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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베르토 에코, <장미의 이름>

도미니크앙셀 분당점 2022. 10. 29. 08:46

8 22일에 입대하기 전에 책을 많이 읽고 싶었는데 돌이켜 생각하면  그러지도 못했다. 게으른 탓도 있겠지만, 아무래도 『장미의 이름』 완독하는  지나치게 오래 걸렸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프랑크푸르트발 비행기에서 Klara and the Sun 끝냈고, 그외에도 Carlo Rovelli Seven Brief Lessons on Physics 등을 읽었지만 - 솔직히 ""이라고 쓸만큼 그외에 진득하게 읽은 책이 없는 듯하다. - 기억은 이미 희미해진지 오래다. 『장미의 이름』 다소 타의적인 계기로 책장에서 꺼냈다.  늦게까지 자지 않고 TV    휴대폰만 들여다보다가 우연히 KBS1에서 방영하는 『장미의 이름』(2019) 드라마를 시청했다.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보다가 이대로 드라마만 보다가는 원작을 접할 기회를 영영 잃을  같아 허둥지둥 책장을 뒤졌다 (아빠가 에코의 저서  권을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어렸을 때부터 알고 있었다). 드라마는 현대식으로 각색한 나머지 책과는 상당히 상이하게 전개됐지만, 그럼에도 대략적인 줄거리는 같기에  내용을 따라잡으려고 애썼다. 그러나 익히 알려졌듯  책은 순식간에 읽을 수는 없었던지라 거짓말 않고 이번 여름 내내 마지막 장에 다다르기 위해 사투했다. 그런 책의 감상문을 나는 논산 육군훈련소 3일차인가에 작성했던 것이다. 읽는 것만으로도 벅차서 아직 내용이 머릿속에 따끈따끈하게 남아 있을  나의 감상을 쏟아내기에는 역부족이었나보다. 어쨌든 아래 글은 내가 논산에서 공책에 수기로  내용을 그대로 타자로 옮긴 것이다. 마음에 들지 않는 문장 투성이인 데다가 정제되지않았고, 구성도 이상하지만 - 그러나 내가 블로그에 작성하는  대부분은 괴상한 구성을 갖추고 있다. - 그럼에도 당시의 기록을 수정하지 않고 올려 본다.

 

군대에 들어와서 처음 쓰는 글이 다름 아닌 『장미의 이름』 감상문이라니, 참 기가 찰 노릇이다. 논산 육군훈련소에 있는5주 동안 과연 내가 가이드북 (이제는 그 적갈색 가까운 “갈색” 표지만 봐도 신물이 난다.) 말고도 다른 일을 해도 되는지참으로 우려스럽지만… 뺏기면 말지 뭐, 그리고 이 책이 금서도 아닌데 에코의 저서를 언급했다고 해서 영창에 끌려가지는 않을 것이다 (라고 자기 최면을 걸어 본다). 게다가 중대장이나 소대장 등의 상관이 가톨릭이 아니라면 에코의 책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 정도는 괜찮으리라. 그리고 훈련에서는 시간의 흐름을 1초 단위로 통렬하게 느낄 수 있다… 동화 기간에만 아무것도 안 하는 것 같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하루 빨리 훈련을 시작하고 싶다는 뜻은 아니다.

 

여느 감상문처럼 줄거리를 되짚으며 시작하고 싶지만, 애석하게도 내가 그 일을 잘 해낼지는 모르겠다. 왜냐, 책을 무려 5주에 걸쳐 끝냈으며, 지금 쓰는 시점으로부터 마지막 책장을 덮은지까지도 벌써 2~3주 정도가 흘러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보겠다. 에코의 책은 흥미롭게도 액자식 구성으로 돼 있다. 서론인가를 읽어 보면 과연 이것이픽션인지 논픽션인지 헛갈릴 정도다. 움베르토 에코(처럼 보이는)의 손을 빌려 드러나는 서문의 서술자는 『장미의 이름』이라는 서책 자체를 우연한 계기로 ‘발견’했다고 밝힌다. 여기서도 중세 유럽 특유의 genealogy of literature - 한국어로뭐라고 부르는지 모르겠다. 아마 문서학이나 사서학 정도로 번역할 수 있을까. - 가 여실히 드러난다. 누구의 손을 거쳐 다시 누구에게로, 이런 기록들이 빠짐없이 언급되고 - 따라서 서문으로부터조차 에코의 천재적 면모를 확연히 느낄 수 있다. - 또 매우 중요하게 다뤄진다. 그러나 에코(를 가장한 현대의 서술자)가 말했듯, 『장미의 이름』의 원본은 그를 세차게 바람맞힌 여인의 가방에 ‘또’ 우연히 담겨 그 족적을 홀연히 감춘 바, 이 소설은 엄연히 에코 그 자신의 창작물임에 틀림없다. 만약에 그러하지 못했다면, 에코는 (나의 직감상) 완벽하지 않은 설정을 도저히 용인할 수 없어 해당 소설의 집필이나출판을 아예 포기해 버렸을 것이다. 어쨌든 처음부터 상당히 독특한 서사 구조로 시작되는 이 장대한 내용의 작품은, 멜크의 노수도승(해당 서책의 집필 당시)이라고 스스로를 소개하는 아드소에 의해 전개된다. 아드소는 소설 속 사건들의 당사자인 동시에 서술자이므로 『장미의 이름』은 1인칭 관찰자 시점에 의해 전개된다. 그러나 여느 1인칭 관찰자 시점의 작품들과는 달리, 화두가 되는 사건의 시기와 집필 시기 간에 약 50년 (구체적으로는 모르겠으나, 십대 중반의 수련사가 젊은수도승들을 보며 자신의 옛시절을 추억하는 정도이니 상당한 시간차가 발생했으리라)의 차이가 있으므로 그 당시에는 가늠할 수 없었던 타자의 생각들까지 “로저 베이컨이 말한대로” 합리적으로 추론해 제 3자의 머릿속이나 당시의 정황에 대해서도 꽤나 밀도 있게 해설한다.

 

소설의 배경이 되는 시대에는 교황 요한 22세와 신성로마제국의 루트비히 황제가 교황의 세속적 권력이 합당한가의 여부를 둘러싸고 한창 대립하고 있었다. 여기에 교황이 평소 눈엣가시처럼 여기던 프란체스코회까지 가세하며 비밀의 수도원에서 황제측 사절단과 교황측 사절단이 회담을 가지기로 결정한다. 사건이 발생한 수도원은 그 배경 묘사로써 추론한 바이탈리아 서북부 알프스 산맥으로 둘러싸여 있는 사크라 디 산 미셸레 Sacra di San Michele인 듯한다. 수도원의 정체를비밀로 부친 의도는… 글쎄… 에코의 상상력을 동원해 완성한 곳인 데다가 서문에서 문자 그대로 사실주의적 색채를 부여했으므로 정확한 수도원명을 밝힐 수 없음은 당연지사였을까. 수도원…에 대해 밝혀진 것은 그것이 베네딕트회 수도원이라는 점, 그리고 구 기독교 세계에서 가장 커다란 장서관을 소유하고 있다는 점, 이것이 다이다. 베네딕트회, 시토회, 도미니크회, 프란체스코회 등 이런 다양한 교파에 대한 사전 지식이 있었다면 훨씬 더 풍부한 독서 경험이 됐을 뻔했다. <중세서양철학>을 복기했다면 충분히 이해했을 텐데, 물론 나의 선천적 게으름으로 인해 그리 하지 않았다. 프란체스코회의청빈 논쟁을 난 처음에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스도와 그의 열 두 사제들이 가난하게 살았는지, 재산을 소유했는지가 그렇게 중요한 사항이었을까. 그러나 모든 사건은 그것을 중첩하고 또 둘러싼 ‘맥락’에 주목해야 한다. 요한 22세는 역대 가장 부패한 교황이라는 평을 듣는 인물이었다. 그런 그가 그리도 프란체스코회, 그중에서도 특히 세속적 권력에 관해가장 날을 세우는 원리주의자(명칭을 까먹었지만, 우베르티노가 수장 노릇을 했던 그 분파가 맞다.)들을 왜 박멸하고 싶어했는지는 충분히 납득이 가는 대목이다. 그런데 정확히는 기억나지 않지만, 비밀의 수도원에서 열린 공식(이지만 그다지 실효성이 없는) 공의회 및 대담에서 윌리엄 수도사가 자신의 교단을 비호하며 황실 신학자들의 청빈 논쟁에 관한 견해를 전달하는 장면에서 나는 완전히 그의 논리에 설득되고 또 매료돼 버렸다. 윌리엄의 말에 따르면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강림하셨을 때도, 그리고 그 이후에도 이교도 신자들과 그들을 거느리는 이교도 왕들은 그들이 소유한 영토에서 교황이나 그리스도교 세계의 권력자의 영향 없이 그들만의 재산권과 법규를 통해 시민들을 다스려나갈 수 있었다. 그러한 사람들과 사례를 놓고도 교황이 신성로마제국의 세속권마저 지녀야 한다는 아비뇽측의 주장은 굉장히 모순적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바로 해당 사유에서 아비뇽과 뮌헨 사이에서 다시는 좁혀질 수 없는 간극이 벌어지고 말았다. 결국 『장미의 이름』은 이러한 정치적 맥락 속에서 웃음에 관한, 또 청빈에 관한 신학적 논쟁이 펼쳐지는, 사회정치적 정세와 인문학적, 신학적 통찰이 접목된 고도로 복합적인 장르 소설이다.

 

에코는 『장미의 이름』의 마지막 문장을 통해 제목의 의미와 그 자신이 소설을 통해 전파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극명하게드러낸다 - “지난날의 장미는 이제 그 이름뿐, 우리에게 남은 것은 그 덧없는 이름뿐.” 해당 시리즈를 바탕으로 최근에 제작된 TV 드라마에서는 마치 “이름”이라도 남으니 세월의 흐름을 견뎌낼 수 있다는 식으로 이 장대한 서사를 끝맺지만, 실제로 에코가 의도한 바는 그 반대이다. 마지막 문장을 정확하게 해석하는 데 가장 직접적인 단서는 그 전장에서 전개되는 ‘기호의 의의’ 대목이다. 에코는 윌리엄 수도사의 입을 통해 기호는 어디까지나 사용자에 의해 일차적으로 정의되는 인공물이며, 때로는 기호를 가리거나 돋보이게 하기 위해 또 다른 기호들이 도입되기도 한다고 밝힌다. 그렇다면 기호의 세멘틱한 측면이 사라진다면 그 기호는 더 이상 용의가 없어지게 된다. 따라서 『장미의 이름』의 마지막 구절은 수도사로 하여금 앞에 멀쩡히 놓인 서책들을 읽지 못하도록 금지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제2편이라는 제목은 알지만 그 내용은 모르는 작금의 학문계의 현실에 대해 세월이 지나 시들어 더이상 이름밖에는 남지 않은 장미와 마찬가지라고 주장한다. 알고 싶다는 욕망은 어쩌면 인간을 다른 동물로부터 차별화하는, 가장 인간다운 면모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욕망이 왜곡되거나 제한된다면, 결국 오랜 세월에 걸쳐 축적된 인류의 원대한 지식도 한낱 장미의 이름에 불과하다. 그것이 나는 에코가 가장 주요하게 강조하고 싶었던 메시지라고 생각한다.

 

감상문의 서두를 쓰면서 확신했다. 진정한 문제는 다름아닌 나의 현상태임이 분명하다. 불과   , 미국에 체류하던 때까지만 해도 술술 나오던 문장이 - 물론 내가 미문가라고 우기지는 않겠다. - 이제는 컴컴한 수도관 깊숙한 어느 지점에 정체 모를 물질이 끼어 아무리 물을 흘려 보내려 해도 오히려 역류해 버리는 것처럼, 아니  정확하게는 원래 머릿속에 존재하던 나만의 언어의 샘이 통째로 사라진 것처럼, 더이상 떠오르지 않는다.  달간의 기나긴 여행을 마치고 한가로이 여름을  때도  기미가 살짝 보였지만, 지금만큼 답답하지는 않았다. 한국어로 하나의 완전한 문장을 어떻게 만드는지 아예 잊어 버린 기분이 든다.   남짓한 기간 동안 국내 작품을  권도 읽지 못한 탓도 있을까. 그보다 군대에서의    동안 체력을 단련하는  모든 에너지를 동원한 나머지 지적으로는 그다지 자극받지 못해서 그런 것일까. 그래도 나름 기초적인 물리 역학도 배우고, 하루키의 에세이도 읽고, 김희영 교수가 정성스레 번역한 프루스트의 텍스트도 틈틈이 곱씹었는데. 그럼에도 일단 벌인 일에 대해서는 책임을 져야 하니 『장미의 이름』 조금  논하겠다.

 

어렸을 적에는  움베르토 에코를 천재라 칭하는지 의아했다. 그러나 『장미의 이름』을 통해 그에게는 천재라는 칭호가 거의 ()처럼 항상 따라 붙어도 전혀 손색없음을 절감했다. 일반적으로 지능 검사상의 수치나 이공계 연구 업적의 위상 등으로 어느 누군가의 천재성을 판단하는 요즘 세태를 따르자면 에코를 위한 불멸의 별명에 인문학이라는 수식어를 더해야  것만 같다. 이러나 저러나 나는 그와의 (간접적인) 첫만남 - 물론 그는 2016년에 작고했기 때문에 실제로 뵙기란 사후 세계가 존재한다는 가정하에 무덤에 묻히고 나서나 가능하겠다. - 에서 그의 박학다심에 탄복했다. 혹자는 『장미의 이름』을 촘촘한 구성의 추리 소설 명작으로 평하겠지만, 나는  작품의 장르적 특성은 작가가 일반 대중에의 접근성을 향상시키기 위해 택한 영리한 설정으로 판단했다. 다시 말해, 연달아 발생하는 수도원 인물들의 죽음과  배후를 추적하는 윌리엄 수도사 일행의 추리는 소설의 재미를 배가시키는 일종의 틀이다. 박완서의 말마따나 소설은 모름지기 재밌어야 하기 때문이다. 만약  작품의 주인공이 사건 발생 당시 아직은 어리숙한 수련사였던 아드소가 아니었다면, 만약 에코가 지닌 중세 유럽 철학  문헌에 관한 지식을 총망라해 기독교의  교파간의 교리 논쟁과 이단 논쟁, 그리고  나아가 지식이라는 거대한 총체를 대하는 자세를 논하는  있어  형식이 일인칭 주인공 시점 서술자의 독백에 불과했다면, 얼마나  많은 독자들이  책을  놓기만 하고 완독할 엄두도 내지 못할까. 또한, 어쩌면 『소피의 세계』같은 구성을 취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랬다면  신비스러운 중세 수도원의 구조나 각각의 등장인물이 수도원 내에서 맡은 직책  그들이 사는 공간에 관해 노년의 아드소가 기술하듯 자세히는 알기 어려웠을 것이다. 작가가  책에서 논하는 주제는 중세 유럽의 모든 것이라고 해도  만큼 방대하다. 거시적으로는 교황 요한 22세와 루트비히 황제 사이의 알력 다툼, 미시적으로는 웃음에 관한 신학적 논쟁까지  내용을 빠짐없이 일반 독자에게 전하려면 내용상의 긴장을 완화해 줄만한 형식적 장치가 필요하다. 따라서 에코는 현명하게도 추리극이라는 장르를 선택했다.

 

현대의 추리물 걸작답게 윌리엄 수도사와 그의 조수 아드소는 모든 사건의 인과관계를 철저히 따져가며 비밀의 수도원에서 연속적으로 일어나는 의문의 죽음을 해결하려 한다. 윌리엄의 출신지가 영국 바스커빌인 것도 그가 셜록 홈즈못지 않게 꼼꼼하고 분석적이며 집요한 성격의 소유자임을 암시한다. 멜크의 아드소는 신성로마제국의 고위급 장군인 아버지의 등쌀에 떠밀려 전직 이단 심문관이자 현재 - ‘당시  적합할지도 모르겠다. -  황실 사절단 대표로 이탈리아를 방문한 윌리엄 수도승을 사수로 모시며 그와 비밀의 수도원까지 동행한다. 윌리엄 수도사는 문제의 수도원에  입성하기도 전에 거기서부터 도망친  브루넬로의 행선을 멋지게 유추해 내는데, 해당 장면은 그의 스승 로저 베이컨이 주창한 자연철학적 사고의 정수라   있다. , 후에 이어지는 윌리엄 일행의 추론은 모두 브루넬로 사건이 해결된 과정과 동일한 양식을 따른다. 윌리엄 수도사는 비록 심증은 있을지라도 물증이 없다면 쉬이 결론을 내리지 않으며, 확실하다고 판단되는 증거에 기반해 가장 유력한 사건의 인과관계를 파악한다. 따라서 히가시노 게이고나 미야베 미유키  전개가 빠르게 진행되는 현대 추리물에 익숙한 독자들은 돌다리도 두들겨 보는 것으로 모자라 널돌 사이의  속까지 빤히 관찰하는 윌리엄 수도사가 답답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작품의 배경이 14세기 초반임을 상기해야 한다. 당시에는 수사의 속도를 촉진하는 도구도 없었을 뿐더러 대부분의 형사 재판이 전문적인 수사 기관에 의해 과학적으로 이루어지지도 않고 되려 초자연적 세력에 호소함으로써 판결이 결정됐다. 그러한 시대적 배경을 떠올리면 윌리엄 수도사의 사물과 사건을 대하는 태도는 대단히 선진적이다.

 

 700쪽에 달하는 추리 끝에 - 물론  안에 레미지오와 살바토레의 이단 심문이나 호르헤 노수도승과의 웃음에 관한 신학적 논쟁도 포함되지만 - 윌리엄 수도사는 여섯 명의 인물들이 어떻게, 그리고 누구에 의해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는지를 밝혀낸다. 가장 먼저 죽은 아델모는 금지된 지식,  아리스토텔레스의 금서를 얻으려고 보조 사서였던 베렝가리오에게 자신의 몸을 팔았다는 죄의식에 자결한다. 차례로 머리를 항아리의 돼지 피에다 박고 거꾸로   발견된 베난티오와 욕장에서 익사체로 발견된 베렝가리오는 모두 호르헤가 아리스토텔레스의 금서에 발라놓은  때문에 죽는다. 뒤이어 죽은 세베리노는 호르헤의 꾐에 넘어가 질투에 눈이  말라키아가 살해, 말라키아는 호르헤의  때문에 최후를 맞이한다. 마지막으로 수도원장 역시 호르헤에 의해 죽는데, 그는 에크퓌로시스 직전에 장서관의 <아프리카의 >으로 올라가다가 밀실에 갇혀 숨이 끊어진다.

 

일련의 살인 사건을 종합하자면, 수도원 내의 비극은 결국 지식을 향한 호르헤 노수도승의 그릇된 신념으로 인해 벌어졌다. 그리고  모든 것을 윌리엄 수도사는 <아프리카의 >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던 호르헤 노수도승 앞에서 조목조목 추리해 낸다. 그곳에서  인물은 세간에 영원히 소실됐다고 알려진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2권을 놓고 치열하게 대립한다. 작품 속에서 만날 때마다 상반된 견해로 인해 갈등을 빚는 윌리엄과 호르헤는 사실  자체로 상반된 의미의 기호들이다. 윌리엄은 안셀무스, 아벨라르두스, 그리고 아퀴나스로 이어지는, “성서가 우리에게 <스스로 결정하라> 여지를 남겨둔 문제에 관해서는 우리의 이성을 발동하고자 하는 움직임을 표상한다 (219). 그의 투철한 경험주의적 자연철학관은 훗날 흄에 의해 집대성된다. 그러니 윌리엄 수도사는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길목에서 새로운 시대를 향해 양팔을 넓게 벌린 신세대 신학자들을 대변한다. 반면에 호르헤는 여전히  아우구스티누스의 가르침대로 정통 기독교 계열이 아닌 서적에서는 수사학적 가치밖에 발견할  없다는 입장을 고수하는 구세대를 대표한다. 윌리엄과 호르헤의 극명한 견해차는 웃음에 관한 그들의  번째 논쟁에서 뚜렷이 드러난다. 호르헤가 웃음은 해악이라는 본인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정신이란, 진리를 묵상할 , 선행을 기뻐할 때만 온전한 이고 진리와 선행은 웃음의 대상이   으며 그리스도께서 웃지 않으신 것은  때문 데다 웃음은 의혹을 일으킬 이라고 말하자 윌리엄은 허나 때로는 의혹도 약이 되는 수가 다고 받아친다 (219). 우선, 성서에 그리스도가 웃으셨다는 언급이 없기 때문에 웃음은 ()   없다는 믿음은 지나치게 문헌에 의존하고, 기록을 문자 그대로, 일차적으로밖에 소화해 내지 못한 결과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러한 견해가 당대의 주류를 이루고 있었으며, 그러한 폐쇄적인 태도야말로 중세를 문명의 암흑기로 만드는  가장 크게 기여했다. 반면에 당연히 진리로 수용되는 것에도 의혹을 품어 봄직하다는 윌리엄의 의견은 흡사 3세기나 지난 다음에야 대두되는 데카르트의 회의주의를 상기시킨다. 자명한 원리가 규명될 때까지 뭐든지 의심하고 관찰함으로써 객관적 근거를 확보하려는 그의 태도는 의혹이 일면  권위자를 찾거나, 아버지에게 묻거나, 박학한 사람에게 도움을 하면 의혹은 사라 것이라는 호르헤와 확연히 대조된다 (219).

 

윌리엄과 호르헤의 대립은  인물의 대화를 통해서 직접적으로 나타나기도 하지만, 『장미의 이름』 전반에 걸쳐 간접적으로 암시된다. 예를 들어, 웃음 논쟁에서 각자 주요하게 사용하는 논법에도 차이가 있지만 - 그러나 윌리엄의 경우, 호르헤를 포함한 당대 지식인들과 마찬가지로 선대 신학자들의 성서 해석에 주석을 달거나 그를 인용하는 방식도 자주 활용한다. - 웃음이라는 수사학적 대상 자체에 대한 접근도 상이하다. 어쩌면 근본적으로는  또한 논법의 차이에서 연유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텍스트를 문자 그대로 이해하고자 하는 호르헤와 달리 윌리엄은 텍스트를 포함해 세상의 모든 사물을 각각의 고유한 기호로 조명하기 때문이다. 채식사였던 아델모가 성서의 시편〉 난외에 자그맣게 남긴 우리의 오감에 버릇 들여진 것과는 정반대인,” “마치 진짜 이야기와 가짜 이야기의 경계선에  있는 , 정체 불명의 놀라운 풍자를 통해, 진짜 이야기의 세계와 우주가, 거꾸로 뒤집어진 터무니없는 세계와 맞닿아 있는 듯한 그림들과 성무 일과서의 베이브윈 테두리 그림을 보고 아드소와 사서실 내의 다른 수도사들은 웃음을 금치 못한다 (133). 그런데 이를 두고 호르헤 수도사만은 공허한 , 웃음을 유발하는 언사를 입에 올리지 말지어다 (Verba vana aut risui apta non loqui).”라며 호통친다 (134).  웃음을 유발하는 언사는 성서에서 우리가 미처 눈치채지 못한 부분에 관심을 주목시킬  있겠지만, “<페르 스페쿨룸>(형상으로)이든, 수수께끼로든 괴물과 기물을 [계속] 그리는 사람은  자기가 그런 기괴한 것들을 즐기게 되고 급기야는 오직 이러한 것을 통해서만 사물을 보게 된다는 이유에서다 (139). 이와 달리 윌리엄 수도사는 아레오파고의 재판관이 가르치고 있듯이, 하느님께서는 가장 왜곡된 것을 통해서도 영광을 드러내신다고 주장한다 (139). , 그는 비유와 은유, 그리고  나아가 유비와 역설로써도 가장 위대한 진리가 표현될  있다고 긍정한다. 이는 하느님의 영감에 의해 쓰여진 작품"  비유를 제외한 다른 모든 비유는 "거짓을 전하거나 쾌락을 좇기 위한 것이라는 호르헤의 관점과 정반대다 (184).

 

비유와 유비를 엄연한 논증법으로 받아들임은  세계를 기호로서 이해함을 뜻한다. 보통 하나의 기호에는 세상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약속한 화용론적 의미가 한정된 가짓수로 간추려진  깃들어 있지만, 그럼에도  기호가 포괄할  있는 의미는 무궁무진하다. 그렇기에 윌리엄 수도사는 이단 심문관이라는 자신의  직책에 회의를 느낄 수밖에 없었다. 성서의 원문은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불변하겠지만, 그에 대한 해석은 시간과 장소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애당초 그렇기에 같은 하느님을 모시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누군가는 베네딕트회, 누구는 프란체스코회,  누구는 시토회를 따르는 것이 아닌가. 아비뇽은 프란체스코회, 그중에서도 특히 우베르티노를 필두로 하는 엄격주의파의 청빈 사상을 강하게 부정하지만, 과연 교황청 해석이라고 절대적 진리마냥 수용해도 되는 것일까. 청빈 논쟁이 그토록 오랫동안, 그리고 강렬하게 지속된 것으로 보아 당대 사람들도 성서라는 기호에 관해 다양한 해석이 도출될  있음을 인정한 듯하다. 특히 윌리엄 수도사는 대부분 평신도들로 구성된 이단의 정당성에 관해 묻는 아드소에게 세상에 거울이 있으려면 먼저 세상이 모습을 얻어야  이라고 답함으로써 신학에 있어 절대적 진리는 결코 민중이라는 불규칙한 자연 - 일종의 유비다. -  무관할  없다는 주장을 간접적으로 피력한다 (198). , 흔히 말하듯 수도원이 ‘speculum mundi (세상의 거울)’라면, 수도원에 앞서 먼저 세상이 존재하며,  세상은  민중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윌리엄 수도사가 이단의 존재 가능성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우주라고 하는 것이 아름다운 까닭으로 통일된 가운데서도 다양하기 때문일 수도 지만 동시에 다양한 가운데에도 통일된 하나의 법칙이 있기 때문이라는 로저 베이컨의 사상에 충실하게 그는 무질서한  같아도 나름대로 절실하고 온당한, 단순한 평신도들의 필요를 수렴 기독교라는  강의 흐름을 지속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39, 334). 만약 세상을 성서에 쓰인대로 읽으려 하는 호르헤 수도사가 이러한 말을 들었다면 필시 그는 격노했으리라. 또한, 기호로써 세상을 인식하는 윌리엄의 태도는 궁극적으로 지식을 탐미하지만 소유하려 하지는 않는 그의 열린 마음가짐으로 연결된다. 하나의 기호가 품은 기의에는 한계가 없기에 우리는 알아야 하는 ,   있는  안주하지 않고   있었던 , 알아서는 안되는 것까지 알아야” “진정한  거둘  있다 (165). 

 

보에티우스 사망 이래 라틴기독교 문명에서는 한동안 눈앞을 가릴만큼 컴컴한 신앙의 시대가 펼쳐졌다.  과정에서 지식을 향한 우리의 본능적 사랑,  알고자 하는 마음은 여러 방향으로 통제되고  왜곡됐다. 정도(正道) - 어쩌면 그것을 발견하기까지 앞으로도 수천 년이 걸릴지도 모르는 -  걸어야 한다는 부담에 보물 같은 장서관을 보유했던 수도원은 적어도    동안 수도사란 사자실에서 무엇을 쓰고 무엇을 읽든 하나도 틀림이 없이 하겠다는 명목하에 사서  명이  필요한 서책이라고 판단한 것들만 읽게  주어야 했다 (71). 지식은 과연 누구에 의해 창조되고, 누구에 의해 관리되며,  누구를 위한 것인가. 어떤 지식이 바람직한 것인가. 이러한 인식론적 질문들은 필연적으로 당대의 권력에 취약할 수밖에 없으며, 그렇기에 에코는 아비뇽 교황청과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서유럽에 대한 지배권을 두고 갈등하던 시기를 선택했을 가능성이 높다. 마지막으로 지난날의 장미는 이제  이름뿐, 우리에게 남은 것은  덧없는 이름뿐 (Stat rosa pristina nomine, nomina nuda tenemus)”이라는  책의 아름다운 마지막 문장에 대한 에코의 간접적인 해설을 소개하며 감상문을 맺겠다: 서책의 선은 읽혀지는  있다. 서책은 하나의 기호를 밝히는  하나의 기호로 되어 있다. 기호는 이렇게 모여서  사상의 모습을 증언하는 게다. 이를 읽는 눈이 없으면 기호르 쓰여진 서책은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 따라서 그런 서책은 벙어리나 다를 바가 없다.  장서관은 원래 서책을 보관하기 위해 만들어진 모양이다만 이제는  서책을 묻어 버리고 있구나."

 

자, 강을 생각해 보아라. 단단한 땅, 튼튼한 제방 사이를 오래오래 흘러가는 강을…… 어느 시점에 이르면 흘러가는 강은 기진한다. 너무 오랜 시간 너무 넓은 공간을 흘렀기 때문이요, 마침내 바다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이로써 강은 죽음을 맞는다. 죽음을 맞기 때문에 강은 더 이상 제 존재를 느끼지 못한다. 즉, 강의 고유성은 여기에서 끝나는 것이다. 바로 이곳에서 강은 강 자체의 삼각주가 된다. 주류는 남을지 모르나 지류는 사방으로 흩어진다. 혹 어떤 흐름은 흐르기를 계속하고, 혹 어떤 흐름은 다른 흐름에 휩쓸리나 어느 흐름이 어느 흐름을 낳고 어느 흐름에 휩쓸리는가는 아무도 모른다. 어느 것이 여전히 강이고 어느 것이 이미 바다가 되었는지 아무도 모르는 것이다.

 

움베르토 에코. 『장미의 이름』. 이윤기 옮김, 열린책들, 19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