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dyssey

대서양을 건너

도미니크앙셀 분당점 2022. 7. 12. 09:38

이번 여름의 프랑스(라고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유럽) 여행은 기대하고 또 고대했던 명실상부 군입대 전의 최대 이벤트였다. 교환학생 자격으로 캘리포니아에 체류 중이던 때부터 몇 달에 걸쳐 지속적으로 계획을 세우고 수정했으니 말이다. 안타깝게도 혼자만의 여행은 아니었다. 그 안타까움은 여행을 마치고 나서 기행문을 쓰는 지금에서야 고백한다. 기꺼이 프랑스 이곳저곳을 같이 돌아다녀준 동행에게 면전에서 할 말은 아니라고 판단했다. 그는 내가 새로운 글을 블로그에 게재했다고 개인 SNS에 홍보하면 가끔씩 과수원에 들러 주는 것 같다. 즉 혼자인 편이 더 좋았을 것이라는 나의 속마음을 언젠가는 친구도 알게 되겠지. 그렇지만 친구도 남모르게 그렇게 생각했을지도 모르고, 더군다나 누군가를 의식해 내 안의 응어리를 그대로 얽히고설킨 채 방치하고 싶지는 않다. 그리고 그 친구 - 앞으로는 H라고 호명하겠다 - 에게는 웬만해서 거짓말하고 싶지 않다 (라고는 하지만 여행 중에 이미 수없이 그와 나를 속였다). 그만큼 가장 진실된 모습의 나를 보이고 싶다. 선택은 H의 몫이다.

 

캘리포니아의 데이비스라는 작은 대학 도시에서 교환학생을 마치고 일 주일 반 정도 미국을 여행했다. 그중 절반은 여행이라고 하기에는 민망할 정도로 이모네 댁에서 푹 쉬었다. 이모가 애리조나 피닉스에 살고 계신 덕분에 제대로 미국의 사막을 경험했다. 국외수학 기간 말미에 집 계약 양도와 출국 준비, 봄학기 기말고사 등 여러가지가 겹치는 바람에 피골이 상접할 정도로 고생했는데, 이모가 극진히 보살펴 주셔서 어느 정도 원기를 회복하고 뉴욕으로 향할 수 있었다. 뉴욕은 이번이 두 번째 방문인 데다 처음 갔을 때 2주 가까이 머물렀기 때문에 의외의 장소들 - 이라고는 하지만 관광 책자에는 모두 소개된 - 을 다녀왔다. 뉴욕을 여행하는 동안에도 아빠의 사촌인 당고모 댁에 신세를 져서 금전적으로나 정서적으로나 여러모로 도움을 많이 받았다. 마지막으로 <매직 트리 하우스> 주인공들의 거주지로만 알고 있던 펜실베이니아 땅을 실제로 밟고 그 다음날 JFK에서 출국했다. 당고모 댁은 뉴저지의 워싱턴 타운십이라는 작은 동네에 위치해서 JFK까지는 택시를 타고 이동했다. 감사하게도 고모께서 교통비도 전부 지불해 주셔서 마지막까지 호사를 누렸다. 뉴저지와 뉴욕 사이를 잇는 조지 워싱턴 다리를 건너면서 도도하게 우뚝 솟은 맨해튼의 전경을 보고 있자니 새삼 지난 반년 동안 살았던 미국이라는 땅과 마침내 작별하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미국에 무얼 하러 왔고, 무얼 이루고 떠나는가. 데이비스에서의 마지막 두 달 내내 정신적으로 피폐해 있었던 나머지 지난 시간을 돌이켜 보지 못했다. 이모와 당고모의 지붕 아래서 그나마 마음의 여유를 되찾았다. 상징적인 다리를 지나 브롱스를 대표하는 적갈색 벽돌의 오래된 건물들 옆을 쌩쌩 달려 다시 맨해튼의 고층 빌딩들을 마주했다. 맨해튼을 기준으로 서쪽에서 동쪽으로 이동하는 동안 꽤 센티해 있었다. 뉴욕시티가 가진 마력인가보다. 출국 전날 맨해튼 야경을 보러 당고모네 가족과 허드슨 강변에 갔을 때 당고모께서도 이곳의 야경은 사람을 홀리는 힘을 가진 것 같다고 말씀하셨다. 밤이건 낮이건 콧대 높은 뉴욕시티의 정경은 각자 품은 아메리칸 드림의 실체에 물음표를 던지게 하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JFK에 가는 내내 감상에 젖어 있지는 않았다. 만약 철저히 혼자였다면 그랬을지도 모르지만, 중간중간 택시 기사 아저씨께서 말을 거셔서 이것저것 얘기하며 지루하지 않게 공항에 도착했다. 참, 기사 아저씨께서도 이민자셨다. 어디서 오셨는지는 까먹었다 - 어렴풋이 기억나는 아저씨의 인상에 의하면 분명 인도나 파키스탄인 것 같기도 하지만, 왜인지 카다시안 일가도 대화 주제 중 하나였던 것으로 보아서는 아르메니아 계통이신 것 같기도 하고, 그렇다고 중앙 및 남아시아 출신이라고 뭉뜽그리기에는 그 일대가 워낙 거대해서 소용이 없다. 꼴에 반년 미국에 살아서 그런지 아니면 트렁크에 실은 캐리어 두 개가 모두 상당한 무게를 자랑해서 그런지 아저씨께서는 나를 뉴저지 당고모댁에 살다가 해외로 나가는 아시아계 미국인으로 오해하셨다. 운전하시는 동안 아저씨께서는 내게 뉴욕의 이곳저곳을 설명해 주셨다. 지금 건너는 다리가 '그' 유명한 조지 워싱턴 다리라거나, 지금 지나는 곳이 브롱스라거나, 저기 보이는 곳이 맨해튼이라거나, 지금 도로가 막히는 이유가 뉴저지에서 맨해튼으로 건너가는 차량 때문이라거나. 내가 당고모댁에 머물렀다고만 말하고 뉴욕을 여행했다고는 밝히지 않아서 그러셨던 것 같다. 너무 신이 나 계셔서 처음 듣는 이야기인척 잠자코 있었다. 이미 아는 내용이라 재미는 없었지만, 낯선 외지인에게 베푸는 현지인의 친절이란 참으로 소중해서 열심히 추임새를 넣어 드렸다. 문득 아저씨의 아메리칸 드림은 무엇이었을지 궁금하다.

 

에어프랑스와 대한항공은 JFK에서 같은 터미널을 사용한다. 둘 다 스카이팀 소속 국제선 항공사라 그런가보다. 의외로 내 주위에 비행기를 좋아하는 친구들이 꽤 된다. 내가 타는 항공기 기종이 무엇인지, 언제 구입된 것인지 등의 정보에 일절 관심을 두지 않는 나와는 달리 그들은 그런 사소한 부분까지 확인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아이들은 비행 자체에 설레여 한다. 솔직히 말해 언제부터인가 나는 혹시 추락하지는 않을까, 날개가 부러지지는 않을까, 엔진이 하나 꺼지지는 않을까, 동체 착륙하지는 않을까, 연료가 도중에 바닥나지는 않을까 등의 쓸모없는 걱정을 하기 시작했다. 특히 내륙 지방을 길게 가로지를 때면 여기서 떨어지면 바로 죽겠구나 싶어 한 켠으로 마음이 심란해진다. 게다가 마른 사람도 옴짝달싹 못하는 좁은 좌석에 오랜 시간 앉아 있으면 답답해서 못 견딜 지경이다. 쇠창살 없는 감옥 같은 곳에 몇 시간이고 갇히기 위해 기꺼이 비싼 돈을 지불하겠다니, '어디로든 문'이 실제로 출시된다면 결코 비행기표를 사지 않을 것이라 장담하는 나로서 비행을 좋아하는 친구들은 참 신기할 따름이다. 하지만 이런 비행 자체에 관한 걱정은 좌석에 앉은 후에야 시작된다. 지난 여섯 달치 살림을 짊어지고 움직인 나는 일단 짐부터 덜어야 했다. 무거운 캐리어 두 개를 낑낑대며 끌면서 에어프랑스 수하물 카운터부터 두리번거리며 찾았다. 저녁 5시 30분 비행이었기 때문에 늦어도 오후 2시까지는 공항에 도착하고 싶었는데, 카운터가 열리기를 기다리지 않고 바로 위탁 수하물을 맡겼던 것으로 보아 아마도 2시 전후로 택시에서 내렸던 것 같다. 에어 프랑스의 경우 일반 이코노미 승객은 수하물 한 개까지만 위탁할 수 있어서 커다란 캐리어 하나만 부치고 이모댁에서 받아온 캐리어는 기내에 가져가려고 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카운터 직원 분께 들고 탈 가방을 보이며 캐리온 규정에 부합하냐고 여쭤 봤다. 직원 분께서는 사이즈는 괜찮지만, 가방의 무게가 10kg을 초과하지 않아야 하는데 내 가방은 넘고도 남을 것 같다고 걱정하셨다. 그러면서 그냥 그 가방도 위탁하지 않겠냐고 서슴없이 제안해 주셨다. 사전에 에어 프랑스의 가방 규정을 몇 번이고 반복해 읽은 내가 '정말요?'라고 되물어도 된다고 하셔서 나는 옳다구나 냉큼 제안을 수락해 버렸다. 양손을 묶어버렸던 짐들을 처리하고 나니 한결 자유로워진 기분이 들었다. 그렇다. 이번 여행에 대해서는 공항 카운터에서부터 상큼한 기운이 맴돌고 있었다.

 

보안 검사 대기줄에 동양인은 나뿐이었다. (곧 더 많이 보겠지만) 그렇게 많은 프랑스인을 한데서 보기는 처음이었다. 보안 검가소 안쪽의 터미널이 프랑스와 독일, 이탈리아를 연결하는 국제선 전용이라 그런지 프랑스인들 말고도 독일인과 이탈리아인들도 많았다. 거기서부터 확실히 유럽 사람들이 더 잘생기고 예쁘구나, 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키도 크고 늘씬한 백인들 (그리고 몇몇 흑인들) 사이에서 땅딸막한 동양인 한 명이 서 있자니 묘하게 이질감이 느껴졌다. JFK 보안 검사소에서는 다른 검사기를 사용하는지 일부러 가방에서 전자기기를 꺼내지 않아도 된다고 안내했다. 그러나 성질 급한 한국인답게 나는 가방을 트레이에 올리자마자 랩탑과 아이패드, 카메라를 미리 꺼내 버려서 안내 요원에게 한 소리 들었다. 무사히 보안 검사를 마치고 들어선 출국장 면세점은 예상 밖으로 단촐했다. 뉴욕을 대표하는 공항이라 인천공항처럼 휘황찬란하게 가게들이 늘어서 있을 줄 알았는데 팬데믹의 여파인지 아니면 원래부터 그런지는 알 수 없지만 볼거리가 전혀 없었다. 분명 5년 전에 귀국할 때도 같은 곳을 이용했을텐데 왜 전혀 기억이 나질 않는지 모르겠다. 딱히 살 물건도 없어서 곧바로 점심 먹을만한 곳을 물색했다. 뉴욕뿐만 아니라 미국에서의 마지막 식사니까 뭔가 그럴듯한 음식을 먹고 싶었다. 출국장에 스타벅스가 입점해 있을 것이라 예상하고 집에서 점심까지 먹고 가라는 당고모의 제안도 뿌리쳤지만, 아쉽게도 스타벅스는 커녕 문을 연 커피숍 자체가 없었다. 원래 계획은 미국에서만 맛볼 수 있는 현지 시즌 혹은 스페셜 메뉴 시도하기였다. 이전에는 마침 여행 기간이 추수감사절 및 할로윈 시즌과 겹쳐서 날씬한 백인 여성들이나 살 법한 펌킨 스파이스 라떼 같은 것도 사 먹어서 - 물론 맛은 별로였다. - 나름 기대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미국에서 섭취한 마지막 음식은 피자와 이토엔의 오이오챠였다. 다른 유럽인 승객들도 마땅히 먹을만한 것이 없다고 판단했는지 나처럼 피자를 사 먹는 사람들이 꽤 됐다. 나는 그와중에 굳이 뉴욕다운 메뉴를 먹고 싶은 욕심을 끝까지 버리지 못해 뉴욕 피자를 주문했다. 맛은... 벌써 한 달이나 지났기 때문에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분명 맛있었다. 사실 피자가 맛없기 쉽지 않다, 그것도 외국에서는.

 

늦은 점심 식사를 마치고 게이트가 열리기를 기다리면서 지난 이 주일 조금 넘는 기간 동안 SNS에 연속해서 발신하던 <아메리카나> 시리즈의 마지막 에피소드를 구성할 사진들을 골랐다. <아메리카나> 시리즈란 미국에 체류했던 여섯 달 동안 내가 여행했던 곳들의 사진을 장소별로 묶어서 개인 SNS에 집대성한 프로젝트를 가리킨다. 사진을 워낙 많이 (무분별하게) 찍으며 다녔기 때문에 마음에 드는 사진들을 선별하는 것부터 일이었다. 처음에는 장소마다 열 장씩만 사진을 올리려 했는데, 샌프란시스코 같은 경우 그동안 네 번이나 방문했으므로 열 장으로는 도저히 성에 차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하루나 이틀 정도 들른 곳들은 열 장으로도 충분히 나의 여정을 요약할 수 있었지만, 3박 4일 일정이었던 포틀랜드와 로스엔젤레스도 더 많은 사진들이 '필요'했다. 돌이켜 생각하면 선별 기준이 모호해서 더욱 힘들었던 것 같다. 발도장을 찍은 장소들을 인증할 것인가, 아니면 개인적인 추억을 연상시킬 것인가. 그마저도 아니라면 그냥 마음에 드는 사진을 자랑할 것인가. 가장 단순하고 수월하게 프로젝트를 진행하려면 인증의 목적을 철저히 따라야 했다. 그렇게 했다면 로스엔젤레스도 단 열 장만으로 간추릴 수 있었을 것 같다. 다운타운, 월트 디즈니 콘서트홀, 더 브로드, 한인타운, 애봇 키니 불레바드, 베니스 비치, 산타 모니카의 해변, 게티 미술관, 그리피스 천문대, 그리고 LACMA. 아쉬우면 여기에 베벌리 힐즈나 로데오 거리, 쏘텔 지역의 먹자 골목 정도를 더하면 된다. 그렇지만 원최 욕심 많은 나로서는 '남들이 안 가 보는 곳까지 나 박창현은 구석구석 다녔답니다'를 자랑하고 싶었다. 원래 비메신저 SNS를 하는 이유는 자랑과 불평 둘 중 하나 아니겠는가. 세 가지 기준을 모두 충족하는 사진을 꼽자니 머리가 복잡해져서 결국 셋 중 하나라도 충족하는 사진들을 죄다 통과시켰다. 덕분에 가장 많게는 서른 장에 육박하는 사진들이 한 번에 올라간 적도 있었다. 자랑하는 사람은 어느 순간부터 기계적으로 그 일을 하게 되니 그나마 다행이지만, 그것을 보는 사람들은 참 따분했을 것이다.

 

출국하기 전날 다녀온 곳이 바로 필라델피아였기 때문에 <아메리카나>의 대미는 필라델피아가 장식했다. '내가 경험한 미국'을 정리하겠다는 포부로 기획한 프로젝트의 막을 미국이라는 나라가 탄생한 역사적인 도시로 내린다니, 정말이지 뜻깊었다. 물론 이를 의도해서 마지막 행선지를 필라델피아로 정하지는 않았다. 한 번쯤은 뉴욕이 아닌 다른 곳을 다녀오고 싶었고, 필라델피아와 워싱턴, 그리고 롱아일랜드 몬턱 중에 고민하다가 그나마 교통이 편리한 필라델피아를 선택했다. 공항에서 사진들을 고르고 수평이나 색 등을 얼마간 편집하고 나니 금세 시간이 지나 있었다. 한산했던 출국장은 프랑스인, 이탈리아인, 독일인, 그리고 미국인으로 득실거렸다. 에어 프랑스 게이트 바로 옆에는 비슷한 시간대에 로마로 향하는 비행기의 게이트가 열려 있었다. 프랑크푸르트발 비행기는 일찌감치 이륙해 버렸다. 내가 앉아 있던 자리 옆으로 이탈리아인 일가족이 쭉 앉아 있었는데, 의자가 부족해 두 명 정도는 서 있었다. 그래서 (한창 몸이 말라 있던) 내가 그 무거운 배낭을 내 자리로 옮긴 후 자리를 양보해 드렸다. 당시 나는 너무 말랐던 나머지 내가 앉고 남는 구석에 배낭을 둬도 공간이 아주 조금 남을 정도였다. 그렇게 불편한 자세로 사진 편집을 마치고 주위를 둘러보니 에어 프랑스 게이트 앞에 줄이 생겨 있길래 나도 짐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줄을 서기 전에 마지막으로 JFK 출국장 유리창 밖으로 보이는 맨해튼 전경을 감상했다. 항상 뉴저지 쪽에서만 바라보던 섬을 브루클린 방향에서 마주하기는 참 오랜만이었다. 사진을 고르던 내내 사람들이 창가에 서성여서 볼거리가 있나 싶었는데, 다들 마지막으로 빅애플을 눈에 담고 싶었던 것이었으리라.

 

탑승 대기줄에 서 있으며 앉아 있던 동안 골랐던 사진들을 하나씩 SNS에 업로드했다. 18일 연속으로 - 그러나 하루 정도는 시간을 잘못 계산하고 이모네 식구랑 세도나에 다녀오느라 완전히 빠트렸다. - 몇 십장이나 되는 사진들을 매일 올리다 보니까 내가 마치 SNS 중독자 같았다. 이 짓도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니 속이 후련했다. 나는 애초에 여행하는 동안 누군가에게 연락을 자주 취하거나 나의 소식을 타인에게 활발히 전하는 성격이 아니라서 그동안 미국 구석구석을 탐방했음에도 불구하고 누군가는 내가 방 안에만 틀어박혀만 있다고 착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가족들과 정말 친한 친구들에게만 몇 번 귀띔질하기는 했다. 나중에는 그마저도 귀찮아서 일주일에 한 번 엄마한테 안부 인사를 전할 때 앞서 있었던 일들을 몰아서 설명하고는 했다. 어쨌든 필라델피아 사진들을 모조리 공유하고 나니 어느 새 게이트 코앞까지 진전해 있었다.허둥지둥 필요한 서류들을 준비했다. 사실 지금에서야 내가 서 있던 줄이 에어 프랑스 줄이라고 확언할 수 있지, 당시에는 게이트 앞 승무원들의 유니폼이 보이기 전까지 계속 반신반의했다. 줄을 서자마자 내 앞에 선 프랑스인 남자에게 당신도 파리로 가냐고 물어서 그렇다는 답을 받기는 했지만, 그 남자는 '그런데 나도 이 줄이 맞는지는 확실치 않다'라는 말을 덧붙였다. 어느 샌가 내 뒤로도 줄이 길어져서 내가 틀리지 않았기를 절실히 바랐다. 한국과는 다르게 해외에서 프랑스에 입국할 때는 비행기 탑승 48시간 전에 음성 확인서를 받지 않아도 돼서 무척 편했다. 다만, 에어 프랑스 항공편을 예매한 직후 작성 완료하라고 안내한 별도의 서류 - 명칭은 까먹었다. - 와 본인이 접종 완료자임을 나타내는 증빙 서류를 게이트 직원에게 보여야 한다. 세상이 좋아져서 이제는 해당 서류들을 굳이 인쇄하지 않아도 스마트폰으로 보여주면 그만이었다. 미리 저장해 둔 서류들을 준비하고 앞 사람의 검문이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왜인지 그 남자는 직원의 설명을 듣더니 다른 곳으로 가 버렸다. 그래서 내 서류들이 검토되는 동안 은근히 긴장됐지만 나는 원활하게 게이트를 통과해 비행기에 탑승했다.

 

해외를 다녀올 때면 항상 대한항공 아니면 아시아나를 이용했기 때문에 국적기가 한 나라의 첫인상을 결정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다. 에어 프랑스 비행기의 기종은 알지 못했으나, 탑승구에서 나를 반겨주던 승무원들의 검은 유니폼부터 세련되니 참 마음에 들었다. 대한항공의 옥빛이 옅게 맴도는 하늘색 유니폼도 예쁘지만, 에어 프랑스의 유니폼은 보자마자 '프렌치 시크'라는 말이 자동으로 연상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