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베르 카뮈, <시지프 신화>
카뮈 열풍이라도 부는 것일까. ‘근래’의 범위를 어떻게 단언할 수 있겠냐만, 만약 10년을 한 단위로 친다면 우리나라에는 엄연히 카뮈 열풍이 불고 있다. 어느 서점에 가도 알베르 카뮈의 소설이 스테디셀러 책장의 첫 번째 혹은 두 번째 선반에 놓여 있는 모습이 보인다. 인터넷 도서 랭킹 중 문학 분야에서도 그의 책 두세 권이 항상 순위권 안에 들어 있다. 대표적으로 『이방인』과 『페스트』. 그야말로 시대의 아이콘이 아닐까 싶을 정도다. 개인적 차원에서도 카뮈는 낯선 이름이 아니다. 고교 시절 『이방인』의 첫 문장으로 번역의 한계 및 각 언어가 고유의 정서를 지녔음을 배웠고, 『페스트』는 한국문학 심화 과정의 2학년 1학기 탐구 도서로 선정돼 몇몇 친구들이 한동안 열심히 들고 다녔다. 애석하게도 나와 카뮈라는 이름의 만남은 딱 거기까지였다. 지금 돌이켜 보면 당시 선생님께서 『페스트』와 『죄와 벌』을 같은 학기에 배치하신 선택이 꽤 의도적으로 느껴진다. 카뮈와 도스토예프스키는 인간의 부조리한 운명에 맞서 각기 다른 결론을 도출한다. 근대성을 발판 삼아 공통된 문제의식을 가지고 발견한 우리의 태생적 비극을 상반된 방향으로 풀어 나갔기에 두 작가는 IB에서 그토록 사랑하는 비교 에세이에 완벽하게 적합한 절묘한 한 쌍을 이룬다. 이런 이야기를 나는 전에 들은 적이 있다. 나보다 앞서 카뮈를 접한 중학교 친구가 같이 식사하면서 말해 주길 『이방인』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시지프 신화』라는 에세이집도 읽어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카뮈는 도스토예프스키라는 작가의 결론을 부정한다고 덧붙였다. 그 친구와 나는 서로 정반대의 상황이었다. 그는 C는 알고 D는 몰랐지만, 나는 D를 알고 C를 몰랐다. 『죄와 벌』의 감동이 완전히 침식되기 전이었기에 내가 발끈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네가 직접 D를 접하면 무신론자도 기독교인으로 귀의하게 만들 그 대작의 위엄을 깨달을 것이라고 장담했다. 그러나 나 스스로 『시지프 신화』를 읽은 지금, 카뮈가 도스토예프스키를 위대한 작가라고 찬양했음에도 불구하고 영성 가득한 러시아식 결말을 논리적 ‘비약’으로 간주했던 이유를 알 것만 같다.
『시지프 신화』는 「부조리의 추론」, 「부조리한 인간」, 「부조리한 창조」, 그리고 「시지프 신화」의 총 네 장으로 구성돼 있다. 각 장의 제목에서 드러나듯 카뮈는 모든 에세이를 통틀어 단 하나의 주제, 즉 부조리를 심도 있게 다룬다. 그러나 여느 에세이와는 달리 작가의 사상, 혹은 그의 의도를 반영해 단순히 ‘그가 그리고자 하는 바’로 바꿔 부를 수 있는 것을 이해하려면 목차 순으로 읽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앞 장의 결론이 고스란히 다음 장의 서론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만약 카뮈 특유의 은유적 표현 속에 압축된 내용을 간파할 수 있다면 큰 어려움 없이 자유롭게 독서할 수 있겠다. 하지만 그러한 독자는 필시 니체 또는 사르트르 같은 ‘사상가’의 텍스트를 사전에 접해 봤을 가능성이 높다. 나만 해도 『시지프 신화』를 읽기 전에 알베르 카뮈라는 한 인간이 어떠한 사상적 풍토의 영향 아래 성장했는지 조금이나마 파악하고 싶어서 그의 고등 및 대학교 스승으로 알려진 장 그르니에의 『섬』을 먼저 완독했음에도 불구하고 내용을 일차적으로 소화하는 데 애먹었다. 심지어 『섬』은 한 번 쭉 읽고 다시 보려고 했지만 시간 관계상이라는 얄팍한 구실로 여전히 책상 한 구석에 놓여 있다. 여하튼 중요한 점은 각 에세이를 순서대로 읽다 보면 어느 순간 내용이 정리되면서 수필집과 동명인 마지막 장에 이르러서는 카뮈의 글쓰기에 탄복하게 된다. 그만큼 「시지프 신화」에서는 부조리에 관한 저자의 결론이 신화적 모티프를 통해 응축돼 나타난다. 여섯 쪽밖에 안 되는 짧은 분량의 장이 수필집에 실린 글 전체를 대표하게 된 계기도 그것이 일종의 요약본의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제1장에서 부조리의 개념, 그리고 그 현상을 규명하고 묘사하는 데 이어 실존주의 철학자들이 부조리에서 출발해 각자 다다른 서로 다른 궁극점의 한계를 분석할 뿐만 아니라 카뮈 자신이 부조리로부터 도출한 세 가지 결론을 일목요연하게 설명했다면, 제2장과 3장에서는 그러한 부조리의 개념에 충실한 삶의 방식으로서 몇 가지 사례를 검토한다. 마지막으로 작가는 가장 완벽한 형태의 부조리한 인간상을 고대 신화에 등장하는 시지프스라는 인물—혹은 신—에게 대입해 설명함으로써 글을 맺는다. 비록 본인은 첫 에세이의 서론에서부터 “부조리의 감성”을 “묘사”할 뿐, 이론을 설명하는 등의 철학적 시도는 의도하지 않는다고 밝히지만, 일반 독자의 입장에서 이 책은 문학 장르로서 수필보다도 오히려 학문적 텍스트에 가까워 보인다 (13, 14). 솔직히 데카르트나 칸트의 저서에 비하면 논리의 흐름이 철두철미하지는 않다. 몇몇 명제—예를 들어, 철학자가 존경 받으려면 마땅히 자신의 주장을 실천해 보여야 한다는 니체의 주장—는 추가적인 논증 없이 당위로서 받아들인다. 그럼에도 카뮈는 글의 성격을 어떠한 현상을 가감없이 서술하는 에세이로 공공연히 규정함으로써 애초에 논리의 제약으로부터 스스로를 해방한다. 게다가 그의 주제인 부조리의 본질을 고려하면 그러한 선택은 더욱이 현명하다. 카뮈에 의하면 부조리는 모든 것을 이성적으로 이해하고자 하는 인간의 열망과 세계의 비합리성 사이에 빚어지는 갈등이다. 따라서 부조리의 개념은 선험적으로 “거의 언제나 이성적으로 통제할 수 없는 그 무엇”이고, 또 그렇기에 그에 관한 탐구는 증명 따위의 방법이 아닌 기술(記述)로밖에 이루어질 수 없다 (18). 그럼에도 민음사의 〈세계문학전집〉 표제를 달고 있기에 누군가는 — 당연히 나를 포함해 — 『시지프 신화』가 과연 카뮈의 ‘소설’인 『이방인』이나 『페스트』만큼의 문학성을 지니는지 의문을 품기에 충분하다.
지금부터는 책의 목차순으로 내용을 정리 및 요약하려 한다. 한 가지 주의할 점이라면, 나는 「프란츠 카프카의 작품 속에 나타난 희망과 부조리」라는 제목의 부록과 작가 연보까지만 보고 김화영 교수의 해설은 넘겼기 때문에 여기의 해석은 문자 그대로 자의적이다. 물론, 나 나름대로 카뮈가 이 대목 혹은 저 대목에서 이러한 이야기를 펼치는 이유가 뭘까 고민하면서 읽었기 때문에 날 것의 제멋대로인 감상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여담이지만, 해설은 약간의 오기로 건너뛰기도 했고, 텍스트를 두 번째로 읽으면서는 주석을 단 덕분에 굳이 해설을 참고하지 않더라도 부조리 사상을 ‘대략’ 이해할 수 있었다. 그렇다, 민음사에서는 항상 정성스레 해설까지 제공하지만, 불성실한 독자인 나는 납득할 수 없을 정도로 난해한 글만 아니라면 스스로 만족해 버리는 것이다. 아무튼, 제1장인 「부조리의 추론」은 또다시 네 개의 에세이로 나뉜다. 그중 가장 첫 번째 글인 〈부조리와 자살〉에서 카뮈는 대뜸 자살을 문제시한다. 그는 자살이야말로 유일하게 “참으로 진지한 철학적 문제”이며 그 행위 자체가 “삶의 의미”를 묻는 철학의 근본 문제에 답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15, 16). 처음에는 뜬금없게 들리더라도 그는 앞서 언급한 니체의 명제를 근거로 제시하여 자살을 단순히 사회적 현상으로 치부하는 세태에서 탈피할 필요성을 제기한다. 즉, 사상의 실천성이야말로 그것의 위상을 판가름하는 기준일텐데, 그렇기에 인간의 생사를 결정짓는 사안이 가장 중요하다고 그는 외친다. 그러면서 그러한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오직 두 가지 방법으로 라플라스의 사고방식, 즉 자명함과 돈키호테의 사고방식, 혹은 감정의 고양을 소개한다. 다시 말해 카뮈는 철학에서 전통적으로 사용하던 방법론을 부정함으로써 선현들과는 확연히 다른 관점의 세계관을 암시한다. 이는 그의 사유에 고유한 특성을 부여함과 동시에 부분적으로는 논리적 결함을 일으킨다 — 특정 명제의 검증 없는 차용에 대한 또 다른 예시가 되겠다. 왜 자명함과 감정, 이 두 방법으로밖에 자살을 논의할 수밖에 없는가. 카뮈는 애시당초 논증을 포기했으므로 그에게 입증 책임을 지우기는 어렵다. 그러나 “삶을 직시하는 명철한 의식에서 빛의 세계 밖으로의 도피로 인도하는 이 치명적 유희”라는 자살의 정의를 고려하면 자명함과 감정이 필수불가결한 방법임을 유추할 수 있다 (18). 여기서 말하는 빛의 세계란 곧 우리가 살아가는 현상적 의미의 세계를 뜻한다. 추후 〈부조리의 자유〉에서도 강조되지만, 사실 작가에게 현상이라는 개념은 말장난에 불과하다. 세계는 우리에게 보이는 그대로 존재할 뿐, 플라톤의 이데아나 종교적 내세처럼 관념적인, 보다 순수한—혹은 그렇다고 믿고 싶은— 세계 따위는 ‘자명하지 않은 것이기에’ 성립하지 않는다. 따라서 ‘빛의 세계 밖으로의 도피’란 죽음을 가리킨다. 자살의 정의에서 카뮈는 해당 행위에 우연은 단 한 움큼도 섞일 수 없음을 명시한다. 자살이란 결국 더이상 삶을 감당할 수 없을 때, 라플라스적 혹은 돈키호테적으로만 접근 가능한 부조리에 개인이 압도됐을 때 내리는 최후의 결단이다.
그렇다면 저자가 자살을 통해 실질적으로 다루고자 했던 문제란 다름아닌 부조리였다. 여기서 몇 가지 의문이 떠오른다. 과연 자살만이 부조리의 감정을 해결하는 유일한 방법인가? 만약 부조리의 감정을 느낀다면 누구나 다 자살해야 하는가? 카뮈는 아니라고 답한다. 첫 번째 질문은 보류하고 일단 두 번째 질문부터 살펴 보자면, 두 가지 이유로 인간은 부조리를 자각하더라도 삶을 지속할 수 있다. 첫째, “죽음을 향하여 우리를 재촉해 가는 이 경주에서 [육체가] … 돌이킬 수 없는 우위를 점하고 있기” 때문이다 (22). 대부분의 범인들이 이 경우에 해당한다. 카뮈의 관점에서 미래는 필연적 파멸과 동의어다. 그것이 자연적이든 인위적이든 인간의 목숨은 한정됐고, 따라서 우리의 정신이 그 끝을 향해 매일 새로운 목적과 그 실천을 기획해 나가는 일은 부조리하다. 그럼에도 우리는 끊임없이 미래에 대한 희망을 안고 살아가는데, 그 까닭은 ‘살아있기를 갈망하는' 육체가 적어도 일상에서만큼은 의식을 습관으로 길들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많은 이들은 부조리의 존재조차 알아차리지 못한 채 ‘즐겁게’ 사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가끔 의식이 육체의 힘을 초월해 개인에게 부조리를 인식하게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칠흑 같은 밤의 끝은 자살일 수밖에 없지 않을까. 아니다, 우리는 자살을 피할 수 있는 두 번째 방법을 이미 안다. 바로 (거짓) 희망 품기다. 카뮈 이전의 실존 철학자들과 현상학자들이 이러한 통로를 걸어 부조리에서 멀어지는 듯했다. 그들뿐만 아니라 위대한 작품들의 창조자들 역시 부조리를 간파했으나 궁극적으로 희망이라는 흰 물감으로 별 하나 없는 밤하늘을 칠함으로써 자살의 非필연성을, 인간 삶의 유의미함을 역설했다. 이에 대해서는 제4장 「부조리한 창조」 중 도스토예프스키의 세계관을 집중적으로 조명한 〈키릴로프〉에서 더욱 자세히 다뤄진다. 세계의 부조리함을 인정하더라도 내게는 현세에서 이룰 수 없는 소중한 가치, 그것을 실현하는 과업이 주어졌으므로 꿋꿋이 살아야 한다. 하지만 카뮈에게 이는 가장 극악한 회피이며 “속임수”에 지나지 않는다 (22). 그에게 내세란 자명함의 원리에 어긋나는 위희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는 인간이 부조리를 자각하더라도 일반적으로 자살하지 않는 이유 두 가지 중에서도 특히 후자를 “무사태평함, 마음의 졸음 또는 치명적인 체념이 주는 이 독약이 든 평화”라고 비판하며 이렇게 부조리의 논고 중 가장 첫 장을 마무리한다: “집요함과 통찰이야말로 부조리와 희망과 죽음이 서로 응수하며 벌이는 비인간적 유희를 구경하는 특권적 관객들이다” (40, 25).
앞장에서 자살로부터 출발해 부조리의 문제가 대두되고 그 철학적 위상 및 방법론이 언급됐다면, 뒤따르는 〈부조리의 벽〉과 〈철학적 자살〉에서는 부조리의 성격이 규명되고 그동안 해당 딜레마를 해결하려 했던 사상적 흐름이 추적된다. 먼저 두 번째 글의 제목에 주목하자. 뜬금없이 어떤 벽을 가리키는 것일까. 이는 카뮈 특유의 은유적 표현 중 하나로, 인간이 처한 — 사르트르의 용어를 빌리자면 던져진(projected) — 숙명을 나타낸다. 그 운명이 무엇인지는 〈부조리와 자살〉만 읽고도 충분히 가늠되겠지만, 카뮈는 보다 명확한 담론을 위해 부조리의 핵심인 상대성부터 설명한다. 〈부조리의 벽〉은 또 다시 감정에 대한 간단한 논의로 시작된다. 저자에 따르면 “큰 감정들은, 그것들 자체가, 찬란하거나 비참한 그것들의 세계를 동반한 채 돌아다니는 법이[고] 그 감정들은 그것들 자체의 열정으로 하나의 독자적 세계에 빛을 던짐으로써 그 세계에서 그 특유의 풍토를 되찾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부조리의 감정이다 (26). 마치 아리스토텔레스가 행복을, 아우구스티누스가 지복을 인간의 궁극적 목적으로 분류했듯 부조리 역시 그 정도의 층위를 차지한다. 다만, 두 고대 철학자가 내세적 차원의 감정을 ‘모험의 끝’으로 설정하고 거기 도달하기 위한 방법을 체계적으로 제시하는 반면, 카뮈는 부조리의 감정이란 “확실하게 존재”하지만 막연하고, 아무 때나 들이닥칠 수 있으며, 본질적으로 콕 집어 규정할 수 없는 비합리적 개념임과 동시에 그로부터 인간이 비로소 인간다울 수 있는 철학이 ‘시작’된다고 말한다 (27). 부조리의 감정에 대해서조차 절대성의 개입을 거부함으로써 작가는 이 세상이 플라톤의 그림자 세계일 가능성을 인정하면서도 진리의 다원성을 주장한다. 이러한 부조리의 감정은 권태 또는 (역설적이게도 세계를 향한) 관심, 세계의 두꺼움과 낯섦, 그리고 죽음의 공포로부터 잉태된다. 내 눈 앞의 세계에 익숙해지려는 찰나 느껴지는 몽롱한, 형언할 수 없는 느낌. 이미 옳다고 받아들였는데도 여전히 말이 안 되는 것 같은 찝찝함. 조용히, 그러나 갑작스럽게 부유하는 생경함. 개인적인 비유를 들자면, 평소에는 ‘사랑’이라는 단어를 아무렇지 않게 사용하다가도 ‘사랑’만 반복해서 말하다 보면 이런 단어가 정말 있을까 싶은, 그러나 그러한 고민의 대상이 바로 미래와 죽음으로 심화되는 경우가 아닐까. 그렇다면 부조리의 감정을 인간은 어떻게 수용해 왔는가. 이 부분을 논하기에 앞서 이성과 지성, 즉 인간이 세계를 인식하는 두 가지 방법의 차이를 논해야 한다. 이성, 즉 “이해한다는 것은 무엇보다 먼저 통일한다는 것”이며, “친숙함에 대한 요구”와 “분명함에의 갈망”은 인간 정신이 부정할 수 없는 원초적 본능이다 (35). 다시 말해, “인간의 입장에서 세계를 이해한다는 것은 그 세계를 인간적인 것으로 환원시켜서 거기에 인간의 낙인을 찍는 것”이다 (35). 반면에 “진실과 허위를 구별”하기를 최우선 과제로 삼는 지성은 이성의 무한 인간화 계획에 당당히 반기를 든다 (34). 단적으로 우리네 사유에 관한 사유에서부터 참과 거짓을 가르기 어려운데 어떻게 드넓은 이 세계를 모조리 인간의 시야에서 바라보고 통일할 수 있겠는가. 쉽게 말하자면, 이성은 세계가 합리적이며 그렇기에 모든 것을 분명하게 밝힐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지성은 이 세계가 근본적으로 부조리함을 끝내 부정하지 못한다. 당연히 카뮈에 의하면 만능 이성주의를 타파하고 지성으로써 세계를 인식해야 하며 — 혹은 육체적, 육감적으로 받아들여야 하며 — 바로 그러한 이성과 지성의 충돌에서 부조리가 발생한다. 즉, “이 세계 자체는 합리적이지 않[고,] 이것이 우리가 말할 수 있는 전부[지만] 부조리한 것은 바로 이 비합리와 명확함에 대한 미칠 것 같은 열망의 맞대면”이다 (41). 부조리는 세계의 특성이 아니다. 그것은 세계와 개인이 관계 맺음으로 인해서, 오직 상대적으로만 존재할 수 있다. 만약 세계와 개인 둘 중 하나가 소멸한다면 자연스럽게 부조리 역시 사라진다. 따라서 자살은 부조리의 해결책이 될 수 없다. 자살은 개인이라는 필수항을 삭제하므로 딜레마 자체를 차단해 버린다. 마치 암 환자에게 적절한 치료법이 없으니 차라리 안락사에 동의하면 암으로 고통받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는 것과 동일하다.
카뮈는 “통일을 향한 호소와 자신을 속박하는 벽들의 존재에 대한 명확한 인식 사이에서 분열된 인간의 본질적인 열정”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을 끝없는 사막을 걷는 행위에 비유한다 (43). 그리고 그 사막에서의 생존법을 놓고 그보다 앞서 같은 고민을 공유했던 철학자들의 결론을 각각 검토하기 시작한다. 먼저, 하이데거에게 있어 실존은 굴욕적인 것이며, “유일한 현실은 … 바로 여러 존재들의 모든 차원에서의 관심(souci)”이다 (44). 여기서 관심이란, 세계의 부조리성을 감추는 위희의 장막을 들춰내는 유형의 것(shrewdness)으로 해석한다. 그러한 전방위적 관심을 가짐으로써 우리는 실존 “그 자체의 모습”이면서 “명철한 인간의 항구적 풍토”이기도 한 불안에 도달하며, 비로소 “폐허의 한복판에서 자신의 길을 찾”게 된다 (44, 45). 제대로 이해했는지는 의문이지만, 에세이에 언급된 그 어떤 사상가들보다도 하이데거가 카뮈와 가장 비슷한 색의 결론에 이른 듯하다. 하이데거 다음으로 카뮈는 야스퍼스와 셰스토프, 키르케고르를 차례대로 분석한다. 야스퍼스와 셰스토프 모두 부조리의 존재를 인정하지만, 그들의 해결책은 카뮈가 그토록 멸시한 ‘회피’였다. 심지어 그들은 부조리를 해결하는 돌파구에 어떠한 신을 배치하여 합리주의적 전통에서 키워낸 회의의 결말을 종교적 색채로 물들여 버린다. 인간의 드라마는 절대에 대한 향수, 비합리적 세계, 그리고 그 둘 사이에 존재하며 동시에 양자를 결합하는 매개체로서 기능하는 부조리의 “삼위일체”로 정의되는데, 야스퍼스와 셰스토프는 인간의 이성을 기꺼이 포기하여 삼위일체의 원칙을 위반한다 (54). 키르케고르 역시 비슷하다. 키르케고르의 사상에 관해서는 완전히 무지한 나이기에 그에 대한 카뮈의 비판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지만, 적어도 우리의 작가는 키르케고르가 여느 철학자들과는 달리 몸소 부조리를 실천하며 살았기 때문에 특별하다고 평가한다. 다만, 그 역시 부조리를 파괴하지 않고 그 자체에 몸소 부딪히며 살아갈 수 있게 하는 끈기와 집요함을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저버리고 가장 종교적인 해결책인 기독교의 신으로 돌아섰기 때문에 패배자에 불과하다. 하이데거에서 키르케고르에 이르는 실존 철학자들은 이처럼 부조리를 발견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이성을 매몰차게 평가절하함으로써 삼위일체로서의 부조리를 해체시켰다. 한편, 후설을 위시한 현상학자들은 이성을 대체할 세계의 인식 수단으로 “자신의 의식을 인도하여 생각 하나하나, 영상 하나하나를 프루스트처럼 특권적 장소로 만”들기를 제안한다 (47). 이성의 한계를 인정하고, 단 하나의 이데아 및 절대자를 상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현상학자들은 이전 세대의 실존 철학자들보다 한 단계 나아갔지만, 부조리를 맞이하는 진정한 자세를 갖추었다기에는 여전히 모자라다. 지금도 열심히 『잃어버린 세계를 찾아서』를 읽는 중인 독자로서 ‘프루스트처럼’ 인식하기란 곧 알랭 드 보통이 『How Proust Can Change Your Life』에서 적절하게 인용한 “내 모든 삶이 곧 문학이었다”라는 작가의 선언과 공명한다고 생각한다. 개개의 사물 자체에 저마다의 빛이 담겨 있기 때문에 이성으로 다 파악할 수 없는 우리네 세상의 다면성을 포옹할 줄 알아야만 일종의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고 후설은 주장한다. 그렇지만 카뮈의 눈에 그러한 후설의 ‘지향(intention)’은 묘사, 기술, 열거, 고찰로 대표되는 사유의 심리학적 측면과 분석, 이해 등의 형이상학적 측면 사이를 줄다리기하며 각 사물에 고유한 물자체가 이 세계에 무수하게 존재한다는, 이데아 철학의 다각화로밖에 비춰지지 않는다. 진리가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라고 주장하는 꼴이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부조리의 삼위일체 중 세계의 비합리성을 부정하게 된다. 종합해서, 카뮈 이전의 사상가들은 삼위일체로서의 부조리를 보존하면서도 ‘해결’하기는 커녕, 세 가지 요소 중 하나를 제거하여 그들이 애써 발견한 부조리의 성격을 변질시켜 버린다. 즉, 그들은 실제로 자살하지는 않았지만, 철학적으로 자살을 청한다.
비합리와 인간의 향수 그리고 그 두 가지의 대면에서 솟아나는 부조리, 이것이 바로 한 실존이 감당할 수 있는 모든 논리와 더불어 필연적으로 끝나게 되어 있는 드라마의 세 등장인물이다.
선대의 노력이 모두 물거품이었다면, 부조리의 추론에 있어서 카뮈는 어떠한 결론에 도달했을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자명함에의 끈기(라플라스)와 인간의 육감(돈키호테)만이 인간에게 남은 마지막 길이라는 점이다. 카뮈 역시 라플라스와 돈키호테적 방법에 충실하며 〈부조리의 자유〉에서 부조리에 관한 세 가지 귀결을 선보인다. 첫째, 부조리의 인간은 반항한다. “항상 새로워지고 항상 긴장을 유지하는 항구적인 의식”을 통해 부조리를 계속해서 인식하다 보면 “그토록 명백하고 그토록 정복하기 어려운 부조리는 한 인간의 삶 속으로 되돌아와 그의 고향을 되찾는다” (80~81, 81). 카뮈는 묻는다. 그러한 절망의 사막에서 인간은 과연 구원을 호소하지 않고 살 수 있는가? 이에 실존 철학자들은 가망이 없다고 판단하고 불분명한 신의 품 속으로 비약하고서는 오로지 부조리만이 자명하다는 의식에 유죄를 판결한다. 그러나 “신은 죽었다”라고 공언한 니체만은 반대로 자신의 명철한 의식이 유죄라고 생각하지 못하는 죄의식의 부재로부터 “모든 것이 허용된다”고 외친다 (82) —사실 여기서 두 번째 귀결이 암시된다. 카뮈는 자의적이지만, 나름 삼단논법에 의거해—이성의 활동 영역을 그토록 제한해 버린 그이지만— 논리적으로 구원 없이 살아가는 인간의 가능성을 그려낸다. “어떤 경험, 어떤 운명을 살아낸다는 것은 그것을 남김없이 받아들인다는 것”이라고 가정하면[1], 우리의 인생은 타고나길 부조리하므로[2] “항구적인 혁명이라는 주제는 개인적 경험 속으로 옮겨”져 오로지 반항, 즉 “깔아뭉개려 드는 운명에 대한 확인 그러나 그에 따르기 마련인 체념을 거부하는 확인”만이 항상 일관적인 철학적 태도이게 된다[3] (83, 83, 84). 따라서 우리가 인간이기 위해서는 부조리를 남김없이 수용해야 한다. 삼위일체로서의 부조리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곧 세계의 비합리에 맞서 싸우는 이성을, 그 의식을 단념하지 않는 자세와 일치한다. 따라서 인간은 근본적으로 반항하는 혁명가이다. 이어서 카뮈는 두 번째 귀결로 죽음과 부조리야말로 인간을 자유롭게 만든다고 분석한다. 자유의 문제는 필연적으로 책임의 문제를 수반한다. 우리가 진정 자유롭기 위해서는 우리의 선택을 온전히 책임질 수 있어야 하며, 이를 악의 심판에 대입하면 죄가 과연 누구에게 성립하는가의 문제로 이어진다. 만약 인간에게 자유가 없다면, 이 세계에 현존하는 악의 책임은 궁극적으로 신에게 결박된다. 반면에 인간에게 자유가 있다면, 전능한 신의 개념은 무효해지고, 책임은 모두 인간에게 전가된다. 부조리는 본질적으로 신을 배제한다. 정말로 그러한 신이 존재하는가는 다른 차원의 질문이다. 그의 실존 여부는 미천한 인간의 이성으로는 알 수 없다. 그렇기에 오직 자명한 것만 존중하는 우리의 지성으로써 파악할 수 있는 전부인 부조리를 일단 수용하고 나면, 인간은 더 이상 신의 계율을 따를 필요가 없어진다. 사회의, 종교의, 혹은 그 어떠한 공동체의 규칙에 얽매일 필요가 전혀 없어진다. 인간은 부조리의 의식에만 매일 뿐, 그밖에 모든 것들로부터 해방된다. 니체의 망치가 비로소 신을 죽였다. 물론, 부조리를 받아들이기 전에도 인간은 자유로움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이다. 부조리를 따르지 않는 사람들은 곧 들이닥칠, 유일하게 확실한 미래인 죽음은 망각한 채 본인이 설정한 인생의 경로를 그들의 ‘자유의지’에 따라 실천해 나갈 수 있고, 또 그렇게 해 왔다고 ‘믿는다’. 그러면서 그들은 미래를 기획하지만, 본질적으로 부조리한 세상을 살아가는 존재로서 그들이 영원히 지탱할 수 있는 인간적 활동의 산물은 아무것도 없다. 그들은 계속 영원에의 갈증을 느끼지만, 유일하게 분명한 것은 ‘모든 것이 분명하지 않다’라는 의식뿐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실을 모른 채 우리가 자유롭다고 믿으면 점점 우리는 자유의 “노예 상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게 된다 (90). 간판에만 ‘자유’라는 단어가 들어간 교도소에 자발적으로 입소해 그곳의 나팔소리에 맞춰 살아가는 인간은 그의 “정신적 개방성”마저 축소된다 (87). 하지만 부조리의 인간은 “자신의 내면에 결집된 그 치열한 [부조리에 관한] 관심 이외의 것에서는 완전히 벗어났다고 느”끼며 “일상적인 규칙들로부터 자유를 맛본다” (90). 이어서 카뮈는 반항과 자유라는 앞의 두 귀결에서 “중요한 것은 가장 잘 사는 것이 아니라 가장 많이 사는 것”이라는 세 번째 결론을 도출한다 (92). ‘잘 사는 것’이라는 말에는 가치의 판단이 내포된다. 그렇지만 지난 수 세기 동안 지속되던 신의 시대에 마침표를 찍은 이상 대체 어떠한 가치 체계가 부조리의 인간 전원을 포섭할 수 있단 말인가. 보편적인 가치를 다시 한 번 정립하는 순간 인간은 부자유의 상태로 돌아간다. 반항하는 인간은 완전한 자유 속에서 세계의 비합리성에 끊임없이 도전하는 존재이며, 합리적인 방식으로 규정될 수밖에 없는 특정한 시스템은 자연스럽게 그러한 인간의 가치를 묵살한다. 따라서 부조리의 인간은 ‘어떻게'가 아니라 ‘얼마나' 살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모든 행위가 자유로워진 세상에서 “한 인간의 모럴과 가치의 척도는 그가 축적할 수 있었던 경험의 양과 다양성에 비추어 볼 때 비로소 그 의미를 갖는다” (93). 다시 말해서 마치 브라운 운동 중인 기체 분자들처럼 누가 얼마나 더 자주 세계와 접촉할 수 있는가를 따져야 한다. 죽음이라는 내정된 미래가 닥치기 전에 부조리의 인간은 최대한의 반항과 자유를 실천해야 한다. 그로써 진정한 의미의 반항과 자유가 완성된다. 이렇게 카뮈의 부조리에 관한 철학적 탐구는 반항, 자유, 다양성이라는 새로운 얼굴과 함께 막을 내린다. 통념과는 정반대로 카뮈의 사상은 허무주의에서 출발할지라도 그 결론은 허무와는 전혀 다른, 주어진 우리의 삶을 있는 힘껏 영위해야 한다는 희망찬 결심이었다. 「부조리의 추론」을 마치며 카뮈는 인간 이성의 한계를 밤(Nacht)에 비유한다. 실존 철학자들은 그러한 밤이 정신에 필요하다는 데 동의하지만, 그들에게 밤은 다가올 아침을 기다리는 유한한 시간이다. 그러나 카뮈의 인간은 “맑은 정신을 간직한 절망의 밤, 극지의 밤, 정신이 깨어 있는 밤, 하나하나의 대상이 지성의 불빛 속에서 또렷이 보이는 희고도 때 묻지 않은 광명이 비쳐 올” 무한한 밤에 두 눈을 부릅뜨고 있다 (100).
부조리의 귀결 세 가지를 곱씹어 보자. 반항하는 인간, 자유로운 인간, 그리고 열정적인 인간. “부조리의 정신이 추론 끝에 이르러 찾을 수 있는 것은 결코 윤리적 규칙들이 아니라 인간의 삶을 구체적으로 보여 주는 예증들과 숨결들이다” (106). 그런데 반항하면서 자유롭고 또 열정적인 인간은 도대체 어떻게 살고 있을까. 카뮈는 「부조리한 인간」에서 돈 후안, 배우, 그리고 정복자라는 세 가지 예증들을 제시한다. 그러기에 앞서 그는 부조리한 인간의 필요충분조건을 해당 장의 서론에서 명시한다. 그에 따르면 부조리한 인간은 괴테의 말마따나 시간의 영역에서 활동하며 “영원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영원을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103). 즉, 신의 존재에 관해서는 불가지론적 입장을 고수하면서 죽음이 부여하는 삶의 유한성을 지속적으로 인식하며 무의미한, 아무리 노력해도 뚜렷한 결실을 맺을 수 없는 반항을 일삼는다. 부조리한 인간에게는 “모든 것이 허용”되지만, 그것은 “해방과 기쁨의 외침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의 쓰라린 확인”이다 (104, 105). 이 대목에서는 사르트르의 “인간은 자유롭도록 저주받았다”라는 문장이 떠오른다. 그러한 자유는 비합리한 세계의 나약한 개인을 짓누르는 부조리의 무게를 상기시킬 뿐, 부조리의 족쇄로부터 그를 풀어주지는 못한다. 하지만 부조리한 인간은 그 무게를 시시각각 느끼면서 그에 맞서 자신에게 주어진 ‘무용한’ 일을 반복하며 “자신을 남김없이 소진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107). 그렇게 삶을 끝까지 소진하는, 즉 부조리의 귀결 중 ‘열정’ 혹은 ‘다양성’으로 불리는 항목에 해당하는 것을 멋지게 실천하는 이들의 사례로 돈 후안, 배우, 정복자가 차례대로 등장한다. 먼저 돈 후안부터 살펴보자. 돈 후안은 흔히 많은 여자들의 마음을 훔친 ‘역사적인’ 바람둥이로 기억된다. 누군가는 돈 후안은 가벼운 사랑밖에 모르는 바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카뮈가 보기에 그는 자신의 한계를 명료하게 인식하고, 미래에 대한 희망을 품지 않은 채 현재에 충실한 부조리한 인간의 전형이다. 영원한 사랑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죽음이라는 필연적 장애물에 가로막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영원한 사랑을 꿈꾸며, 그것의 대체재로 죽음을 불사하는 사랑을 꼽으며 그러한 베르테르적 애정이야말로 가장 열정적이라고 착각한다. 사랑을 위해 죽음을 택한다? 그것은 가장 많은 사랑을 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손수 포기하는 바보 같은 짓이다. 돈 후안은 그러한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다. 그는 대단한 사랑을 택하느니 차라리 “아무것도 아니기를 택했다” (114). 그는 내세를 믿지 않는다. 그래서 신을 포함한 그 어떠한 도덕에 발목을 잡히지 않는다. 자유롭게, 이 사람 저 사람 옮겨 가며 최대한 많은 사랑을 쟁취한다. 만약 사랑이 그 대상이 누구냐에 따라 각기 다른 양상을 지닌다면, 부조리의 관점에서 한 사람과 오래 있기보다도 되는대로 가장 다양한 사랑의 경험을 맛봐야 진정으로 사랑에 충실한 것이며, 진심으로 세계의 부조리에 대항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비록 돈 후안은 수도원 안에 갇혀서 쓸쓸히 말년을 맞이하지만, 적어도 젊었을 적의 그는 인간이 타고난 부조리함에도 불구하고 사랑이라는 개념에 가장 가까이 다가갔다. 이와 마찬가지로 양적 관점에서 연극 배우는 부조리에 반항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위치에 자리한다. “모든 영광 중에서 가장 덜 거짓된 것은 스스로 체험하는 영광”이라는 명제를 받아들이면, 배우야말로 유한한 인생에서 가장 치열하게 가장 많은 영광 (혹은 배역)을 체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120). 배우로서의 삶이 펼쳐지는 무대에서는 그 어떠한 도덕도 부재한다. 그곳에서는 신성을 모독해도, 어머니와 아들이 정을 나누어도, 그것이 연출자의 의도라면 누구도 저지할 수 없다. 무대 위의 도덕은 극작가의 머릿속에서 형성된다. 따라서 그곳에서는 창작자의 의도라는 정언명령 아래 모든 것이 허용된다. 그렇게 자유로운 배우는 죽음이 그들을 유인하기 전까지 어제는 햄릿, 오늘은 오이디푸스, 내일은 파우스트를 연기하며 가장 많은 삶을 편력한다. 본인의 삶이 유한하듯 그들이 체험할 수 있는 각각의 인물의 삶도 연극 상영 시간으로 한정된다. 따라서 배우 역시 돈 후안처럼 부조리를 몸소 받아친다. 부조리한 인간의 마지막 예증인 정복자들은 어떠한가. 저자에 따르면 인간이 된다는 것은 관조와 행동, 신과 시간, 십자가와 칼 중 반드시 하나만을 선택하는 것이다. 이러한 양자택일에 있어서 정복자들은 행동을, 시간을, 칼을 택한다. 그들이 맞서 싸우는 대상은 그들이 쟁취하고자 하는 영토를 이미 점한 상대편이 아니다. 그들이 극복하고자 하는 이는 다름아닌 그들 자신이다. 관조와 신과 십자가가 끊임없이 유혹하는 이 저주받은 사막에서 정복자들은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운다. 비록 나 자신이 누구인지도 불명확하지만, 정복자들은 칼을 들고 부조리 뒷편에 숨어 달콤한 말을 속삭이는 신들에 항거하여 그저 자명한 것이 무엇인지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하려 한다. 그렇다, “왕국이 없는 왕자들”은 “보다 남은 존재가 되려고 애쓰는 것이 아니라 다만 앞뒤가 맞도록 노력할 따름”이다 (139, 139). 그리고 그러한 왕자들 가운데서도 가장 부조리한 인물은 다름아닌 창조자다.
창조는 부조리한 인간이 영위할 수 있는 가장 완벽한 부조리다. 그것은 사랑이나 연기, 혹은 정복 대상처럼 부조리한 세계에서 성취하거나 극복해야 하는 무언가로 인간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직접 자신만의 부조리를 투영할 수 있다는 점에서 가장 인상적이다. 카뮈는 「부조리한 창조」에서 창조 행위를 보다 자세히 규명하고, 다양한 유형의 창조 중에서도 소설에 주목해 부조리한 작품의 가능성을 타진한다. 우리는 세계의 비합리성과 통일을 향한 인간의 열망이 벌이는 “전쟁” 속에 살아간다. 그리고 이는 불가피하다. 칠흑 같은 밤하늘 아래 끝없이 펼쳐진 사막에서 꿋꿋하게 프로메테우스의 혁명 정신을 이어 나가려면, 우리는 “부조리와 더불어 살아 숨 쉬[면서] 그것이 주는 교훈을 인정하고 그것의 살을” 붙여야 한다 (144, 144). 그렇게 부조리를 우리 마음의 고향에 재구성하는 방법으로는 돈 후안의 사랑, 배우의 연기, 정복자의 투쟁 등 다양하겠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확실한 길은 부조리의 인식을 끊임없이 상기시킬 수 있도록 무언가를 남기는 행위일 것이다. 즉, 비합리적인 “이 세계에서 … [인간]의 의식을 지탱하고 그 의식의 모험들을 고정시킬 수 있는” 작품의 창조야말로 부조리에 대항하기에 가장 효과적이다 (144). 그래서 니체 역시 “예술, 오로지 예술, 우리는 예술을 가지고 있기에 진리로 인해서 죽지 않을 수 있다”고 말했다 (144). 그러나 예술 작품은 인간이 직면한 부조리의 문제를 해결해 주지는 못한다. 다만, “부조리한 정열들이 내딛는 출발점을, 추론이 정지하는 지점을 가리켜 보”임으로써 인간의 비극적 현실을 재확인시키고, 계속해서 우리의 의식을 명철하게 유지시킨다는 점에서 작품은 유의미하다 (146). 하지만 창조자는 자신의 예술 활동이 본질적으로 무용함을 인식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본인이 남긴 작품이 얼마나 위대하더라도 그 위용이 시간의 침식 작용에 영원히 저항할 수 없으며, 결국 부조리에 대한 항거의 기록이라는 의미 외에는 어떠한 가치도 보존하기 어렵다는 사실에 수긍해야 한다. 그래야만 창조자는 하나의 위대한 작품에 만족하는 오만과 자기안주에 빠지지 않고 ‘끝없이 분투하는’ 부조리한 인간으로 거듭날 수 있다.
카뮈는 〈철학과 소설〉에서 부조리한 예술 작품의 조건을 논하면서 작가의 역할도 같이 언급한다. 작가는 작품의 창조자로서 그의 예술과 분리될 수 없다. 따라서 작가의 삶과 사상은 그의 작품과 일종의 “상호 침투 관계”를 맺는다 (148). 카뮈에 따르면 “한 인간의 통일된 창조는 그가 차례로 내놓는 작품들의 연속적이고 다양한 모습 속에서 튼튼해[지고] 어떤 작품들은 다른 작품들을 보완하고 수정하거나 바로잡아 주고 나아가서는 부정하기도 한다” (172). 그렇다고 해서 작가가 본인의 사고를 있는 그대로 작품에 반영하면 곤란하다. 그렇게 탄생한 작품은 제대로 된 예술이라고 칭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진정한 예술 작품은 가장 명철한 형태의 사고가 개입되어야 하고, 또 그러한 사고를 처음부터 끝까지 설명하기에는 인간의 언어가 한정적이기 때문이다. 가장 명철한 형태의 사고는 ‘설명’이 아니라 ‘묘사’를 통해서만 나타난다 — 그래서인지 카뮈가 위대하다고 소개하는 작가들은 프루스트, 카프카, 멜빌, 도스토예프스키 등 하나 같이 묘사의 달인들이다. 마치 극본이 아니라 배우의 연기를 통해 해당 등장인물의 삶을 관객이 가장 분명하게 느낄 수 있듯, 작가 역시 부조리를 극명하게 드러내기 위해서는 자기 안의 것을 ‘기술’하지 않고 ‘표현’해야 할 의무를 지닌다. 즉, 진정한 예술 작품이란 본질적으로 더 육체적이고 더 적게 말하는 작품이다. 예술의 다양한 형태 중에서 그림이나 음악, 춤은 애당초 감각적 표현에 더 가깝기 때문에 상관없지만, 소설의 장르만큼은 설명의 유혹이 짙게 드리운다. 따라서 카뮈는 부조리가 소설에서도 잘 지탱될 수 있는가를 묻는다. 부조리한 소설들은 두 가지 조건을 충족해야 한다. 첫째, 그 자체로서 완전한 논리와 추론, 직관과 가설의 체계를 갖추고, 그렇게 미리 설정된 세계관으로써 작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분명하게 이해되어야 한다. 둘째, 앞서 충분히 강조했듯 “감각적 외관이 교훈적 메시지를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 (154). 카뮈는 〈키릴로프〉에서 이러한 두 조건이 실제로 만족될 수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선대 철학자들의 사상을 검토했듯이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 세계를 부조리의 관점에서 분석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도스토예프스키는 부조리의 작가가 아니라 실존적 소설가이다. 그는 실존 철학가들처럼 부조리의 문제를 인식하고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나 『악령』 같은 작품 속에 그러한 문제의식을 제기하는 데까지는 성공한다. 그의 작품에는 항상 기존의 도덕에 반기를 들며 스스로를 신으로 격상시키는 미치광이들이 등장한다. 내가 읽은 『죄와 벌』에서는 라스콜니코프가 그러한 유형에 해당한다. 타인의 눈에는 정신이상자로 비춰질지라도 라스콜니코프는 나름 자기 자신의 신념과 이유를 가지고 행동한다. 영웅이 되고자 했던 그의 첫 번째 행동은 본인이 사회악이라고 규정한 고리대금업자를 살해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라스콜니코프의 결말은 어떠했던가. 세계의 부조리는 인식했으나, 그는 자유의 대가를 감당하지 못한다. 그는 첫 단추를 잘못 끼웠던 것이다. 그러나 부조리한 인간은 그러한 선택에 변명을 달지 않는다. 오히려 담담하게 그 책임을 온전히 짊어지어야 한다. 하지만 라스콜니코프가 내린 최후의 선택은 소냐와 함께 대지에 입을 맞추고 신에게 용서를 구하기였다. 그렇다, 카뮈의 입장에서 도스토예프스키는 결정적인 순간에 “굴종”과 “치욕”의 길로 비약한다. 그러나 카뮈도 이 점만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한 대문호의 “비약[이] 감동적이고 그 비약을 고무하는 예술에 그 위대성을 부여한다”는 사실만은 (167). 여하튼, 우리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사례를 통해 진정으로 부조리한 소설을 창조하기 위해 필요한 자세 한 가지를 깨닫는다. 바로 ‘내일 없는 창조’다. 내세를 가정하지 않는, 미래를 약속하지 않는, 따라서 답이 존재하지 않는 부조리의 퍼즐에 애써 해결책을 제시하려 하지 않는, 오로지 부조리의 문제를 영원히 의식하게 하는 그러한 작품이야말로 완전히 부조리하다.
그러한 작품의 일례로 카뮈는 그리스로마 신화 중 시지프스의 일화를 든다. 수필집과 같은 제목을 공유하는 마지막 에세이에서 카뮈는 신화의 시지프를 부조리한 인간 혹은 영웅의 전형으로 탈바꿈시키며 앞에서의 모든 논의를 집약한다. 대중에게 알려진 시지프 혹은 시지프스는 올림포스를 능멸한 죄로 죽을 때까지 바위를 산꼭대기까지 굴리는 형벌을 받는다. 원래 신화에서도 그는 자신의 도시인 코린토스에 강을 흐르게 해 준다는 조건으로 제우스의 만행을 다른 신에게 고발하거나, 자신을 잡으러 온 타나토스를 역으로 감금시키는 등 신들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더불어, 그는 타나토스를 밀실에 가둬 세상만물의 죽음을 저지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자신의 꾀로 하데스를 기만해 저승으로부터 도망치기까지 한다. 유한한 삶을 조금이라도 더 만끽하려던 그는 결국 무위와 무용이라는 끔찍한 벌을 받는다. 정리하자면, 그는 신들에 대한 멸시, 죽음에 대한 증오, 그리고 삶에 대한 열정이라는 세 가지 죄목을 범했다. 또는 그의 죄목을 반항, 자유, 그리고 열정이라고도 바꿔 말할 수 있겠다. 즉, 그는 부조리 추론의 귀결 세 가지가 모두 내재한, 카뮈가 그리는 부조리한 인간과 완벽하게 일치한다. 카뮈는 시지프의 벌 그 자체보다 바위가 산꼭대기에서 바닥으로 떨어져서 시지프가 다시 산비탈을 내려가는 때, 즉 “의식의 시간”에 주목한다 (182). 의식의 시간 중 시지프의 얼굴을 상상해 본 적이 있는가. 적어도 카뮈에 의하면 그는 비참해하지 않는다. “경련하는 얼굴, 바위에 밀착한 뺨, 진흙에 덮인 돌덩어리를 떠받치는 어깨와 그것을 고여 버티는 한쪽 다리, 돌을 되받아 안은 팔 끝, 흙투성이가 된 두 손”에서는 그의 고통과 함께 “온통 인간적인 확실성”이 보인다 (181~182). 그는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였다. 그것을 거부하지도, 저주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그는 서둘러 다시 무거운 바위를 굴릴 생각에 산비탈을 내려가는 자신의 두 발을 재촉한다. 그로써 그는 끝까지 자신을 저주한 신들을 모시한다. 비록 아무것도 쟁취할 수 없는 숙명에 처해 있더라도 그는 인간으로서 가능한 모든 일을 있는 힘껏 실현한다. 이러한 시지프의 태연한 자세를 통해 카뮈는 부조리의 딜레마에 대한 자신의 답을 전달한다. 자유롭고 반항하며 열정적인 우리의 시지프는 부조리 속에서도 행복하다. 그러니 자살하는 대신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삶을 직시하고 사랑하라.
산정(山頂)을 향한 투쟁 그 자체가 한 인간의 마음을 가득 채우기에 충분하다. 행복한 시지프를 마음에 그려 보지 않으면 안 된다.
P.S. 개인적인 감상을 적을 힘이 도저히 남아있지 않다. 그럼에도 『시지프 신화』를 읽으면서, 또 이 책에 대해 감상문을 작성하면서 내 머릿속을 거친 일련의 생각과 느낌을 간략하게나마 기록해야겠다. 먼저, 독서를 막 끝냈을 즈음에는 나로서는 어려운 사상이 너무나도 은유적인 표현들 속에 비눗방울마냥 하나하나 손가락으로 톡 터뜨려지기를 기다리는 것 같아서 완독했다는 사실만으로도 벅찼었다. 각 에세이를 두 번씩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해가 잘 안 되는 문장들이 더러 있다. 예를 들어, 〈내일 없는 창조〉에서 카뮈가 인용한 햄릿의 대사는 아직도 그 의미를 모르겠다. 그러나 이 글을 쓰면서 처음에는 모호하기만 했던 몇몇 메시지에 비로소 공감할 수 있게 됐다. 단적으로, 부조리와 자유의 관계를 논하는 부분에서 죄, 책임, 자유, 신, 인간, 부조리 등 각각이 이미 비대한 부피의 담론을 지니고 있는 개념들이 어떻게 서로 연관되는가를 계속 곱씹은 결과 겨우 위의 분석까지는 쓸 수 있었다. 사실 이 감상문은 그 성격이 애매해진 감이 없지 않다. 독자의 감상은 별로 없고, 에세이의 내용을 이해하는 데만 총력을 기울였기 때문이다. 애초의 기획은 줄거리를 목차순으로 제시하는 도중에 각 파트에 암시된 카뮈의 명제들을 나열하고 그 명제의 타당성을 따지며, 비록 카뮈가 본인의 목적을 설명이 아니라 묘사라고 밝히며 선수를 쳤음에도, 카뮈의 부조리 사상의 논리적 유효함을 알아보고 최종적으로는 나를 위시한 현대인에게 얼마나 큰 울림을 주는지 결론지으려 했다. 그러나 쓰다 보니까 그러한 계획은 아직 학교로 돌아가지 않은 나에게 너무나 커다란 과제임을 절감했다. 그만큼 카뮈의 텍스트는 풍부한 영양가를 자랑한다. 처음에는 독자를 당황시킬지 몰라도, 한 번 고비를 넘기면 굉장히 많은 이야기거리를 제공한다. 당장 그가 집중적으로 조명한 도스토예프스키나 카프카 — 사실 카프카의 『성』과 『소송』을 분석하는 부록이 〈키릴로프〉보다 부조리한 소설의 가능성을 발견하고자 하는 본연의 의도에 더 부합하는 듯하다. — 를 비롯해서 이 책에 인용되거나 언급된 많은 작가들부터, 실존 철학가들과 현상학자들에 관한 코멘트까지 실로 서양 근대의 인문학을 총망라하고 있지 않은가. 그렇기에 내가 어느 정도로 카뮈의 텍스트를 분명하게 이해했는가는 확실치 않다. 역시 여기서도 ‘분명하지 않음’만이 분명한가 보다. 여담이지만, 『시지프 신화』는 아름답게 쓰였다. 노벨 문학상 수상자다운 글솜씨가 여실히 드러난다. 특히 마지막 장인 〈시지프 신화〉에서는 읽는 이의 마음을 뭉클하게 만드는 감동적인 문장들이 참 많았다. 그러한 문장들을 일일이 여기 나열할 수 없어 안타까울 뿐이지만, 궁금한 사람은 시간을 들여서 직접 읽어 보기를 추천한다.
++ 아무래도 작가의 삶과 사상을 분리할 수 없다는 반(反)프루스트적 입장 때문에 김화영 교수가 그렇게 긴 - 무려 50쪽이 넘는다. - 작가 연보를 첨부했나 본데, 설령 그러한 카뮈의 의견에 동조하더라도 몇 년도에 어떤 잡지를 누구랑 냈느냐 따위의 정보는 그다지 유의미하지 않은 것 같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