에서는 시험을 총 세 번 치렀는데, 그중 기말을 제외한 중간고사 두 개는 대면으로 실시됐다. 내가 검토까지 마치며 시험을 두 번 풀 동안 그 무례한 백인 남학생들 중에서 나보다 먼저 퇴실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 잘났어'는 그들처럼 보여 주는 것이 아니다. 실적으로 '증명'해야 한다. 쓰고 보니 UCD 재학생들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평이 난무한데, 그래도 뇌리에 남은 학부생들이 그럴 뿐이고, 대체로 다들 착하고 성실하다.
2. UCD 학생증 발급
미국을 포함한 외국 학교들은 체계적이면서도 어설프다. 자기 모순처럼 들리지만, 사실이다. 솔직히 나는 봄방학 계획을 미리 짜면서 - 1월 말에 모든 교통편과 숙소를 예약했다. - 과연 홈페이지에 명시된 종강일까지 모든 수업이 끝날지 반신반의했다. 왜냐하면 서울대에서는 단 한 번도 공식적인 종강일에 맞춰 시험이 끝났던 적이 없기 때문이다. ^^ 그런데 여기서는 모든 수업이 학기 전에 공지됐던 일정 그대로 한치의 오차 없이 전개됐다. 그래서 참 체계적이다 싶었는데, 또 한편으로는 예방 접종 관련해서 아무도 내게 확인 메일을 보내거나 독감 주사를 빨리 맞으라고 하는 등의 독촉 연락을 넣지도 않아서 '이럴 거면 한국에서 정신없는 와중에 몇 십만 원 내고 왜 뇌수막염이니 폐렴이니 주사 및 검사를 받고 왔나' 후회하기도 했다. 그런데 해당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면 여기 와서 누군가로부터 뇌수막염이 옮았을지도 모를 일이니 지금은 주사 맞고 오기를 잘했다고 생각한다. 이처럼 UCD는 체계적이면서 어설프다. 그러한 면모는 학생증을 발급받는 과정에서도 고스란히 묻어났다. 학생증 발급 안내 홈페이지에 따르면 분명히 학생증은 XX 건물에 '직접' 방문해서 대면으로 신청해야 한다고 공지돼 있었고, 1월 초 오미크론 확산세가 잦아들 기미가 보이지 않자 해당 사무실의 폐쇄가 연장됐다. 그래서 나는 당연히도 학생증 발급 신청을 뒤로 미뤘는데 - 학생증이 없어서 도서관에서 책을 빌리거나 버스를 탈 때 곤혹스러웠다. - B 누나가 온라인으로 학생증을 신청했다고 알려 줘서 나도 뒤늦게 발급받았다. 내 개인 정보와 카드를 배송받을 주소지를 작성해서 관련 사무실의 이메일 주소로 보내면 됐다. 과정은 초간단했지만, 카드를 내 두 손에 쥐기까지는 상당한 기간이 걸렸다. 해당 사무실에서 내 집까지 자전거 타고 12분, 차로는 5분 거리밖에 되지 않지만, 도.대.체. 왜. 그.렇.게. 늦.게. 학생증을 배송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한창 신입생들이 대거 유입돼 학생증 발급 업무가 쌓이는 때도 아니었는데 말이다. 결국 2주 반 정도의 기다림 끝에 UCD 학생증을 얻었다. 학생증과 1월 일상 편에 상술한 BoA 체크카드 때문에 1월 초부터 2월 초까지 한 달 내내 아파트 우편함을 매일 같이 확인했다.
3. SISS 행사
SISS란 국내 대학교의 국제교류처쯤 되는 기관이다. Services for International Students and Scholars을 줄여서 SISS라고 부르는데, 담당 업무는 이미 말했듯 서울대의 OIA와 유사하다. 그런데 이쪽 기관이 규모도 더 크고, 즉 교직원도 더 많고, 처리하는 일도 훨씬 상세하고 다양하다. 오죽하면 국제 학생들의 성 첫 글자에 따라 담당 국제화본부 선생님이 다를 정도니까. 그만큼 우리나라 대학이 국제화가 덜 됐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내가 아는 바로는 연세대가 그나마 한국에서 가장 국제적인 대학인데 - 영어 활용도나 외국인 학생들의 비율이 가장 높지 않을까 추측해 본다 - 아마 미국에서 가장 덜 국제적인 대학이 연세대보다도 더 국제적일 가능성이 높다. 백인이나 흑인이 주가 되는 지역에 가도 국적 자체만으로 놓고 보면 한국의 여느 대학보다도 더 다양할지도. 어쨌든, 비단 UCD의 국제 학생들뿐만 아니라 나 같은 교환학생도 SISS에서 관리한다. 한마디로 내가 UCD 학생으로서 데이비스에 체류하는 6개월 동안 행정적인 볼일이 발생한다면 반드시 방문해야 하는 일종의 과사무실이다.
미국 대학에서는 한국과 다르게 학교 차원에서 '사교' 활동도 적극적으로 권장한다. 따라서 SISS에서도 매 학기마다 Global Ambassador Mentorship Program (GAMP) 참가자들을 모집해서 전 세계에서 날아온 교환학생들을 위한 행사를 이것저것 개최한다. GAMP란 UCD 재학생들이 멘토를 맡고, 교환학생 및 편입생 멘티들의 취향, 관심사, 나이 및 성별 등 지원서에 적힌 내용에 따라 멘토와 멘티를 연결시켜 서로 친목을 다지도록 '유도'하는 프로그램을 일컫는다. 여러 행사들 중 나는 지금까지 두 개밖에 가지 않았지만, 일단 봄 학기 첫 주 주말에도 파머스 마켓에서 자그마한 행사를 한다길래 예약해 뒀다. 내가 처음으로 방문했던 SISS 행사는 평범하기 그지없는 스터디 세션 - 우리에게 더 친숙하게 표현하자면 합동 자습 세션 및 간식 나눔 행사 - 로, SISS 건물 로비의 책상에서 GAMP 멘티와 멘토들이 다 같이 모여 공부하는 시간을 가졌다. 물론, 중간고사 기간에 열리는 바람에 각자 공부하기 바빠서 - 그런데 생각보다 다들 공부를 그렇게 열심히 하지는 않더라. 아무래도 다들 교환학생이다 보니까 본교에서보다 여유롭게 살려고 작정한 듯하다. - 수다를 떨지도 못했고, 그냥 원래 알던 사람들끼리 앉아서 제각기 할 일을 했다. 나는 1월 일지에 소개한 싱가포르 교환학생들과 PL과 Memorial Union에서 먼저 만나 SISS 건물로 같이 이동했다. 사전에 연락하지 않아서 몰랐는데 가서 공부하다 얼마 안 있어 연대 B 누나, S 누나, 그리고 PZ도 도착했다. 추후 요세미티 기행문에서 본격적으로 등장하겠지만, S 누나는 나이는 B 누나와 동갑이지만, 학번은 나와 같은 연세대 교환학생으로, B 누나의 하우스메이트다. 둘이 같이 살다 보니 여행도 같이 다니고, 등교도 같이 하고 여러모로 누이 좋고 매부 좋게 사는 듯하다. S 누나는 GAMP 자습 세션에서 처음 만났다. 그런데 문자 그대로 모두가 '자습'하고 있었으므로 서로 눈인사만 나눴을 뿐, 따로 통성명을 하거나 대화를 나누지는 못했다. 그래도 지금은 나름 친하게 지낸다. ㅋㅋ
로비 한가운데의 바구니에 간식 주머니가 담겨 있었는데, 주머니마다 다른 응원의 메시지 카드가 들어 있었다. 물론 간식 구성은 똑같았다. 내가 처음 고른 간식 주머니에는 핫핑크색 하트 모양의 편지지에 "Everything is going to be okay!"라고 쓰여 있었는데, 반골 기질이 상당한 나는 나중에 내 GAMP 멘토에게 "No. I just wanted to dispute what's written on the card because it sounded too naive."라면서 빈정거렸다... 음... 그냥 말을 말 걸 그랬나 보다. 지금 생각해 보니 공짜로 간식 받는 것만으로도 고마운데 말이다. 그래도 '간식 구성이 참 별로다' 했던 당시의 심정에는 지금도 크게 공감한다. 그런 사탕을 공부 도중 당 충전하라고 줬다니 믿기 어렵다. 왜냐하면 먹으면 먹을수록 '건강에 안 좋아!' 라는 내면의 외침이 선명하게 들리는, 전형적인 미국 사탕 맛이 났기 때문이다. 간단히 표현하자면 마치 배스킨라빈스의 '슈팅스타' 아이스크림을 고체화해 놓은 듯했다. 내 동생은 '슈팅스타'를 좋아하지만, 나는 무척 싫어한다. 입 안에서 톡톡 터지는 느낌이 중독적임에는 동의하지만, 때로는 불쾌하다. 어쨌든 간식 꾸러미가 훨씬 남아서 나중에 귀가할 때쯤 하나 더 받아갔다. 아, 그리고 자습 세션이라고 해도 두 시간 정도가 지나니까 다들 지쳤는지 하나둘씩 떠들기 시작했다. 그때쯤 내 GAMP 멘토인 PI가 자신의 일본인 친구 MR을 데리고 왔다.
MR은 작년 가을학기부터 UCD에 다녔던 게이오대 교환학생으로, 컴퓨터공학을 전공한다. 이전에 기록했는지는 모르겠지만, PI는 원래 전기공학을 전공하다가 대학교 2학년 즈음에 공부에 너무 시달리다 우연히 일본 음식을 직접 요리해 먹은 '사건'을 계기로 일본 문화에 점점 매료돼 전공도 아예 일본어학으로 변경했다. 그래서 그 주변에는 일본인 교환학생으로 가득하다. 내가 GAMP 지원서에 일본인 학생들과 친해져도 색다른 경험이 될 것 같다고 썼더니 PI와 연결됐나 보다. PI도 나의 그러'했던' 바람을 알고 자습 세션에 말미에 "이번 주말에 일본인 교환학생 땡땡의 생일 파티가 열리는데 너도 올래?" 라며 나를 초대했는데, 내가 음력설 모임이 같은 일시에 있어서 곤란하다고 답했다. 모처럼 나를 배려해서 권해 줬는데 거절할 수밖에 없어서 무척 미안했다. PI는 원래 MR과 다른 테이블에 앉으려고 하다가 내 옆자리에 서서 계속 나랑 수다를 떨더니 아예 내가 앉은 테이블에 MR과 자리를 잡아 버렸다. 그는 내게 MR을 소개해 줬는데, 애석하게도 그때 이후로 MR과 다시 만난 적은 없다. PI가 친하게 지내는 교환학생들 중에는 한국에서 온 교환학생도 몇몇 있다는데, 그들이 MR에게 한글을 가르치고 있다고 했다. MR은 12학점밖에 듣지 않는다면서 다른 사람들이 학교 공부를 하고 있을 때 자기 혼자 공책에 한글을 공부하고 있었는데, 도중에 내게 '가', "까', '카' 발음의 구별이 어렵다며 질문해 왔다. 그래서 내가 '가'는 「ガラス」의 「が」、'카'는 「かばん」의 「か」, 그리고 '까'는 「か」를 조금 더 세게 발음하면 된다고 알려 주면서 히라가나를 썼더니 일본어 잘 쓴다고 칭찬해 줬다. 음... 그런데 일본인 특성상 빈말이었을 가능성이 높은 듯하다. 아, 그리고 이 자리에서 PI가 이번 여름에 서울대로 교환학생을 가 볼 생각이라고 '은밀하게' 알려 줬다. 왜 비밀처럼 말했는지는 모르지만, 비밀은 아닌 듯하고 그냥 나를 놀래켜 주려고 '연기'했던 것 같다. 그래서 그의 기대에 맞춰 놀라워해 줬다. ㅋㅋ S 누나와 MR 이외에도 홍콩대에서 온 교환학생인 AC도 자습 세션에서 처음 만났다. AC와는 나름 (온라인상에서) 구면이었는데, 겨울학기 UCEAP 교환학생들을 대상으로 개최된 SISS 오리엔테이션에서 AC가 SSN과 관련된 질문을 제기했는데, 나도 그와 똑같은 의문을 가지고 있어서 줌 채팅으로 UCEAP 관계자로부터 답장이 도착한다면 내게 포워드 해 줄 수 있냐고 그에게 부탁했다. AC는 흔쾌히 수락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약속대로 그가 받은 답장을 내게도 보내 줬다. AC는 디자인 공학(?) - 잘 기억나지 않지만, 컴퓨터 프로그래밍을 다루는 전공이었는데 디자인과도 연관돼 있다 - 을 전공한다.
첫 번째 자습 세션 이후 SISS 주관 행사가 몇 번 더 열렸지만, 나는 이런저런 사정으로 대부분 가지 못했다. 그리고 마지막에서 두 번째로 개최된 자그마한 규모의 운동회가 내가 두 번째로 참여했던 SISS 행사다. 수영, 스케이트, 스노보딩, 달리기와 배드민턴을 제외한 운동 종목이라면 질색하는 내가 기어이 운동회에 '출석'한 까닭은 단 하나였다. 바로 내 나름의 '사교계 데뷔'를 염두에 뒀기 때문이다. 싱가포르와 홍콩 교환학생들이 겨울 학기가 끝나고 대거 본국으로 귀국하면 내가 데이비스에서 나름 친하다고 주.장.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는 연세대 누나들밖에 남지 않기에 봄학기 도중에 닥칠 존재론적 위기를 방지하려는 차원에서 이번 운동회로부터 새로운 지인을 사귀려 했다. 결론적으로 해당 목적을 달성하는 데는 실패했다. 시간에 맞춰 도착하자마자 운동회가 시작되는 바람에 통성명도 불가능했고 - 게임 중간중간에 바닥난 사회성을 쥐어짜서 남들에게 먼저 말을 걸어 겨우 서로의 이름을 알았다. - 운동회가 끝난 후에는 B 누나, PZ, PL과 태국 식당에 가서 점심을 먹었기에 새로운 사람을 사귀지 못했다. 그래도 SY라는 한국인 편입생과 SNS 친구가 되기도 했고 - 물론 그때 이후로 만난 적은 없지만 - 독일과 중국 본토 등 새로운 국가에서 데이비스를 방문한 교환학생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러니 완전히 소득이 없었다고 평하지는 않겠다.
이번 운동회의 하이라이트는 꼬리잡기 팀전이었다. 꼬리잡기라고 설명하기에는 무리일지도 모르겠다. 게임 참가자들을 두 팀을 나눠 각 팀의 홈그라운드에 서로 다른 색의 깃발을 꽂아 두고 상대 팀의 깃발을 뺏어 오는 동시에 우리 팀 깃발을 사수해야 했다. 팀을 그날 입은 옷 색깔로 - 흰색 계열과 검은색 계열로 - 나누다 보니 나 혼자 생판 모르는 사람들과 같이 게임을 하게 됐다. 솔직히 그날 입고 갔던 엷은 회색의 유니클로 경량 패딩을 벗고 짙은 남색 조끼 패딩만 입어서 B 누나, PZ, PL네 팀에 합류하고 싶었지만, 그렇게 하면 너무 구차해 보여서 '에라 모르겠다' 심정으로 그냥 흰 팀에 잔류했다. 설명을 들을 때는 지루할 것 같았는데, 회차를 거듭할수록 서로 승부욕이 올라서 게임이 점점 치열해졌다. 검은 팀은 게임 시작 전에 촘촘하게 작전을 세워서 여러 번의 공격을 시도했던 반면 내가 속했던 흰 팀은 작전이고 뭐고 각자의 역할도 정하지 않은 채 우왕좌왕 게임에 임했다. 그래도 첫 번째 게임에서는 의외로 우리 팀이 선전해서 1점을 기록했다! 포지션이 없었기에 나도 상대팀 영역으로 침범해서 깃발도 만져 봤는데, 내 뒤로 검은 팀 홈그라운드에 도착한 사람에게 깃발을 내어 주고 미끼 역할을 자처했다. 그래서 하고픈 말은, 첫 번째 점수를 기록하는 데 있어 나의 공헌도 지대했다~ 이후에는 흰팀도 역할을 정하고 작전을 세워 실행했지만, 웬일인지 검은팀이 두 번 연속으로 득점하고, 그다음에 우리 팀이 1점을 득점해서 동점이 됐다가 마지막 포인트를 상대팀에 내 주어 결국 패배했다. 사실 나는 우리 팀이 첫 번째 점수를 얻는 데 기여한 만큼 상대 팀에게 깃발을 뺏기는 데도 이바지했다... 내가 맡은 역할은 수비였는데 - 이 역시 자원했다 - 나는 정말 누군가를 막는 데 형편없다. 처음에는 공격수처럼 멀리, 빨리, 많이 뛰고 싶지 않.아.서. 수비를 하겠다고 나섰는데, 막상 해 보니 수비가 공격보다 더 민첩하고 기민해야 하더라. 그래서 게임 후반부에는 힘들어 죽을 뻔했다. 일단 우리 팀 수비수가 나를 포함해 두 명밖에 배정되지 않았고, 상대팀의 공격 시도가 너무 잦아서 한 명을 막으면 다른 한 명이 다른 방향에서 홈그라운드에 침입했다. 정말 난리도 아니었지만, 어쩔 수 있겠는가. 그래도 나는 최선을 다했다. 누구든 불평하고 싶다면 수비수를 모집할 때 손들지 않았던 자기 자신을 탓하거라.
꼬리잡기 팀전 이후에는 각자 하고 싶은 운동을 했다. 나랑 B 누나는 애당초 꼬리잡기 팀전 같은 단체전을 기대하고 오지 않았기에 끝나자마자 잠시 쉬었다가 배드민턴을 했다. 그런데 그 배드민턴마저 팀전이었다. 그 역시 전혀 예상하지 못했으니... 사실 나랑 B 누나는 소수의 인원이서 평화롭게 하하호호 배드민턴 하는 풍경을 기대하고 운동회에 가겠다고 신청했다. 정말이지, "인생이란 뜻밖의 일의 연속인 듯하다" (박창현, "우연이라는 변명 뒤에서"). 졸지에 4:4 경기가 됐는데, 이번에도 나 혼자 모르는 사람들과 같은 팀이 되고, B 누나와 PL이 같은 편에 속하게 됐다. 참... 재미없는 배드민턴 경기였다. 아니 배드민턴은 2:2로 떠도 재밌을까 말까 한데 떼거지처럼 많은 사람들이 동시에 공을 치려 하니 누가 누구에게 공을 건네줘야 하는지도 혼란스럽고, 하여튼 별로였다. 그리고 블로그에 이런 말을 담아서 미안한데 - 물론 실제로 말하지는 않았다 - 나랑 같은 팀을 했던 엠마라는 여자 애는 도대체 그날 운동회에 뛰려고 왔는지 아니면 벤치에 앉아서 멀뚱멀뚱 구경하러 왔는지 참가 목적이 의심될 정도로 운동에 부적합한 옷을 입었다. 전체적으로 하늘하늘거리는 패션이었는데, 옷 취향에 사람의 성격도 어느 정도 반영되는지 사람도 수줍고 부드러웠다. 금발 단발에 파란색 머리띠를 쓰고 흰 블라우스에 하늘색 얇은 천 스카프와 청색 카디건을 두르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하늘색 '치마'를 입고 왔다. ㅋㅋㅋ 내가 초등학교 5학년이던 시절 하도 운동을 싫어하다 보니 엄마가 강제로라도 몸을 움직이게 하려고 농구팀에 가입시킨 적이 있었다. 하루는 지하의 실내 농구장에서 경기를 연습해야 하는데 내가 선물 받은 짙은 올리브색 굽 구두를 신고 갔더니 선생님한테 엄청 혼났다. 그때의 나는 워낙에 당돌하고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던 - 좋게 말하니 그렇지, 나를 싫어하는 사람이 기억하기에는 재수에 싸가지까지 없는 더블 크라운 달성이다 - 나머지 선생님께 대들기까지 했는데, 지금 돌이켜 보니 선생님이 나를 혼냈던 그 심정에 십분 공감한다. 아, 그리고 그 엠마라는 아이는 아마 영국이나 네덜란드에서 오지 않았을까 추측된다. 어쨌든 그렇게 나의 SISS 운동회는 무탈히 지나갔다.
4. 첫 번째 생활의 발견 - 귀여운 불청객
고양이에게 간택됐다! 한국에서도 겪어보지 못했는데, 그 진귀한 경험을 데이비스까지 와서 맛보다니 그야말로 2월 최대의 영광이라 명명하고 싶다. 일요일 오후였는데, 통계학 조별 과제를 위해 팀원들과 온라인 미팅을 하기 전에 타겟에서 장을 보고 오는 길이었다. 여유롭게 필요한 물품을 구매하고 집 앞 1층에 자전거를 주차한 뒤 2층 현관으로 올라가려던 찰나 내 다리에 뭉뚝하고 따뜻한 덩.어.리.가 스쳤다. 깜짝 놀라서 밑을 쳐다 보니까 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 귀여운 회색 고양이 한 마리가 내 다리 사이를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적당히 살도 찐 통통한 아이였는데, 목덜미에 비교적 새것처럼 보이는 보라색 목줄이 채워져 있었다. 그렇다면 누군가가 키우는 집고양이라는 뜻인데, 주위를 둘러보니 아무도 없었다. 주인이 올 때까지 밖에서 같이 기다려 주고 싶었지만 10분을 기다려도 아무도 오지 않아서 하는 수 없이 나는 집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이 고양이가 얼마나 요물이냐면, 내가 가지 않기를 바라기라도 하듯 내 두 다리 사이를 자꾸 오가면서 몸을 비비는 것이다! 그때 처음 반려묘를 키우면 참 행복하겠다고 생각했다. 그전까지는 - 물론 그때의 감흥이 한참 가신 지금도 - 고양이든 개든 평상시 밥 챙겨 주고 산책시키고 씻기고 하는 그 일련의 과정 자체가 너무 귀찮아서 나 이외의 살아있는 생물을 집에 들이고 싶은 마음이 전무했다. 그런데 고양이의 애교를 직접 '겪으니' 그 매력으로부터 헤어 나오는 데 한참 걸렸다. 그래도 뒤에 일정이 잡혔으니 계단을 올라가는데 혹시나 해서 뒤를 쓱 돌아봤더니 아니나 다를까 그 고양이가 나를 뒤따르고 있었다. 마음이 너무 벅차오르는 한편 '혹시라도 끝까지 고양이의 주인이 나타나지 않아서 내가 이 아이를 책임져야 하면 어떡하지? 나는 교환학생이니까 고작 해 봐야 여섯 달밖에 안 살고, 내 먹을거리 마련하는 것만으로도 빠듯한데 얘 사료는 어떻게 해야 하나' 라고 심.각.하.게. 고민했다. 고양이는 내가 집에 들어가기 전까지 계속 나를 맴돌면서 쳐다봤다. 내가 집 안으로 들어가고 나서도 계속 문밖에서 나를 기다렸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심장이 조여와서 조별 과제 모임에 늦을 줄 뻔히 알면서 급하게 전에 먹던 초콜릿으로 덮인 말린 체리 간식 통을 헹궈서 그 통에 우유를 담아 고양이에게 내밀었다. 그랬더니 너무 잘 먹었다. 그리고 뭔가 더 해 주고 싶어서 냉장고 안에 있던 일본식 참치 반찬을 꺼내서 포크로 조금씩 바닥에 흘려서 고양이에게 먹였다. 너~무 잘 먹어 줘서 너~~무 고마웠고, 그래서 너~~~무 다시 보고 싶다. 시간이 없어서 우유를 핥아먹는 모습을 잠깐 보다가 내 방으로 돌아가 조별 과제를 했다. 사실 그 조별 과제도 속된 말로 내가 '갓캐리'해서 - 즉 내가 핵심이었다 - 최대한 빨리 끝냈다. 줌을 종료하자마자 부리나케 현관문을 열었더니 고양이는 어느샌가 사라지고 빈 우유 통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그래도 우유를 다 마셔 줘서 고마웠다. 마음만 같아서는 집 안으로 들여서 키우고 싶었지만, 그럴만한 여건이 못 되니... 안타까움과 미안함이 가득한 내 마음을 고양이가 알아주기를 바랄 뿐이다. 그런데 곱씹어 생각해 볼수록 내가 그 상황에서 왜 물 대신 우유를 반사적으로 떠올렸는지 모르겠다. 보통 목이 마르면 물을 주기 마련인데, 매스 미디어의 지대한 영향인지 당시에는 우유만 떠올랐다. 그래서 그날 저녁에 f(x)의 MILK를 혼자 흥얼거렸다.
Hmm My MILK 데인 맘에 붓죠, 맘에 붓죠, 맘에 붓죠
My MILK 데인 Hmm My MILK
아, 그 고양이는 당시 무라카미 하루키의 <태엽감는 새 연대기>를 완독하고 얼마 안 된 후라 '와타야 노보루'로 부르기로 했다. 와타야 노보루. 부디 봄 학기가 다 가기 전에 우리 집 현관에 다시 와서 너를 '삼치'라고 부를 수 있게 해 줘.
5. 음력설 모임
음력설 모임이라 해 봐야 실제로는 'CNY', 즉 'Chinese New Year'라고 불렸고, 나도 그렇게 불렀다. 그런데 음력설을 지내는 지역이라 해 봐야 동북아시아 3국 - 우리나라, 일본, 중국 - 밖에 더 없으니까 실제로는 "우리 우리 설날"이나 다름없다. 당시 네이버 뉴스 메인 화면에 설날을 'Korean New Year'라고 표기했다가 현지 중국인에게 테러를 당한 캐나다 한국인 미용실의 기사가 걸려 있어서 뭔가 당연하게 'CNY'로 부르기 곤란해졌다. 아무리 그 기원이 중국에 있다고 하더라도, 그리고 기간이 같다고 하더라도 나라마다 서로 다른 풍습이 발전했으니 엄연히 구분되는 문화적 행사라고 간주해도 무방하다. 하여튼 중국 사람들은 속이 참 좁다. 참고로 지금 이 글을 산 호세에서 산타 바바라로 향하는 암트랙 기차 안에서 쓰고 있는데, 내 옆자리에 중국인 여자가 코를 골며 자고 있다. 그런데 어차피 한글도 못 읽는데 중국인 욕 좀 하면 어떤가. 나랑 내 동생을 키워 주셨던 이모 빼고는 중국인이라면 다 별로야~
음력설 행사는 싱가포르 교환학생들이 기획했다. 싱가포르 교환학생 6명 중 네 명이 중국계고, 한 명은 말레이계 무슬림 (MF), 나머지 한 명은 인도계다. 그런데 싱가포르 인구 구성 자체가 중국계가 태반이라 그런지 여섯 명 모두 음력설을 지내는 데 익숙해 보였다. 모임에 초대받은 사람들이 각자 자기네 나라의 음식을 싸 와서 뷔페처럼 그릇에 담아 먹는 potluck 형식으로 진행됐는데, 나는 이런 파티에 참석하는 것이 이번이 처음이라 무얼 챙겨갈까 고민하다가 그냥 싱가포르 친구들한테 직접적으로 뭘 먹고 싶은지 물어 봤다. 그랬더니 PT와 AH라는 여자 애들이 - 걔네는 평소에 한국 드라마를 굉장히 많이, 자주 보는데, 그 탓에 한국인이 술도 잘 마시고 여하튼 뭐든지 다 잘한다는 이상한 고정관념이 생겨 버렸다. - 김치볶음밥을 먹고 싶다고 답해서 Manna Restaurant에서 김치볶음밥 두 접시를 준비해 갔다. PT와 MF가 돼지고기를 못 먹는다는 점을 고려해 - PT는 채식주의자고, MF는 무슬림이라서 - 한 접시는 원래 레시피대로, 그리고 다른 한 접시는 돼지고기와 계란 후라이를 빼고 요리해 달라고 주문했다. 두 접시나 사느라 30불이라는 거금을 한꺼번에 쓰게 돼 조금 속이 쓰렸지만, 우정을 얻는 값 치고는 저렴하다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ㅋㅋ 실제로 그 파티를 계기로 PT, AH와 더 친해졌고, WC라는 중국계 일본인 교환학생과 ZT라는 또 다른 홍콩대 학생, 그리고 요세미티 여행도 같이 떠난 B 누나의 쌍둥이 동생인 BE 누나 - 이 누나도 연세대 교환학생이다 - 도 새로 알게 됐다. 싱가포르 교환학생들은 약간 똠양꿍과 비슷한 맛이 나는 스튜 요리 하나랑 물고기구이, 기름에 달군 두부, bread pudding, 볶음밥, 그리고 술을 준비했다. 술...을 PT와 AH가 준비했는데, 역시 한국 드라마의 영향으로 거대한 소주 두 병을 사 왔더라. 나는 자전거를 타고 귀가해야 했기 때문에 원래는 딱 한 잔만 마시려고 했는데, PT가 자꾸 권해서 졸지에 세 잔 반이나 마셔 버렸다. 그런데 여기서 '한 잔'은 일반적인 소주잔이 아니라 주스를 마실 때 쓰는 플라스틱 컵 한 잔을 의미한다... 알코올 덕분에 평소보다 훨씬 담대해져서 나중에 식사를 마치고 모든 사람들이 커다란 원을 만들어 앉아 진실 게임 비스무리한 Truth or dare를 할 때 춤까지 췄다. 사실 나는 보아의 광팬이니까 보아 춤을 선보임으로써 거기 모인 모든 사람들에게 보아의 환상적인 음악을 홍보하고 싶었지만, 애석하게도 따라 출 줄 아는 그녀의 안무가 없어서 원더걸스의 "Nobody" 코러스 부분에 맞춰 포인트 안무를 췄다. ㅋㅋ 그런데 그날 춤춘 사람이 나랑 PT밖에 없어다... 원래 그런 게임은 질문 폭탄만 돌리지 말고 간간이 춤도 추고 노래도 부르는 수모를 기꺼이 당해 주면서 익살스러운 분위기가 무르익는데 - 물론 본인은 완벽한 코로나 세대라 대학에서 술 게임을 해 본 적도 없다. - 속으로 아쉬워했다.
음식을 뜬 접시를 들고 서서 친하지 않은 사람들과 떠드는 형식의 파티는 그동안 외국 영화나 드라마에서나 봤지 실제로 경험한 적은 없어서 내심 걱정했는데, 다행히 분위기에 잘 녹아들었던 것 같다. 심지어 PT, AH와는 ZK를 대상으로 한국어 관련 장난까지 쳤다. ㅋㅋㅋ 내 아이디어는 전.혀. 아니었고, PT와 AH가 ZK에게 계속해서 모든 사람들을 '오빠'라고 부르라고 설득하는 중에 그들이 내게 다가와 "Hey Charlie, isn't it so common and also natural to call someone else 'oppa' in Korea? That's what we're telling ZK, but he seems to not understand your culture"라고 말하면서 내게 '속여달라는' 신호를 보냈다. 그래서 나도 얼씨구나 둘의 장단에 맞춰 줬는데, ZT는 끝끝내 '오빠'라는 말을 다른 남자에게 하지 않았다 - 적어도 내가 알기로는. 나도 너무 능청스럽게 "원래 오빠라는 말은 여자가 남자에게 말을 걸 때뿐만 아니라 남자가 남자에게도 충분히 쓸 수 있어. 대표적인 예로 '언니'라는 호칭은 흔히 여자가 여자에게 쓴다고 알려져 있지만, 옛날 한국 문학을 읽다 보면 남자들끼리도 서로 언니라고 불렀다니까. 오빠도 마찬가지야." 라며 역사적인 근거까지 끌어와서 연기했다. 너무 능청스러웠는지, 옆에 있던 B 누나는 연기해도 되겠더라고. ㅋ 이렇듯 음력설 모임은 전반적으로 즐겁게 시작해서 즐겁게 끝났다. 자정이 조금 넘은 시각에 집으로 출발했는데, 이상하게 술을 세 잔 반이나 마셨는데도 - 물론 한 잔만 소주 자체로 마셨고, 다른 때는 물이나 사이다를 섞어 마셨다. - 오히려 더 '깨인' 기분이 들었다. 좁은 집에 열댓 명이나 되는 사람이 바글바글 부대껴서 모임 내내 더웠는데, 밤에 자전거를 타니 시원해져서 기분도 좋아졌다. 그런데 밤길 운전은 처음인 데다가 집 가는 길에 고가도로 비슷한 느낌의 도로도 껴 있어서 나름 긴장했던 기억이 난다.
6. 두 번째 생활의 발견 - 스트레스 해소법
언뜻 보면 내가 데이비스에서 매일 놀고 먹는 줄 알겠지만, 알고 보면 이래저래 나도 스트레스를 꽤 받는다. 왜냐하면 열심히 살려고 하는 습성을 여전히 버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무슨 DNA에 각인이라도 돼 있는지 왜 자꾸 힘들게 사려고 기를 쓰는지 모르겠다. 아마 친가와 외가 양쪽에서 물려받은 성격의 유전적 측면 아닐까 유추해 본다. 나름 열심히 공부했고 - 덕분에 학기말이 되니 머릿속에 확실히 각인된 내용도 꽤 많기는 하다 - 인간 관계로 인해 스트레스가 유발됐던 적도 꽤 있고, 자취가 처음이다 보니까 사소한 일상적 문제부터 시작해 행정적인 절차까지 온전히 내가 감당해야 했다. 한국에서는 스트레스 받을 때마다 집에 틀어 박혀서 좋아하는 음악을 듣거나 보아의 콘서트 영상을 보거나 엄마가 요리해 준 맛있는 음식을 먹거나, 애정하는 친구들과 수다를 떨면서 - 뒷담 까면서 - 기분을 풀었는데, 여기서는 새로운 해결책을 찾아야 했다. 그래서 내가 발견한 나의 스트레스 해소법 두 가지를 이 자리에서 소개한다.
첫째, East Quad 양쪽 옆에 있는 - 그런데 나는 동쪽 길가를 더 좋아한다 - 해먹에 누워 살랑살랑 몸을 흔들면서 책을 읽는다. 둘째, 맛있는 음식을 '사' 먹는다. 그런데 데이비스에 위치한 레스토랑이라고 하면 다 거기서 거기니 '맛있는 것을 사 먹는다'는 비싼 유기농 로컬 식료품점인 Food Co-Op에 가서 고급 아이스크림이나 잼, 아니면 과자 사 오기를 의미한다. 나는 어디 여행 갔을 때 꼭 아이스크림을 한 번씩은 사 먹을만큼 아이스크림을 좋아하는데, 그래서 스트레스를 처음으로 무진장 많이 받은 날 하겐다즈를 사 먹을까 고민하다가 모처럼 미국에 왔으니 국내에는 들어오지 않은 브랜드를 시도해 보자 하며 Talenti를 구매했다. 지금까지 pacific coast pistachio gelato, roman raspberry sorbetto, double dark chocolate gelato, 총 세 가지 맛의 Talenti에 도전했는데, 전부 맛있었다. 특히 피스타치오 젤라토가 기가 막혔다. 껍질을 깐 피스타치오가 실제로 곳곳에 박혀 있는데, 피스타치오 그 자체를 씹어 먹을 때 느낄 수 있는 굉장히 풍부하고 진한 풍미가 그대로 살아 있다. 그리고 아이스크림에 우유가 많이 들어가서 그런지 냉동실에 오래 보관해도 쉽게 숟가락으로 퍼 먹을 수 있을 정도로 부드럽다. 아이스크림 본연의 맛과 피스타치오 견과류의 씹는 맛이 환상적으로 어우러진다. 너무 맛있어서 거짓말 않고 5일 동안 아껴 먹었다. ㅋㅋ 라즈베리 소르베는 별로였다. 이 부문은 하겐다즈의 승리~ 미금역에 있는 하겐다즈 카페에서 먹었던 라즈베리 소르베의 맛은 잊을래야 잊을 수 없다~ 물론... 나는 초콜릿 마니아라 당시에 초콜릿 비스무리한 맛을 주문했고, 아이스크림이라면 항상 소르베 아니면 감귤탱귤 같은 맛만 먹는 아빠의 라즈베리 소르베를 뺏어 먹었다. 초콜릿은... 그냥 그랬다. 그런데 talenti와 하겐다즈 초콜릿 아이스크림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고 한다면 나는 후자를 고르겠다.
참, 그리고 평소에 넷플릭스 자체 제작 드라마나 영화를 일절 보지 않던 내가 최근 한 넷플릭스 TV 시리즈에 푹 빠져 버렸다. 한국 작품도, 영미권 작품도 아니고 뚱단지 같은 프랑스 드라마지만. ㅋㅋ <연예인 매니저로 살아남기>라는 시리즈인데, 시험 기간이 시작되기 조금 전에 보기 시작해서 2주 동안 시리즈 네 개를 모두 끝냈다. 정~말 재밌다. 어떤 네이버 블로거는 '잔잔하게 재밌지만 빵 터지는 한방이 부족하다'고 평했던데, 나는 시청하는 내내 껄껄 웃었다. 특히 안드레아... 정말 내가 사랑한다. 너무 멋있는 커리어 우먼. 일과 육아, 그리고 사랑, 이 모든 것에 보란듯이 성공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굉장히 사실적으로 묘사됐다. 그리고 막 보기 시작했을 때는 전혀 몰랐는데, 알고 보니 한 회차마다 초점이 맞춰지는 특정 연예인이 드라마에서 지어낸 인물이 아니라 실존 인물이다. ㅋㅋ 첫 번째 시즌의 첫 에피소드는 세실 드 프랑스라는 배우가 출연하는데, 성이 프랑스라길래 당연히 가상의 인물인줄 알았건만, 실제로 불어 문화권에서 잘 나가는 벨기에 출신 배우임을 알고 놀랐다. 나중에는 이자벨 아자니, 모니카 벨루치, 그리고 장 르노 같은 유럽 영화계 최고의 스타들도 출연한다. <연예인 매니저로 살아남기> 덕분에 "Maintenant ou Jamais"라는 프랑스어 명곡도 알게 됐고, 로라 스메트와 오필리아 콜브 같은 미녀 배우들도 접하고... 모니카 벨루치보다도 이자벨 아자니가 정말 인상적이었다. 사진으로만 봤을 때는 '일부러 저런 표정만 짓나?' 싶었는데 화면 속에서 움직이는 그녀를 보고 있자니 정말 그 매력에 빨려 들어간달까나. 대배우의 포스가 자그마한 아이패드 화면을 뚫고 나왔다. 그리고 줄리엣 비노슈가 그렇게 예쁜줄 몰랐는데, 시즌2 마지막 회를 시청하면서 재평가하게 됐다. 미녀만 말할 수는 없다. 미남에 대해서도 말하자면, 내 기준으로 제라르 랑뱅이 가장 멋있었다. French chic... 참, 그리고 샤를로트 갱스부르... 참 예쁘더라... 약간 프랑스판 정려원 같은데, 어마가 제인 버킨이고 아빠가 갱스부르니 매력이 철철 넘치는 것은 너무 당연한가. 중학생 시절에 한창 듣다가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샤를로트 갱스부르의 음악도 최근 다시 듣고 있다.
7. 성 발렌타인이 맺어준 인연 - Farmer's Market
부제만 읽으면 마치 연인이라도 생긴 것 같지만, 그럴 일은 절대 없고. 그냥 발렌타인데이 전후로 있었던 일에 대해 쓰려 하다 보니 제목을 이렇게 붙였다. 올해는 발렌타인데이가 월요일이었는데, 그 이틀 전인 토요일에 B 누나의 제안으로 요세미티 투어에 동행하게 된 다섯 명이 미리 만나서 친목을 다졌다. 나랑 B, S 누나 세 명이 데이비스에 살고 BE, L 누나 둘은 UCB에 다니니까 결국 다수결의 원칙에 의해 데이비스에서 모이게 됐다. 덕분에 나는 기차 표값 굳힐 수 있었다. ㅋㅋ B, S, BE 누나들은 연세대에서 왔고, L 누나는 나처럼 서울대에서 UC 캠퍼스에 파견됐다. L 누나가 말하길 연세대에서는 매학기마다 몇 십명씩은 UC 캠퍼스로 교환학생을 파견해서 수를 다 합치면 백 명 정도 될 것 같다고... 이번 학기에 서울대에서 파견된 UC 교환학생들은 모든 캠퍼스를 합쳐도 10명밖에 되지 않는다는 점에 비하면 정말 부러울 따름이다. 우리는 그래서 UC로 파견되려면 학점 관리도 정말 철저히 해야 하는데, 연세대 다니는 친구 HL 왈 UC는 그냥 놀려고 많이들 간다고. 하기사 B, S 누나들의 SNS 피드를 구경하다 보면 거의 매일 같이 새로운 놀거리를 찾아 떠나는데 나는 침대에 누워 안락하게 넷플릭스나 시청하고 있으니 말이 되기도 하는 것 같다. 참고로 HL은 올해 가을 학기부터 시카고대에 교환학생으로 일 년 동안 다니게 됐다. 진짜 열심히 사는 똑똑한 친구인데 - 얼마 전 연세대 영상 제작 동아리를 공식적으로 '졸업'하고 지금은 ABC 뉴스 한국 지사에서 이수만 애인으로 알려진 지국장님과 인턴으로 협업하고 있다. 정말 멋지다, 나중에 잘 되면 내게도 황금 동아줄까지는 아니더라도 동(bronze) 동아줄이라도 내려주길. ㅋㅋ - 너무 잘 됐다. 요즘 집 구하느라 개강하느라 일하느라 정신이 없는 것 같다. 어휴 짠해. 요세미티 한인 투어는 내가 알아 보고 참가 인원도 직접 모집했다. 극강의 내향형 인간인 내가 생판 모르는 사람들밖에 없는 서울대 교환학생 단체 채팅방에 홍보글도 올리고, 정말 부끄러워서 죽을 것 같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별다른 방법이 없었기에 무작정 밀고 나갔다. 덕분에 B, S, BE 누나뿐만 아니라 L 누나랑 후술할 K 누나처럼 좋은 사람들을 만났으니 후회하지는 않는다.
B, S 누나는 식품영양학, BE 누나는 의류학, 그리고 L 누나는 화학을 전공한다. 그리고 나는 심리학과 통계학을 복수 전공하고 있으니 저마다 각기 다른 분야의 학문을 공부하는 셈이다. K 누나는 서울대에서 인류학을 전공하는데, 인류학과에 내 중-고-대학교 동창도 있고 지인도 한 명 두다 보니 왠지 모르게 친근감이 느껴졌다. 아, K 누나에게 나중에 물어보니 내 인류학과 지인들을 모두 안다더라. K 누나까지 해서 다섯 명이 다같이 봤으면 좋았겠지만, 그녀만 저 멀리 남쪽의 UCLA에서 수학 중인 관계로 부득이하게 다섯 명이서 만났다. Crepville이라는 지역 맛집에서 집합해 브런치를 함께 먹었는데, 나는 그때 Crepville과 Burgers & Brew가 같은 오너에 의해 운영된다는 사실을 처음 들었다. 나름 고급진 지역 정보 아닌가. 지역 맛집으로 소문난 00과 XX가 사실은 같은 집안 소유래~ 이런 루머(가 아니라 이 경우에는 정보지만)는 언제 접해도 흥미롭다. Crepville에서는 다섯 명이 각기 다른 크레페 메뉴를 주문했다. 역시 한국인 아니랄까봐 이럴 때는 다들 다른 메뉴를 시켜서 나눠 먹는 재미를 누려야지. 같이 밥 먹을 친구를 두면 이런 점이 참 좋다. 혼자 먹으면 메뉴를 하나만 시켜서 그것을 먹기에도 바쁘니까. 식사를 마치고 바로 옆에 열린 Davis Famers' Market (이하 파머스 마켓)을 방문했다. 파머스 마켓은 미국의 각 지역마다 하나씩 가지고 있는 듯하다. 2월 중순경 포틀랜드를 여행할 때도 여름에는 파머스 마켓이 선다고 하더라. 그중에서도 데이비스는 워낙에 수의학이나 낙농업으로 유명한 동네다 보니까 - UCD 공식 엠블럼에는 말이 그려져 있지만, 실상 학생들이 학교와 연관지어 가장 먼저 떠올리는 동물은 다름 아닌 소다. 그래서 UCD subreddit에도 소가 그려져 있다. - 저절로 파머스 마켓도 타 지역에 비해 물건의 질이 높다. 그리고 일종의 주간 지역 행사처럼 여겨지기도 하는 듯하다. 안 그래도 북적이는 통에 다섯 명이 같이 다니려니까 길이 미어터졌지만, 그래도 '함께'의 장점이 거기서도 발현됐다. 다들 배부른 상태였지만 유명하다는 Pecan sticky bun을 놓칠 수 없어서 하나를 사서 다섯이서 나눠 먹었다. 그렇게 파머스마켓을 한 바퀴 쭉 돌고 나서 BE, L 누나들은 스타벅스에서 케이크를 사 오겠다고 해서 다시 역사 쪽으로 갔고, 나랑 S, B 누나들은 파머스마켓에 남아 벤치에 앉아 그들을 기다렸다. 물론 가만히 기다리기만 하지는 않았다. 내가 그 당시 '신선한 생과일 주스'에 꽂혀 있어서 케일, 사과, 레몬, 샐러리 등등을 갈아 주조한 주스도 한 잔 사 마셨다. 다른 재료에 비해 샐러리 맛이 너무 강렬해서 샐러리 특유의 향을 그렇게 선호하지 않는 나로서는 다 마시느라 힘들었다. 그래도 빨대를 두 개 가져와서 S 누나랑 나눠 마셨는데, 그녀는 잘만 마시더라. 심지어 맛있다고... BE, L 누나들이 다시 파머스마켓으로 돌아오고 B 누나네 집에 짐을 두고 UCD 캠퍼스를 돌아보자고 해서 누나들 네 명이 집에 다녀올 동안 나는 East Quad 한가운데 위치한 벤치에 누워 햇볕을 쬐다가 너무 뜨거워져서 Shields Library로 이동해 조앤 디디온의 에세이를 빌렸다.
책을 대출하고 얼마 안 있어 누나들이 도서관에 도착해서 학교 남쪽에 있는 Arboretum(냇가)를 쭉 돌았다. 그곳에 오리들이 무척 많았다. 내 몫으로 남겨온 sticky bun 중 일부를 떼서 오리들에게 던져 줌으로써 환심을 사 볼까 진지하게 고민했지만, sticky bun이 너무 맛있었던 나머지 오리들 주기에는 너무 아깝다고 결론지었다. 그래서 결국에는 내가 다 먹었다. 우리의 목적은 원래 학교의 비공식적 마스코트인 소를 보는 것이었지만, 끝끝내 소 사육장을 찾지 못해서 대신 말을 봤다. ㅋㅋ 참고로 나는 겨울 학기가 끝난 지금까지도 교내에서 소를 보지 못했다. 말이 생각보다 커서 놀랐다. L 누나 왈 제주도 조랑말과는 비교 자체가 실례라고. 그런데 말 사육장 근처에 개를 데리고 접근하지 말라는 안내 표지판이 떡하니 놓여 있었음에도 어떤 일가가 큰 개 한 마리인지 두 마리를 데리고 말들을 구경했다. 그 광경을 옆에서 지켜 보며 한국어로 쯧쯧 혀를 찼는데, 나중에 MF에게 전해 들은 바에 의하면 나의 행동이 더욱 문제적이었다. ;;;; 말 두 마리 중 한 마리가 내가 서 있던 곳 가까이로 오길래 내가 팔을 뻗어 울타리 안의 말 얼굴을 쓰다듬었다. 누나들이 친히 사진까지 찍어 줬는데, 왠지 모르게 기분이 좋아졌다. 동물과의 교감이 심리적으로도 작용하는지 나중에 관련 연구 사례를 검색해 봐야겠다. 그런데 말을 만지거나 그에게 먹이를 주면 안 된다는 안내 표지판이 없어서 만졌는데, MF가 너무 적나라하게 지적했다고 해야 하나, 어쨌든 날카로운 비판을 가해 줘서 나중에는 약간 무안했다. ㅋ 말을 보고 나서 다시 Memorial Union 쪽으로 돌아가는 길에 식품영양학과 건물이 나와서 B, S 누나들은 기념 사진을 찍었다. 조금 걸으니 수학과 건물도 나와서 누나들이 "너 통계학과잖아~" 하면서 나한테도 기념 사진 찍기를 권장했는데, 나는 그냥 귀찮아서 안 찍겠다고 했다. 다시 Memorial Union으로 돌아와 또 다시 Arboretum을 따라 Davis Creamery까지 가서 아이스크림을 사 먹었다. 다들 너무 배불러서 나는 S 누나와 장미맛 아이스크림을 나눠 먹었고, B, L 누나는 다른 맛을 주문했다. 장미맛은... 그냥 록시땅 장미향 핸드크림을 맛으로 구현해 놓은 듯했다. 생각보다 맛있기는 했지만, 예상했던 맛 그대로여서 놀랍지도 않았다. 아, Davis Creamery에 도착하기 직전에 길 건너편 Halal Guys에서 BE 누나가 감자칩을 사 먹었다. 그래서 BE 누나는 배부르다며 혼자 아이스크림을 먹지 않았다... 디저트 배는 따로 있다고!
아이스크림을 먹고 별달리 할 일이 없어서 내가 Memorial Union 옆에 세워 둔 자전거를 가져오는 동안 다른 누나들은 파머스 마켓이 철수한 공원의 벤치에 앉아 수다를 떨었다. 그리고 나도 벤치의 남은 좌석에 앉아 대화에 합류했는데, 그때는 몰랐다. 내가 앉은 자리에 커다란 껌이 붙어 있을 줄은. 나름 살핀다고 앉기 전에 한 번 쓱 보고 앉았는데, 껌이 보호색을 띠고 있었는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저녁을 먹으러 일어났을 때 B 누나가 바지 엉덩이 부분에 껌이 대문짝만하게 묻었다고 알려 줘서 알게 됐다. 손으로 계속 미친듯이 껌을 잡아 떼서 저녁 먹을 식당에 도착해서는 껌이 붙어 있던 흔적만 남고 껌 자체는 완전히 제거했다. 나중에 집에 도착하자마자 청바지를 벗어서 난생 처음으로 껌 떼는 데 특화된 손세탁을 했는데 - 특별하다고 해 봐야 식용유를 뭍여서 껌 자국을 제거하는 과정만 추가됐다. - 내 청바지에게 너무 미안했다. 그 청바지야말로 내가 미국에 들고온 모든 의류 중에서 가장 고가의 옷인데 - 아마 바지 한 벌에 30만 원을 넘나 그럴 것이다. - 포틀랜드 여행할 때도 하필이면 우박 내릴 정도로 강수량이 미쳤던 날에도 그 청바지를 입었고, 졸지에 껌까지 붙였으니. 만약 청바지가 사람이었다면 아마 나를 한 대도 아니고 여러 대 쥐어 팼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미안한 마음에 그날은 청바지를 건조기에 돌리지 않고, 집게 옷걸이에 걸어 둔 채 자연 건조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저녁은 Dumpling House에서 먹으려 했는데, 내가 자전거를 타고 먼저 도착해 문의한 결과 만두가 다 팔려서 두 가지 메뉴 정도만 주문할 수 있다고 해서 그냥 Kim's Mart라는 한인 마트바로 옆의 중식당으로 향했다. 원형 뷔폐식 테이블을 갖춘 '진짜' 중식당이었으나, 음식 맛은 평범했다. 그곳에서 나는 누나들과 인사하고 집으로 돌아와 쉬었다.
그리고 발렌타인데이 당일에는 B, S 누나들이 백종원 레시피에 따라 김치볶음밥을 요리한다며 나를 집에 초대해서 초콜릿을 사 들고 누나네 집에서 저녁을 먹었다. 계획대로라면 당일 자정까지 제출해야 하는 통계 전공 과제를 오후 5시까지 끝내고 제출까지 한 다음에 5시 반 즈음까지 누나네로 이동하려고 했는데, 그때 숙제에 R 코드를 제작하는 문제도 포함돼 있어서 예상보다 시간이 지연됐다. 그래서 실시간으로 B 누나에게 '나 얼마나 늦을 것 같아'라고 보고하다가 결국에는 오후 6시 반이나 돼서야 도착했다. 누나들은 같은 방을 쓰고, 세 명의 다른 하우스메이트와 같이 살고 있었는데, 나처럼 아파트가 아니라 단독 주택 하나를 통째를 공유했다. 물론 그 단독 주택도 하나의 아파트 단지에 속해 있었으므로 형식적으로는 '아파트'지만 각 유닛이 독채로 떨어져 있었다. 그리고 천장이 매우 높았다. 벽난로 장치도 있었는데, 누나들이 말하길 자기네는 물론이고 다른 애들도 안 써 봤다고. 누나들이 만들어 준 김치볶음밥은 치즈까지 얹혀 있었는데 맛있었다. 역시 김치볶음밥은 실패할 수 없는 메뉴일지도? 그런데 내가 만들면 뭐든지 맛이 없어진다. 단 한 가지 흠은 셋이 배부르게 먹기에는 양이 너무 적어서 결국 밥을 다 먹고 나서 이것저것 군것질도 했다. 먼젓번에 B 누나가 싱가포르 교환학생 6인 중 한 명인 IC와 만든 bread pudding이 마침 남아 있어서 그것에 바닐라 아이스크림도 발라 먹고, 쿠키도 먹고 했다. 아, 그리고 내가 Candy House of Davis에서 사 간 발렌타인데이 기념 트러플 세트도 셋이 나눠 먹었다. 아마 그때 오렌지맛이랑 다크 초콜릿, 그리고 다른 무언가 하나 - 어렴풋이 화이트 초콜릿이었던 것 같다. - 를 먹었는데, 음... 그 값에 그 맛이라니. 그래도 누나들은 맛있게 먹어 주기는 했지만, 그냥 내가 사 간 정성을 고려해 건네준 빈말 아니었을까. ㅋㅋ
8. 외국에서 첫 이발
드디어 외국에서 이발해야 하는 때가 찾아왔다. 미국에서 머리를 자른 한국인들이 하나같이 다 미국인 미용사들은 동양인 머리를 다루는 데 어설프다고 해서 최대한 이발을 늦추려 출국하기 직전에 마지막으로 머리를 깎고 왔는데, 그마저도 꼬박 두 달이 지나니 자르지 않고서는 못 베길 정도로 머리카락이 길어져서 결국 적당한 미용실을 찾게 됐다. KGSA Davis 웹사이트에 있는 생활 팁 공유 포스팅에는 돈 낭비, 시간 낭비, 마음 낭비 삼중고를 겪기보다 차라리 새크라멘토의 한인 미용실 - 이름이 롯데 미용실이었다. 재수 없게 롯데라니. - 에 가라고 나와 있었지만, 차도 없는 나로서 새크라멘토까지 가는 편이 훨씬 더 많은 비용이 들었다. 게다가 귀찮기도 했고... 만약 내가 멋을 중시하는 사람이었다면 시간을 들여서라도 기어코 한인 미용실에 다녀왔겠지만, 그러기에는 나의 태생적인 귀차니즘이 너무나 강력했다. 데이비스에서 금방 머리를 자를 수 있는 곳을 찾아 보다가 몇 군데 후보를 추렸는데, 때마침 점심 식사를 하던 중 얼마 전 이발한 PZ와 PL에게 내 고민을 말했더니 Olive Drive Barber Shop을 추천해 줬다. 베트남 여자가 사장이라서 아시아인의 얇고 기름진 머리카락도 잘 다룬다고 알려 줬다. 확실히 백인과 동양인은 확연히 다른 머릿결을 가지고 있어서 백인 미용사에게 아무렇게나 내 머리를 맡기느니 꿩 대신 닭이라고 베트남인 미용사가 훨씬 믿음직스러웠다. 게다가 가격도 나름 적당해서 더욱 좋았다. 커트 한 번에 20불이었는데, 집에서 가장 가까운 - 또한 평도 좋은 - Picasso Salon은 똑같은 서비스가 기본 35불에 샴푸까지 추가하면 더 비싸졌다. 한국에서는 만 오천 원보다 비싼 커트를 받아 보지도, 받을 생각도 안 했던 내가 이만 사천 원짜리 커트를 받다니... 여러모로 마음이 아프고 근심스러웠지만, 어쩌겠나, 그렇다고 내가 직접 머리를 깎을 수도 없는 노릇이니. 누군가는 머리를 길러 보기를 권할 수도 있지만, 손톱이 조금만 자라도 금세 깎아 버릴 정도로 '거슬리는 기분을 혐오하는' 나에게는 부적절하다. 12시에 수업이 끝나고 오후 3시에 다른 전공 수업에 들어가기 전에 Olive Drive Barber Shop에 가서 머리를 자르고 왔다. 내 앞에는 손님 한 명이 어느 백인 여자 미용사에게 서비스를 받고 있었고, 나는 PZ가 소개해 준 베트남 여자 사장님께서 담당해 주셨다 - 그제서야 조금씩 안도했다. 사장님은 조그마한 흰 개 한 마리를 데리고 일하셨는데, 개가 어찌나 시끄럽고 사납던지. 되려 몸집이 큰 개들은 대게 성격도 온순하고 자주 짖지도 않던데 치와와나 포메라니안 같은 개들은 지들이 잘난줄 알고 나대는 꼴이 정말 꼴사납다. 사장님께 내가 원하는 커트 길이를 두 번이나 강조해서 말하고 걱정스러운 마음을 한가득 안고 머리를 자르기 시작했다. 미국 미용실의 특이한 점은 옆머리 길이에 번호를 붙인다. 예를 들어, 1번 머리가 가장 짧고 -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중국인 남자 머리다. 투블럭도 아닌... 바둑 머리바둑머리. - 10번 머리가 가장 길었다. 나는 5번 머리였던 것 같은데 솔직히 까먹었다. 사장님께서 나중에 올 때를 위해서 번호를 잘 기억해 두라고 일러 두셨는데, 그만 잊어 버렸다. ;; 거울을 보기가 무서워서 머리를 깎은 결과를 제대로 확인하지도 않고 20불만 계좌 이체로 부랴부랴 지불하고 학교로 돌아갔다. 머리 모양은 오후 3시 수업이 끝나고 귀가해서야 봤는데, 걱정했던 것보다 훨~씬 괜찮아서 만족스러웠다. 다음에 머리를 잘라야 한다면 또 Olive Drive Barber Shop의 사장님께 맡겨야겠다.
P.S. 본의 아니게 옆에서 먼저 머리를 만지고 있던 백인 남자와 여자 미용사의 대화를 계속 엿들었는데, 뭔가 미용사가 남자 손님을 은근슬쩍 떠 보는 것 같았다. 자꾸 너 결혼은 했니, 언제 했니, 어디 사니, 주말에는 뭐 하니, 부인과는 잘 지내니. 이런 저렴한 질문(추파)을 던지는 것이다. ㅋㅋㅋ 남자 손님은 그냥 얼떨떨해서 - 그렇다고 싫어하는 눈치도 절대 아니었다. - 미용사가 묻는 질문마다 상.세.하.게. 답했는데, 결혼 생활은 최근에서야 시작했고, 실은 얼마 전이 무슨 기념일이었는데 부인을 행복하게 해 준 것 같아서 나도 기분이 좋았다, 데이비스에서 산지는 몇 년/달째인데 어쩌구 저쩌구... 약간... 그 둘이 앞으로 불륜 관계로 발전했을지 살짝 궁금하다. 그냥 나의 어이 없고 황당하기 그지없는 엉터리 추측일 가능성이 높지만, 그 둘 사이에 미~묘~하게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다. 아... 내가 김수현 작가님이라면 그 장면을 보고 제2의 <내 남자의 여자>가 탄생했을지도.
9. 세 번째 생활의 발견 - 셀카봉과 전기 쿠커
쉬어가는 지점~ 6월에 대서양을 건너 프랑스로 날아가기 전까지는 대부분의 여행을 혼자 하니 한국에서도 안 샀던 셀카봉을 도미해서 구매했다. 그것도 아마존에서. ㅋㅋ 내 얼굴이 가장 잘생기게 나오는 각도는 여전히 연구 중이다. 포틀랜드에서 처음 사용할 때는 사진 한구석에 자꾸 하얀색 얼룩이 묻어 나와서 무슨 일인가 했는데, 이리저리 매만져 본 결과 휴대전화 스트랩이 렌즈에 걸려서 발생한 불상사임을 깨달았다. 이제는 그런 얼룩 안 나오게 잘 찍는다~
그리고 전기 쿠커! 이모가 작년 연말에 보내 주신 전기 쿠커가 아니었다면 나는 이미 한참 전에 굶어 죽었을 것이다. 쿠커로 할 수 있는 별의별 요리를 다 해 먹었다. 라면은 기본이요 - 진라면과 삼양라면은 언제 먹어도 속을 버리지만, 반면에 너구리는 언제 먹어도 맛있다. - 비비고 김치찌개, 오뚜기 사골국, 차, 커피, 엄마가 알려준 레시피의 리조또 소스 등등. 전기 쿠커 사랑해~
P.S. 이번 부제는 박완서의 "카메라와 워커"의 패러디다. 그냥... 함축적인 의미도 없고, '비유'라 할만한 배경도 없다. 그냥 '00와 00' 문구를 차용하고 싶었다.
10. Konditorei 폐점
내가 데이비스에서 가장 좋아하는 '점심 맛집' - 베이커리 맛집이 아님을 주의하자 - 인 Konditorei가 20년 이상의 근면성실한 성업을 뒤로 하고 올해 2월 말에 폐점했다. 덕분에 요세미티 여행 점심으로 싸 가려던 터키 점심 샌드위치를 사수하는 데 실패했다. 조만간 폐점한다는 소식은 이미 1월 언젠가 손님과 글로리아 사장이 나누던 대화를 엿들어서 숙지하고는 있었는데, 그 시점이 이렇게나 빨리 찾아올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내가 데이비스를 떠난 다음에 폐점하지... 그러면 나는 앞으로 어딜 가서 양질의 커피와 점심 세트를 먹으란 말인가. 나는 앞으로 어디서 초콜릿과 조각 케이크를 사야 한단 말인가. 나는 앞으로 언제 루바브 타르트를 맛 볼 수 있단 말인가. ㅠㅠ 루바브 타르트는 프랑스로 건너갈 때까지 버킷 리스트에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남겨 둬야겠다. 폐점한다는 소식에 영업 마지막 날 오픈 시간에 맞춰 기상해서 아침 8시에 빵을 사러 갔다. 그런데 이게 왠 걸, 빵이 벌써 다 팔리고 커피밖에 마실 수 없다고 하는 것이다. 사실 Konditorei가 7시에 개점하기는 하는데, 설마 평일 아침인데 꼭두새벽 같이 사람들이 빵 하나 사려고 동쪽 데이비스까지 운전해서 올까, 라며 안일하게 행동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ㅠㅠ 그렇게 나는 아침 9시 수업도 놓치는 주제에 마지막으로 샌드위치 하나랑 루바브 타르트에 커피를 사겠다고 8시까지 빵집을 방문했건만 결국 프렌치 로스트 커피 한 잔에 만족해야 했다. Ciao, Konditorei.
11. 나는 볼링에 소질이 없다.
문자 그대로다. 나는 볼링에 소질이 없다. 3월 첫째주에 IC가 볼링 모임을 주선해서 오랜만에 싱가포르와 홍콩 교환학생들을 모두 다시 만났다. Memorial Union 지하에 위치한 게임장에 볼링장도 있고, 포켓볼인지 당구인지 모를 게임판도 있고, 단출한 PC방도 마련돼 있다. 통계 전공의 두 번째 중간고사가 끝나자마자 Memorial Union으로 이동해 뒤늦게 합류했는데, 아... 볼링장 방문은 그때가 내 생애 세 번째밖에 안 되기는 했어도, 전혀 가망이 안 보일달까나. 물론, 홍콩중문대 교환학생인 JC가 나보다 더 심각해서 꼴찌는 면했다는 생각에 살짝 안도했지만, 그래도 0점을 세 번 연속으로 받기란 여간 쉬운 일이 아니다. 한 번은 9점을 내기도 했는데, 무슨 가뭄에 콩 나듯 해서 그것은 실력이 아니라 운이라 여겨야 한다. ㅋㅋㅋ 어쨌든 한 시간 동안 볼링을 치고 나서 그대로 저녁 먹으러 가기는 아까워서 5불을 내고 AH, PT, PL과 마리오 카트를 했다. 거의 백만년 만의 닌텐도 Wii였다. 동생이 지금보다 한 두 살 어렸을 때만 하더라도 워낙 Wii를 가지고 놀기 좋아해서 주말이면 가끔 같이 했는데, 작년에는 단 한 번도 플레이어를 꺼내지 않았던 듯하다. 그렇다. 나는 대부분의 게임을 못하지만, 적어도 마리오 카트를 볼링보다는 훨씬 잘한다. 여담이지만, 개인적으로 피치 '공주'를 좋아해서 노는 내내 내 게임 캐릭터는 피치였다. ㅋㅋ 아 참, 교환학생 무리와 처음으로 볼링장에서 놀았을 때 VK라는 UCD 대학원생도 소개 받았다. 그는 1월 말 페인트볼에서 봤던 UCD 4학년 여학생의 남자친구였는데 - 말로만 듣던. 그런데 그녀에게 남자친구가 있다는 사실도 한동안 까먹고 있었다. ㅋㅋ - 너무 어려 보여서 대학원생이 아니라 학부 2학년쯤 된 줄 알고 '너는 몇 학년이니?'하고 물어 봤다. ㅋㅋ 그는 재료공학을 전공 중인데 내가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까 옛날에 SNU 출신 한국인 교수들 밑에서 일해 봤다고 말해 줬다. 그날 다 합쳐서 12명이나 되는 무리가 같이 놀았기 때문에 Burgers&Brew에 저녁을 먹으러 가서는 두 개의 테이블에 나눠 앉았다. 나는 남자들만 앉은 테이블에 앉았는데 - 한마디로 재미가 없었던. - 주된 주제는 다름 아닌 연애였다. VK가 나한테 연애해 본 적 있냐고 물어 봐서 "나는 누구를 사랑하기에 아직 마음의 여유도 부족하고, 나 자신이 너무 좋아. 모든 시간을 내게만 쏟고 싶어."라는 아주 오글거리는 다변을 내놓았다.
12. Vacaville Premium Outlet
아휴 힘들어. 마지막 강의 주간을 앞두고 S 누나와 그녀의 일본인 친구 두 명과 데이비스에서 차로 30분 거리에 위치한 바카빌 프리미엄 아울렛에 다녀왔다. 사실 아울렛에 가기로 한 날에 Pal Program을 통해 알게 된 SP라는 친구와 선약이 잡혀 있었는데, 왠지 모르게 그날 SP와 만나기 너무 싫어서 S 누나에게 무작정 아울렛에 나도 동행하겠다며 강력한 의사를 표출했다. 물론, SP 친구는 착하기 그지 없는 UCD 1학년으로 그냥 그 당시 내가 인격적으로 꼬여 있었다. 가끔... 친구 만나기 싫은 날이 있다, 아무리 그 친구가 좋아도 말이다. 데이비스 남쪽의 In N Out에서 집합해서 우버나 리프트를 타고 가기로 해서 집에서 In N Out까지 40분 동안 걸어 갔다. 자전거를 탈 수도 있었지만, 다운타운으로부터도 떨어진 외곽 지역이었기 때문에 내가 부재하는 몇 시간 동안 누군가가 내 자전거의 바퀴를 훔쳐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그냥 허벅지 살을 태우기로 결정했다. 그래도 가는 길에 난생 처음 토끼도 봤다! 한국의 아기자기하고 볼이 빵빵한 토끼가 아니라 다리 근육이 아주 튼실한 놈이었다. 토끼라고는 여태까지 동물원이나 어디 국립공원 같은 곳에서밖에 보지 못했는데, 도시에서 토끼를 목격하다니... 오래 살고 볼 일이다. 어쨌든, S 누나에게 5분 정도 늦을 것 같다고 보이스톡을 걸었는데, 알고 보니 그 누나도 똑같이 5분 지각할 예정이었다. 그렇게 일본인들만 제시간에 맞춰 오고 한국인들만 늦은 그날의 바카빌 여정은 시작부터 끝까지 위태로웠다. 우선, 바카빌에 갈 때 네 명이 같이 탈 수 있는 우버를 찾기가 어려웠는데, 내가 먼젓번에 새크라멘터 국제공항으로 갈 때 우버 앞좌석에 탔다면서 3인승 우버를 불러도 괜찮을 것 같다고 해서 UberX를 호출해 놓고 30분 동안 기다렸다. 그런데 운전사가 도착해서 우리를 보더니 코로나 여파로 3명까지만 탈 수 있다고 탑승을 거부했다. 그래서 망연자실하려던 찰나 그 운전사 아저씨가 도로 돌아와서 우리가 너무 딱해 보인다며 우버와 리프트 규정에는 어긋나지만 그냥 자기가 개인적으로 태워주겠다고 하셔서 - 은인이시다 - 무사히 바카빌에 입성했다. 바카빌은 넓으면서 넓지 않았다. 2017년 뉴욕을 여행하면서 방문했던 뉴저지주의 프리미엄 아울렛이 훨씬 크고, 브랜드도 다양하고, 물건도 다양했다. 이미 3월에 포틀랜드 국제전화의 여파로 예상치 못한 $155을 지불해야 했던 터라 금전적 여유가 없었다. 그래서 내 옷은 반바지 한 벌을 제외하고는 하나도 사지 않겠다고 다짐했고, 동생 옷들 위주로 봤다. 원래대로라면 봄방학용 버킨스탁 샌들도 사고 싶었는데, 내가 사고 싶었던 모델이 없어서 그냥 빈손으로 나왔다. 아니, 발꿈치 끈이 달리지 않은 샌들을 살 것이었다면 차라리 flip-flop을 샀을 텐데, 도대체 왜 버킨스탁 같은 회사에서 Arizona 모델만 대량 생산하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바카빌 아울렛에서 가고 싶었던 매장에 모두 들렀다. 점심 먹기 전까지는 네 명이서 같이 다녔는데, GUESS도 가고, crocs도 가고, Banana Republic도 가고, 초콜릿 매장에도 들르고, 무슨 이상한 초등학생 여자애들 취향이나 맞을듯한 의류점에도 가고, 접시 및 가구 파는 가게에도 들르고, 등등등. 하여튼 많이 돌아다녔다. 나는 Banana Republic에 가서 눈이 돌아가기 전까지는 남들이 쇼핑하는 것만 구경했지, 아무것도 사지 않았다. 내 생각에 좋은 옷은 고민할 필요 없이 첫눈에 결정된다. 첫눈에 보고 마음에 들면 그 옷은 반드시 사야 하지만 - 안 그러면 자꾸 생각나서 괴롭다. - 사야 할까 말까를 고민한다면 대담하게 내려 놓아야 한다. 이러한 '전법'을 십분 활용해 Banana Republic에서 동생 티셔츠를 두 벌 샀다. 사실 푸른색 티셔츠는 완전 내 취향이라서 내가 갖고 싶기도 했는데, 일단 동생의 피부 톤을 고려해서 고르기도 했고, 무엇보다 그 아이의 거지 같은 몰골을 하루 빨리 개선해 주고 싶다는 마음이 더 굴뚝 같았기 때문에 내 몫은 포기했다. 그 아이는... 어려서부터 해외 여행도 자주 다녔는데 왜 하나 같이 대중적이다 못해 촌스러운 미적 취향을 갖추게 됐는지 의문이 든다. 예를 들어, 요즘 애들뿐만 아니라 원래 중학생들이 무채색을 많이 입고 다니는데, 그렇다면 똑같은 검은색 옷이라도 - 검은색으로 도배한 옷은 정말 마음에 들지 않지만. 나는 어려서부터 항상 다채로고 쨍한 색감을 좋아했다. - 포인트가 있는, 남다른 스타일을 추구할 수 있을 텐데 내 동생은 진부하기 짝이 없는 챔피언에 만족하니 답답할 따름이다. 그래서 Banana Republic에서도 '한국에서 희귀한' 스타일이면서 또래 애들의 옷차림으로부터 지나치게 튀지 않을 정도의 로고 프린트가 그려진 검은색 반팔 티도 한 장 샀다.
점심을 먹으러 근처에 있는 The Original Mels Diner라는 'American' 레스토랑에 갔다. 그런데 그 레스토랑은 맛도 더럽게 없고, 서비스도 불친절하기 짝이 없어서 더는 언급하고 싶지 않다. 정말... 음식과 관련된 최악의 선택 5위 안에 들어갈만큼 악몽 같았다. 그 따위로 장사할 생각이라면 부디 때려치기를 바라는데, 매우 놀랍게도 몇십 년이나 된 유서 깊은 식당이란다. 정말 '놀랄 노' 자다. ^^ 점심을 해결하고 나서는 각자 쇼핑하다가 5시 15분 즈음에 Timberland 매장 앞에서 모이기로 했다. 부지런히 다녀서 American Eagle, Polo, Kate Spade, Tommy Hilfiger, J.Crew, Calvin Klein, Levi's, Vans 등 갈만한 곳은 다 봤다. 그런데 랄프 로렌은 점점 디자인이 '답답'하게만 느껴진다. 가격은 더럽게 비싸면서 말이다. 토미 힐피거는 무슨 동네 홈리스나 입고 다닐만한 옷을 '힙한 스타일'이랍시고 내 놓았고, 다른 곳들도 둘러볼 가치가 없을 정도로 엉성했다. 결국 또 J.Crew에 들러 내 반바지를 샀다. 몇 년 전부터 J. Crew 옷을 가장 좋아하게 됐다. 지금은 폴스미스랑 J. Crew가 내 최애 브랜드로 등극했다. ㅋㅋ 이 이야기를 큰고모한테 들려 줬더니 고모가 나한테 폴로는 그대로인데 네 취향이 변할 것이라고 말해 줬다. 일리 있는 말이지만, 앞으로 폴로처럼 가성비가 최악인 브랜드에는 돈 쓸 일이 없을 듯하다. 그렇게 쇼핑을 마치고 우버나 리프트를 타고 데이비스로 돌아가기 전에 피스타치오 맛 아이스크림을 하나 사 먹었다. 같이 간 일본인 친구 중 한 명에게 리프트 10불 쿠폰이 있다고 해서 리프트를 부르려다가 45분이나 기다려야 한다고 해서 그냥 내가 우버를 불렀다. 돈은 어차피 나중에 다 나눠서 계산해서 얼마 들지 않았지만, 정말이지... 리프트를 타고 갈지, 우버를 타고 갈지를 결정하는 과정에서 일본인 친구들이 너무 답답해서 혼났다. 겉으로 표내지는 않았지만, 그냥 한 번에 결정하면 되는데 마치 누가 결정을 내려주기라도 바라듯이 계속 '어쩌지 어쩌지' 망설였다. 그래서 나는 일본인 친구 만들기라는 나의 환상을 아주 고이 접어 하늘 위로 날려 버렸다. 더 이상 그런 헛된 꿈은 꾸지 않는다. 데이비스로 돌아와 아울렛에 갔던 일행을 모두 데리고 SP와 일본 음식점에서 만나 저녁을 함께 했다. SP에게 너무 미안한 하루였다. 그래도 지금은 서로 응원과 걱정의 안부 문자도 간간이 주고 받으며 괜찮게 지내고 있다.
13. 조슈아 벨, 그리고 작별 연습
기말 시험을 코 앞에 두고 싱가포르 교환학생들과 PL을 배웅하는 차원에서 마지막 모임을 가졌다. 이번에도 역시나 싱가포르 친구들네 아파트에서 만났는데, 집에서 열렸던 음력설 파티와는 달리 아파트의 공동 공간에서 피자 파티를 즐겼다. Blaze Pizza라는 곳에서 피자를 무려 다섯 판이나 시켜 먹었다. 뭐 다섯 판이라고 해도 사람이 11명이나 왔으니까 많은 양은 아니었다. 정신 없는 와중에 시험과 갖가지 업무로 인해 스트레스 받는 나를 위해서 북쪽 데이비스에 얼마 전에 개점한 버블티 가게에서 흑당 버블티를 하나 사 마셨다. 별로 맛은 없었다. 게다가 싱가포르 친구들네 집 바닥에도 한 번 흘리고, 아파트 공동 공간 바닥에도 떠나기 직전에 한 번 더 쏟아서… 완전 민폐가 따로 없었다. 사실 그렇게 정신이 없었던 데는 다 이유가 있다. 같은 날 저녁 7시 반에 조슈아 벨과 St. Martins Academy의 콘서트에 가야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작별 파티는 오후 6시나 돼서야 시작됐고, 심지어 한 명이 40분이나 늦어서 피자를 6시 45분에서야 개봉했다. 그래서 수다도 떨면서 피자 세 조각을 막 우겨넣고 사진까지 찍고 오느라 콘서트에 늦을 뻔했다. 정말 미친듯이 페달을 굴렸던 탓에 콘서트가 끝나고 나오는 데 허벅지가 너무 쑤셨다. 사실 송별회에 같이 있었던 WC도 조슈아 벨 콘서트를 예매하려다 그냥 파티에 더 오래 있고 싶어서 안 했다는데, 나만 간다고 하니 조금 눈치가 보이기는 했다. 그래도 조슈아 벨 콘서트를 60불에 볼 수 있는 기회 역시 흔치 않았고, 무엇보다 그 엄청난 바이올리니스트의 연주를 직접 들을 수 있다는 기대에 도저히 콘서트를 저버릴 수 없었다.
조슈아 벨은 역시 조슈아 벨이었다. 사실 처음부터 그를 좋아하지는 않았다. 나중에 음대에서 피아노를 전공하는 친구 LJY가 알려주길 벨이 멘델스존을 참 좋아한다던데, 그래서인지 이번 콘서트에서도 멘델스존 교향곡 4번과 드보르작 바이올린 협주곡을 연주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나는 멘델스존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뭐랄까 음악이 지나치게 형식적이고 예상 가능한 코드로 흘러간다고 해야 하나. 물론, 음악을 전공하지도, 자세히 공부하지도 않은 나의 의견은 조슈아 벨이 프로그램을 선택하는 데 있어 전혀 중요하지 않겠지만 - 그리고 전 세계의 멘델스존 팬들에게는 미안하지만 - 적어도 내 취향은 라벨이나 쇼스타코비치, 브루크너처럼 낭만파 시절의 작곡가들에게 더 관대한 듯하다. 그래도 조슈아 벨의 연주는 무척 훌륭했다. 그 끊어질듯 끊어지지 않는 음 하나하나 정성스럽게 렌더링됐고, Academy of St. Martins를 지휘할 때의 연주도 흐트러짐이라고는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 되려 우치다 미치코처럼 약간 광인이 된 것 같아… 보였다. ㅋㅋㅋ 아무래도 바이올린도 연주하랴, 지휘도 하랴 바빠서 그렇게 극적인 액션을 취한 듯한데, 솔직히 모든 솔리스트들이 오케스트라 연주들에 비해 훨씬 ‘과하게’ 행동하기는 한다. 그래야 자신이 무대에서 더욱 튀어 보이니까. 단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몬다비 센터의 음향이랄까나. 보이기는 잘 보였어도, 소리는 약간 불균형하게 들렸다. 그래도 학생 할인 받아서 60불에 표를 구할 수 있었음에 무한한 감사를 드린다. 콘서트가 끝나고 나서 B 누나에게 전화를 걸어 송별회가 끝났는지 물어 봤다. 혹시나 싶어 전화했는데, 마침 그대로 헤어지기 아쉬워 다같이 Memorial Union의 볼링장으로 이동했다고 알려 줘서 나도 그리로 가겠다고 했다. 9시를 조금 넘겨 콘서트가 끝났으니 한 시간 반 정도를 볼링장에서 더 놀았던 것 같다. 그런데 앞에 이미 썼듯이 나는 볼링에 전혀 재능이 없었기에 내 차례는 그냥 PZ에게 양도하고, AH, WC와 마리아 카트나 한 번 더 했다. ㅋㅋ 그리고 나서 IC가 들고 온 어떤 보드게임을 마지막으로 했는데, 그닥 재미있지는 않았다. 게임장의 배경음악이 말소리가 아예 묻힐 정도로 크게 흘러 나와서 귀가 너무 아팠다. 어쨌든, 마지막의 마지막 모임까지 끝나고 나서 밖에 나와 자전거를 타고 귀가하기 전에 마지막의 마지막으로 단체 사진을 한 번 더 찍고, ZK와 MF와는 작별의 의미로 서로 포옹했다. 음… 참 따뜻한 작별 연습이었다.
14. 네 번째 생활의 발견 - 겨울 학기 마무리
그리고 마침내 겨울학기의 기말고사를 치뤘다. 한 가지 해프닝이 있었는데, 월요일에 통계 전공 하나, 그리고 화요일에 미술사 교양과 심리학 전공의 마지막 퀴즈에 응시했다. 화요일 미술사 교양 시험이 오후 3시에 끝났는데, 그때 심신이 너무 지쳤던 데다가 시험을 잘 본 것 같은 느낌이 마구 들어서 기분 전환 및 스스로에게 상도 줄 겸 비싼 버블티를 사러 가려 했다. 외출 준비를 끝내고 마지막으로 열쇠를 챙기려 하는데 세상에 집 안 구석구석 어디를 살펴도 열쇠가 보이지 않았다. 이 엄청난 절망감과 배신감에 결국 leasing office를 찾아 $5를 내고 새로운 열쇠 꾸러미를 받았다. 화가 나기는 했지만 투덜댈 힘도 남아 있지 않아서 그냥 그러려니 했다. 그런데 수요일에 마지막 통계 전공 기말 프로젝트까지 끝낸 다음에 서론에 언급했던 대청소 용품을 사러 타겟에서 가려고 타겟 쇼핑백을 꺼내던 찰나 그 선반에 예전 열쇠 꾸러미가 떡하니 놓여 있었다. 그때 너무 웃겨서 거짓말 않고, 진.짜.로. 소리내서 한참을 깔깔 웃었다. ㅋㅋㅋ 또 다시 스스로를 인용한다. "인생이란 뜻밖의 일의 연속인 듯하다" (박창현, "우연이라는 변명 뒤에서”). 그리고 그날로 그 전날의 행운이 모조리 치우쳐 있었는지 타겟 가는 길에 야생 여우도 목격했다. ㅋㅋㅋ 여우 너무 예뻐~ 아, 참, 마지막으로, 관성처럼 열심히 과제를 처리한 끝에 전과목 A대 - 통계학 전공 두 개와 심리학 전공 하나는 전부 A+이고, 수업에 한 번 결석한 미술가 교양 하나만 A를 받을 듯하다. - 로 GPA 4점 만점에 4점을 받으며 겨울 학기를 마무리한다. 수고했다, 박창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