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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dyssey11

험프리스를 떠나며. 숫자 9에 근접하는 시침을 보고서도 전혀 조급해 하지 않은 지금에서야 전역을 실감한다. 전역하는 당일에는 비도 추적추적 내리고, 전날 살짝 무리하기도 해서 기쁘거나 슬프거나 해야 마땅했을 마음에 일말의 파동도 일지 않았다. 다만 한시라도 빨리 평택 땅을 벗어나고 싶어서 안달이 났다. 한 번에 작별을 고하고 깔끔하게 떠나고 싶었다. 이미 ‘안녕히 계세요’ 혹은 ‘안녕히 가세요’라고 말한 이상 자꾸 얼굴이 마주치면 가는 이나 남는 이에게 모두 실례지 않은가. 그러나 워킹 게이트까지 가려고 마지막으로 블루 버스를 타는 순간까지 계속해서 부대원과 만나게 돼서 몹시 민망했다. 그냥 엄마 부를걸. 그냥 동기 차 얻어 타지 말고 기차 타고 갈걸. 그냥… 몇 가지 선택지를 앞에 두고 갈팡질팡하다 결국 말짱 도루묵이 돼.. 2024. 3. 1.
짧은 수기_7 바다, 절벽, 비 온 직후의 쌀쌀함. 여행에 있어 나를 가장 들뜨게 하는 삼박자가 이날 딱 한 데 모였다. 교환학생 첫 학기로 데이비스에서 겨울을 보내고 떠난 봄방학 여행의 첫 날이었다. 데이비스의 자그마한 암트랙 역에서 출발해 산 호세를 경유, 산타 크루즈와 산타 바바라를 거쳐 로스엔젤레스와 오렌지 카운티로 대미를 장식하는 기다란 여정의 첫 단추를 잘 끼우고 싶었다. 어느새 눈에 익은 샌프란시스코의 독특한 고층 빌딩들을 뒤로 하고 산 호세로 천천히 나아가는 기차 안에서 나는 일출을 경과했음에도 여전히 음침한 하늘을 잠자코 바라보았다. 혼자 떠나는 길이었기에 말 걸 상대도 마땅치 않았다. 조용히, 어쩌면 오늘부터 우비를 개봉해야 할지도 모르겠네, 이런 나름의 대책. 날씨 때문에 듣기 시작한 박화요비의 노.. 2023. 6. 4.
짧은 수기_6 프루스트를 동경해 마지않는 나로서 지난 번 여행에서 자꾸만 그의 흔적을 좇으려 했다. 일리에-콩브레라는 별볼일 없는, 그저 루아르 지방과 일 드 프랑스 사이의 광활한 평야를 지루하게 달리다 보면 종종 지나치는 작은 마을 중 하나를 시간을 쪼개 방문한 것도 프루스트 프로젝트의 일환이었다. 루아르 강변을 따라 즐비하게 늘어선 고성들에 발도장을 찍고 오후 늦게 도착한 일리에-콩브레에서 우리는 많은 것을 하지 않았다. 꽤 합리적인 가격의 숙소에 짐을 풀고, 굶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저녁거리를 찾아 광장을 서성이고, 성당을 반 바퀴 둘러 그 외관을 감상하고, 다음 날 아침 일찍 일어나 베르사유로 향하기 전 무료였지만 그 어느 곳에서보다도 푸짐했던 아침 식사를 아직 이슬이 공기 중의 습기에 침투돼 불투명해진 아침 .. 2023. 1. 29.
짧은 수기_5 낭트는 외지인이 돌아다니기 참 쉬웠다. 시야를 차단할만큼 두꺼운 안갯속에서 어디로 발을 디뎌야 할지 막막한 나그네에게 바닥에 그려진 영롱한 형광 연두색 줄은 마치 절체절명의 순간 어느 오누이 앞에 나타난 튼튼한 동아줄 같았다. 형광 연두의 길을 따라 자연사 박물관에 도착했다. 우연히 들렀다면 낭만이었겠지만, 실은 그 유명한 실러캔스를 보기 위함이었다. 외국인 관광객은 좀처럼 오지를 않는지 모든 라벨이 불어로만 적혀 있었다. 1층의 광물을 둘러 볼 때는 모처럼 학구열을 불태우고 싶어서 관심 가는 전시물의 설명은 불어 텍스트를 일일이 타자로 옮겨서 번역해 읽었다. 몇 번 그러다 힘들어서 금세 관뒀다. 당초 목표한 실러캔스 앞에서 놀람을 가장한 표정을 지은 채 셀카 한 장을 찍고 박물관에서 나가는 길목에 불어.. 2023. 1. 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