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Book Reviews

해리 클리프, <다정한 물리학>

by 도미니크앙셀 분당점 2022. 12. 31.

얼마만의 과학책인가! 나 자신도 방송계로 나아가지 않는다면 사이언스를 하고 싶어하면서 정작 과학과는 상당히 오랫동안 담을 쌓고 지내왔다. 데이비스에서의 두 번째 학기에 고교에서 배웠던 일반 화학도 거의 까먹은 마당에 무턱대고 〈무기화학개론〉을 수강했다가 일 주일만에 관둔 이후로 거의 처음인 듯하다. 입대하기 이 주 전쯤에 카를로 로벨리의 Seven Brief Lessons on Physics를 완독했지만, 그 책은 애당초 각각 엄청난 중요성을 지닌 현대 물리학의 일곱 가지 주제를 너무 간단하게 풀이하기 때문에 교양으로 간주하기에도 애매했다. 물론 그렇다고 로벨리 선생의 값진 강의 내용을 전부 기억하고 있다는 말은 아니다. 고백하자면, 곧 소개할 해리 클리프의 『다정한 물리학』도 읽은지 하루밖에 되지 않았지만 대부분의 내용은 기억 저편 어딘가로 날려 버렸다. 자랑은 절대 아니고, 그냥 내가 그러한 상태에 처했다. 그럼에도 감히 이 멋있는 책의 독서를 기록으로 남기고 싶은 이유는 나를 현대 물리학, 그중에서도 입자물리학의 세계에 처음으로 눈 뜨게 했기 때문이다.

 

『다정한 물리학』을 읽는 내내 제목을 잘못 번역했다고 생각했다. 박병철 번역가보다도 요즘 소위 잘 팔리는 과학 도서의 트렌드를 따라가고자 한 출판사의 욕심이 아니었을까 싶다. 실제로 박병철 씨는 이 어려운 책을 - 그러니까 마냥 다정하지만은 않다. - 한국 독자들에게 소개하는 데 있어 지대한 노력을 기울였다. 번역서를 읽으면서 거의 처음으로 원서가 더 낫겠다는 원망이 들지 않았을 만큼 문화적인 비유도 자연스럽게 국문으로 옮기고, 전문 용어도 최대한 대중친화적으로 번역하려 했음이 절로 느껴졌다. 때로는 그러한 사투가 부담스럽게 다가오기도 했다. 예를 들어, 아래쿼크의 가장 무겁고 불안정한 버전인 바닥쿼크를 LHCb와 관련해 언급할 때는 굳이 ‘예쁨쿼크’로 번역했다. 영어로는 beauty quark라고 하는데, 또 원래의 의미를 살리면서 국문상 어색하지 않을 대안이 없기도 하다. 그런데 최고봉은 역시 strange quark를 ‘야릇한 쿼크’로 옮긴 사례다. 비전공자인 나의 관점에서는 아래쿼크의 또 다른 버전인 strange quark를 그냥 ‘이상한 쿼크’로 소개해도 되지 않나 싶지만, 전공자에게는 달리 비춰지나 보다. 여하튼 박병철 번역가의 노고에 비해 출판사인 다산사이언스는 원고를 한 번도 검토하지 않은 채로 인쇄했는지 의문이 들 정도로 오타도 많고, 교정 작업이 필요한 부분도 더러 있었다. 그러나 『다정한 물리학』은 훌륭한 교양서임이 분명하다. 입자물리학의 역사에서 굵직한 사건을 모두 다룬다는 점에서 - 이렇게 말하지만 정말로 그러한지는 모른다, 이 책을 통해 처음 알게 된 것들이 거의 대부분이므로… - 나 같은 물리 문외한에게 쉽지만은 않다. 하지만 해리 클리프의 탁월한 설명과 현장감 넘치는 실험실 - CERN이나 보렉시노 같은 곳도 실험실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 그러한 표현이 허용되는 규모의 장비인지는 모르겠다. 실례를 범하는 것일지도? - 방문기를 성실하게 탐독하다 보면 어느 새인가 입자물리학의 매력에 듬뿍 빠져든다. 그동안 이렇게나 멋진 학문적 성숙과 팽창이 이루어지고 있었음에 무지했다는 사실이 부끄러울 지경이다. 따지고 보면 라부아지에나 돌턴의 발견부터 시작됐지만,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이야말로 현대물리학을 뒷받치는 두 개의 기둥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불과 백 년 정도밖에 되지 않은 입자물리학이라는 분야에서 벌써 초대칭이론과 표준모형 같은 수준의 이론이 도출됐음은 기함할 만하다.

 

해리 클리프는 시종일관 콘셉트에 충실했다. 『다정한 물리학』을 관통하는 주제는 원제이기도 한 ‘무(無)에서 사과파이 만들기’다.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사과 파이를 만든다고 하면 그것이 왜 입자물리학에 관한 것이냐며 반문할 수도 있겠다 - 실제로 그저께 평택 부대에서 외박 나오는 길에 친구에게 책의 원제를 말하니까 똑같이 반응했다. 그러나 클리프가 의미한 ‘무’는 정말 아무 것도 없는, 사과 파이의 재료인 사과나 밀가루, 달걀도 없는, 심지어 우리 인간도, 지구도, 태양도, 은하수도 없는 태초의 순간이다. 빅뱅이 일어난지 100억x1조x1조분의 1초도 지나지 않은, 시간이 완벽하게 0이었던 때부터 시작해 사과 파이를 만든다니, 그것이 가능하기나 할까? 결론부터 밝히자면, 불가능하다. 적어도 지금 수준에서는 말이다. 사과 파이의 주재료인 사과와 밀가루를 포함한 모든 물질은 원소로 구성된다. 원소는 원자 형태로 존재한다. 원자는 또 다시 양성자와 중성자로 이루어진 원자핵과 그 주위를 멤도는 - 이 책을 읽고도 여전히 이러한 표현을 사용해도 되는지는 의문이다. - 전자로 쪼개진다. 여기까지는 지난 백 년 동안의 눈부신 과학 발전과 더불어 성사된 공교육의 확산 덕분에 대다수의 사람들이 알고 있다. 하지만 클리프는 그 수준을 거뜬히 넘어 버린다. 그렇다면 양성자와 중성자, 그리고 전자는 어디서 왔을까. 정말로 신이 존재해서 갑자기 뿅 하고 지금의 광활한 우주를 구축할 수 있을 정도로 많은 입자들을 선사했을까? 물리학자, 그중에서도 실험물리학자라면 그러한 상상은 전혀 용납할 수 없다. 실제로 클리프는 현대물리학이 직면한 가장 심각한 문제들 - 예를 들어, 표준모형상 왜 힉스 입자는 이도 저도 아닌 딱 246GeV의 질량을 가지는가 등 - 의 만능 치트키인 다중우주론마저 학문적 포기라며 부인한다. 놀랍게도 물리학자들은 중성자와 양성자가 쿼크라는 더 작은 입자로 구성된다는 사실마저 알아냈다. 쿼크는 +2/3이나 -1/3의 분수전하를 가진 초소형 입자로서 종류가 다양하다. 그중에서도 +2/3의 위쿼크와 -1/3의 아래쿼크는 각각 2개와 1개씩 합쳐지면 양성자(uud; 따라서 전하 +1)를, 1개와 2개씩 합쳐지면 중성자(udd; 따라서 전하 0)를 만든다. 그리고 이러한 쿼크는 힉스장의 스위치가 불균형하게 켜지고, 또 태초의 순간에 힉스장이 힉스 보손이 246GeV 언저리의 질량을 가지도록 조정됐기 때문에 생겨났다. 여기까지가 현재 수준에서 추적할 수 있는 사과 파이의 재료다. 이 책의 모든 내용을 요약한 것도 아니고, 원자의 내부 구조와 관련해서만 정리하기도 이렇게나 벅찬데, 저자는 입자물리학의 역사를 사과 파이 만드는 과정에 빗대어 정말 유려하게 설명한다. 아, 갑자기 뜬금없지만, 저자 덕분에 가수 윤하의 신곡인 사건의 지평선 - 빛조차도 빠져나올 수 없는 블랙홀의 내부 공간 - 이나 몇 해 전에 최초로 감지됐다는 중력파 - LIGO라는 특이한 구조의 망원경에 의해 - 의 정체에 대해서도 제대로 알게 됐다.

 

이 책은 여러 번 읽어야겠다. 한 번만 읽어서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기 때문에 비전공자로서 CERN 연구원의 탁월한 가이드를 손에 쥐고 언젠가는 친구들에게 당당히 ‘너 SU(5) 대칭이 뭔지 들어는 봤니?’ 혹은 ‘헬륨보다 무거운 원소들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알아? 삼중알파과정은 아니?’라고 뽐낼 수 있을 정도까지 탐독해야겠다. 어쨌거나 오랜만에 정말 재미있는 과학책을 읽었고, 그것이 내가 여태까지 유일하게 공부해 보지 않은 물리학 분야라 더욱 놀라울 뿐이다. 다만… 한 달 동안 천천히 읽어서 겨우 끝낸 만큼 가볍게 입자물리학을 퐁듀 찍어 먹듯 접하고 싶은 독자에게는 권하지 않는다. 은근슬쩍 클리프의 다음 저서를 고대하며 글을 마친다.

 

P.S. 올해가 가기 전에 부랴부랴 쓰느라 내용 정리는 덜했는데 - 거의 못했는데 - 틈틈이 시간을 내서 이 글에 목차 달듯 정리해야겠다.

 

해리 클리프. 『다정한 물리학』. 박병철 옮김, 다산사이어스, 2022.

'Book Reviews' 카테고리의 다른 글

read...23上  (1) 2023.07.16
알베르 카뮈, <시지프 신화>  (1) 2023.03.12
Virginia Woolf, <Mrs Dalloway>  (0) 2022.12.31
나쓰메 소세키, <마음>  (0) 2022.12.18
Alain de Botton, <How Proust Can Change Your Life>  (0) 2022.11.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