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글을 쓰기보다 읽기를 훨씬 좋아한다는 사실을 최근 들어서야 절감하는 중이다. 글쓰기에 딱히 재능이 있지도 않을 뿐더러, 아무리 사소한 이야기를 적으려고 해도 그것이 기록의 성격을 유지하는 이상 굉장한 에너지를 쏟아야 하므로 이래저래 신경 쓸 일도 많은 요즘 글까지 꼬박꼬박 쓰겠다는 것은 상당히 사치이자 엄연한 내 몸의 혹사이다. 끊임없이 나의 주의를 요하는 일련의 과정이 차라리 학업과 관련됐다면 자기 직전과 깨어난 직후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고 만약을 걱정하며 하루하루를 보내지 않아도 될 텐데. 남들은 행복하게만, 즐겁게만 지내다 오는 것 같은 교환학생 생활 내내 나는 우리 엄마, 아빠가 소위 '인생 경험'이라고 부르는 것들에 시달리는 듯한 기분이 든다. 그래도 그것이 내가 추구하고자 하는 인생의 방향을 명백히 가리키고 있기 때문에 궁극적으로는 스스로가 자초한 결과이며, 이제 스무 살이 된 내가 온전히 감당해야 할 나의 몫으로 여기겠다. 어쨌든, 포틀랜드... 아, 비운의 포틀랜드 여행의 기행문을 쓰고자 한다. 어쩌면 2월 중순에 혼자 포틀랜드를 여행하면서 겪어야 했던 모든 사건들도 결국 언젠가는 앓을지도 모르는 질병의 예방접종이 아니었을까. 아, 사실 이 글은 어젯밤 자넷 잭슨의 <Janet Jackson's Rhythm Nation 1814>를 들으면서 시작했지만 지금은 유튭에서 박정현 재생목록을 듣고 있다. 여담이지만, 거의 신보라고도 할 수 있는 "같이"에 대해 얼마 전까지만 해도 시큰둥했지만, 방금 처음으로 좋다고 생각했다. 역시 버클리의 주관적 관념론에도 일리가 있는 것이었어.
주위에 포틀랜드에 다녀온다고 전하니까 대부분 '오, 킨포크의 도시!'라는 반응을 보였다. 사실 가족들과 지인들이 아니었으면 그곳을 다녀오고 나서도 킨포크에 대해 전혀 무지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경험한 포틀랜드는 '슬로우 및 미니멀 라이프'의 대명사인 월간 <킨포크>와
는 아주 동떨어졌기 때문이다. 그 이야기는 차차 하기로 하고 - 사실 아래 첨부할 수많은 사진들로써만으로도 내 뇌리에 각인된 포틀랜드의 존재감이 잔잔하고 안락한 분위기와 일절 상응하지 않는지 금세 이해할 수 있다. - 우선 킨포크가 무엇이냐. <아트인사이트> 웹진의 말을 빌리자면 "2011년 미국 북서부의 중소도시 포틀랜드(Portland) 지역에 거주하던 윌리엄스 부부에 의해 창간[돼] ... 동네 이웃 및 친구들과 함께 자신들의 일상을 사진으로 남기고 수록하는 식의 방식으로 시작[됐고]... 개성 있는 사진과 감성적인 기록으로 온라인에서 높은 구독률과 큰 관심을 받으면서 인기 매체로 자리매김[한] ... 여유와 낭만의 도시인 포틀랜드 특유의 생활상을 고스란히 반영하여 자신들의 텃밭을 가꾸는 과정, 그곳에서 직접 수확한 유기농 식재료로 만든 친환경 밥상, 담장을 허물고 이웃들과 함께 저녁식사를 즐기는 등 일상의 소소한 풍경들을 보여[주는] ... '빠름에서 느림으로, 홀로에서 함께로, 복잡함에서 단순함으로'[라는 모토의 잡지로] ... 먹고 마시고 즐기는 삶의 질에 초점을 맞추고 형식에 얽매이지 않으며 여유를 즐기는 삶의 풍조를 지칭[하기에 이른] 용어라고 할 수 있다" (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22653) 대충 어떤 느낌의 잡지인가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가져온 잡지의 표지와 안쪽 사진을 통해 <킨포크>가 지향하는 '감성'을 파악할 수 있으리라. 예를 들어, 오리건 바로 밑에 위치한 캘리포니아의 상징이기도 한 쨍한 색감은 온데간데없이 전반적으로 톤다운되고 살짝 희뿌연 필터를 씌운 듯한 색감으로 통일돼 있으며, 그나마 색조가 도드라지는 경우에도 따뜻한 인상을 풍기는 파스텔 톤에 가까운 색들이 들어 있다. 그런 것이 바로 <킨포크>가 추구하는 느린 삶의 미학이자 전 세계 대중에게 전파하고자 하는 포틀랜드의 이미지다. 그런데 <아트인사이트> 기사의 인용구를 꼼꼼히 반박하자면, 내가 체험한 킨포크의 도시는 낭만적이지 않았고, 텃밭은 보지도 못했으며, 유기농과는 상당히 무관한 듯했고, 담장을 허물기까지 하면서 이웃들과 무던히 교류할만큼 '안전'하고 '평화'롭지 않았다. 다만, 여유가 넘치다 못해 코로나 바이러스 확산 이후 미국에서 경제가 가장 급격히 붕괴된 도시이며, 따라서 거리에 샌프란시스코의 텐더로인보다도 더 많은 노숙자들이 활개해도 아무런 대처도 하지 않고, '사람들이' 느리고 단순해 타지에서 자기들 도시를 방문한 고마운 여행자에게 크나큰 불쾌감을 초래했다.
그렇다면 나는 왜 포틀랜드를 여행하기로 결심했는가. 그야 미국 서해안에 위치해서 주말을 틈타 다녀오기 수월했으며, 교통비도 미국 중부나 동부를 갈 때보다 훨씬 저렴했으니까. 그리고 포틀랜드보다도 '오리건'이라는 새로운 고장을 탐험하고 싶다는 욕망이 컸다. 많은 캘리포니아 교환학생들이 미국 최북서단의 시애틀을 잠깐의 휴식처로 삼고는 하는데, 나는 그러한 '대세'를 거스르고 '유행'에 따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보다도 내가 초등학교 4학년 때 시애틀을 이미 방문했으므로 '도장 찍기'의 측면에서 득이 하나도 없었기에 굳이 '재'방문하지 않았다는 설명이 훨씬 그럴싸하다. 사실을 고백하자면, 고등학생 시절도 가물가물한데 만 9세 때의 기억은 거의 유실됐다. 그러므로 이번 기회에 시애틀을 한 번 더 가도 여전히 흥미로웠을 것이며, 좋은 추억을 쌓을 수도 있었을 테지만, 당시나 지금이나 내게는 도장 깨기가 더욱 중요했다. 게다가 '거의 유실'됐다고 하더라도 부둣가에 있는 스타벅스 1호점에서 핫초코를 마셨다거나 해가 지고 나서 다운타운 시애틀의 빌딩 숲 한가운데 자리한 시애틀 시립 도서관에 들어가 KM 이모와 지금은 토론토대에 재학 중인 그녀의 아들, 그리고 당시 같이 지냈던 또래 친구들과 각자 읽고 싶었던 영어 책을 골라 라운지 같은 곳에서 활자를 우겨넣었던 일은 여전히 생생하다. 지금은 변했을지도 모르지만, 2011년의 시애틀은 다운타운에조차 노숙자 한 명 보지 못했으며, 굉장히 고요하고 차분한 분위기를 갖추고 있었다. 그리고 스타벅스의 홈그라운드답게 다운타운에는 거의 한 블럭마다 스타벅스 매장이 있었다. 그 빈도에 대해 속으로 '분당보다 스타벅스가 밀집돼 있는 곳이 있다니!'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내가 아는 곳만 해도 분당 수내역에만 스타벅스 매장이 네 군데, 서현역에 세 군데, 정자역에 네 군데 등이 있을 정도로 분당은 스타벅스 밭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당시 스페이스 니들에는 올라가지 않았지만, 어째서인지 스페이스 니들 나무 모형 키트를 사가지고 왔다. 아마 한국 집에서 조립하다가 엉성하게 나무 조각들을 맞춘 탓에 금방 무너졌고, 짜증도 나고 흥미도 잃은 나는 그대로 그 모형을 버렸던 것 같다. 당시에는 1박 2일로 벤쿠버에서 국경을 넘어 차를 타고 시애틀을 여행했는데, 첫날 저녁 식사를 하러 KM 이모가 우리를 데리고 망치로 게와 랍스터 등의 해산물을 깨 먹는 아주 유명한 레스토랑에 갔던 것도 기억난다. 어쨌든, 여담이 길어졌지만, 이처럼 시애틀에 대해 온전하지는 않더라도 부분적인 기억이 잔재했기에 나는 기꺼이 <트와일라잇 사가>의 울창한 삼림 지대를 등지고 오리건으로 향하기로 결정했다 - 그런데 <트와일라잇>의 잔재는 예상치 못한 곳에서 발견된다. 즉, 내가 포틀랜드 여행을 다짐한 배경에는 킨포크 따위가 끼어들 틈조차 없었다.
1월 한 달 동안은 데이비스에 익숙해지는 데 전념했고, 본격적인 미국 여행은 2월 중순경으로 예정해 뒀던 포틀랜드를 시작으로 한동안 꽤 활발히 이곳저곳 몸을 기울였다. 한 번 가고자 결심하면 이삼일 내지로 모든 계획을 마련해 놓아야 적성이 풀리는 거의 강박적이기까지 한 성격 탓에 가장 먼저 포틀랜드행 비행기 표부터 구매했다. 왕복 티켓을 살지 편도를 사고 올 때는 기차를 탈지 한동안 고민했다. 솔직히 캘리포니아 에머리빌에서 저 멀리 동부의 시카고까지를 쭉 잇는 Amtrak(암트랙) Zephyr를 타고 기차 여행을 즐기고 싶었지만, 그러기에는 이틀을 꼬박 기차만 타야 하는 데다 시카고까지 다녀올 시간도 여력도 없어서 그냥 포기했다. 미국에 벌써 네 번째 방문하는 것인데도 아직까지 시카고도 못 가 보고, 수도인 워싱턴 D.C.도 못 가 봤다는 점이 한편으로 씁쓸해서 어떻게든 그 두 곳을 미국에 체류하는 동안 다녀오려고 이리저리 머리를 굴려 봤다. 그럼에도 딱 맞아 떨어지는 시점을 찾을 수가 없어서 필라델피아에 만족하기로 했다. 어쨌든, 다시 암트랙 이야기로 돌아와서, Zephyr를 포기하는 대신 Coast Starlight 루트를 경험해 보기로 결심했다. 포틀랜드에서 데이비스까지 장정 17시간이나 걸리는 기차 여행은 티켓 값도 만만치 않아서 미리 유튜브 후기 몇 편을 조사하고 가장 값싼 코치석을 예매했다. 따라서 포틀랜드 여행은 교통 수단의 측면에서 아주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왜냐하면 그 여행 중에 처음으로 미국에서 국내선 비행기를 탔을 뿐만 아니라 마찬가지로 처음으로 암트랙을 탑승했기 때문이다. 본격적인 유람의 시작이랄까나. 교통편을 정리하고 나서 바로 숙소를 예약하고 2박 3일 동안 (실제로는 3박 4일이지만, 밤 10시를 훌쩍 넘겨 포틀랜드에 입성했으므로...) 무얼 할지 계획을 세웠다. 사실 계획 세우기는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자동차를 몰고 다닐 수 없는 보도 여행자에게 허용된 포틀랜드는 도시를 동서로 가로지르는 윌라메트 강을 기준으로 서쪽에 위치한 다운타운 및 그 인근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강 동쪽으로도 갈 수 있었지만, 그러기에는 시간이 부족했다. 강 동쪽은 도심이라기보다 거주 지역에 가깝기에 '진짜' 포틀랜드를 맛보고 싶다면 서쪽보다 동쪽을 구석구석 탐방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예를 들어, 포틀랜드라는 새로운 고장에 대해 알아보는 중에 '커피의 도시'라는 별명을 알게 돼 본격적으로 유명한 커피 가게들을 지도에 표시해 봤는데, 정말로 'quirky'한 매장은 대부분 동쪽 구석 - 한마디로 대중 교통으로 쉽게 닿을 수 없는 - 에 몰려 있었다. 어쩌면 많은 이들이 기대하는 킨포크의 풍경은 동쪽에 한정된 것은 아닐까. 어쨌든, 미리 네이버 블로그나 여러 국내외 기행을 읽어 놓았으므로 한정된 예산으로 무얼 할 수 있고 하고 싶은지를 결정하면 됐다.
숙소는 Hotel DeLuxe(호텔 딜럭스)라는 곳으로 정했는데, 이것도 Bay Area에 거주하는 어느 한국인 부부의 포틀랜드 여행기에 소개돼 있어서 알게 됐다. 한국인은 잘 찾지 않는 호텔이라는데, 정말로 내가 숙박하는 동안 한국인을 한 명도 보지 못했다. 애초에 포틀랜드가 한국인에게 아주 인기 있는 미국 관광지가 아니라서 - 나만의 생각일지도 - 그랬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비단 호텔에서뿐만 아니라 내가 다녀간 모든 포틀랜드 관광지에서 한국인을 단 한 명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 그래도 신세대 한류 스타 강다니엘도 어느 리얼리티 프로그램 촬영차 다녀간 곳이던데, 엄마 친구 중에 강다니엘 광팬이 한 분 계셔서 엄마가 결국 강다니엘이 출연한 해당 프로그램 유튜브 링크까지 보내 줬다. 하지만 그 호텔은 나의 포틀랜드 체류를 엉망으로 만들어 버린 가장 직접적인 원인을 제공했다. 하여튼 지금부터 순차적으로 기행문을 써 보겠다.
2月18日
1. SMF ~ PDX
2. 호텔 딜럭스 체크인
가장 먼저 왜 이 시기 - 2월 18일 밤에서 2월 22일까지 - 를 콕 집어 포틀랜드를 다녀오기로 했는지부터 밝혀야겠다. 이유야 아주 단순하다. 아무리 '격렬하게 쉬고 싶어서', '한국에서의 지난 2년이 고통스러웠기 때문에', '지난 8년 동안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하기만 했던 나를 위해' 교환 프로그램을 신청해 도미했다지만, 20년 동안 몸에 베인 성실함 - 자기 입으로 말하기 전혀 부끄럽지 않다! - 은 하루 아침에 사라지지 않는다. 1월 한 달 동안 나름 건강한 신체 리듬을 되찾자 오히려 새로운 환경에서도 도전해 볼 수 있는 모든 것에 최선을 다하자는 마음가짐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그래서 관성처럼 수업도 한 번 빠지지 않고, 과제도 하나 빠트리지 않고 챙기려 하다 보니 공휴일이 껴서 휴일이 길어지는 때를 노려 타주에 가기로 결심했다. 마침 2월 21일이 공휴일이었기 때문에 - 무슨 날인지는 까먹었다. - 그 기간에 3박 5일 여행을 잡게 됐다. 그래서 2월 18일 오후 3시에 있는 마지막 수업은 온라인으로 듣고, 미리 싸 놓은 배낭 하나를 짊어지고 우버를 타러 아파트 관리 사무소 앞에 나갔다. 저녁 8시 비행기였기 때문에 시간이 빠듯해 보였지만, 집에서 새크라멘토 국제공항까지 차로 20분만에 갈 수 있으므로 오후 4시 30분 우버 서비스를 예약해 뒀다. 따라서 원래라면 시간에 맞춰 도착한 차에 탑승해 공항까지 편하게 가면 됐지만, 이 여행은 시작부터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으니...
2월 17일, 비행기 타기 하루 전날 밤에 문득 B 누나도 라스베거스로 비행기를 타고 간다는 사실이 생각나서 혹시 새크라멘토 국제공항에서 출발하는 오후 비행기라면 우버 라이드를 공유해도 되냐고 급히 물어 봤다. 그랬더니 누나가 자기도 좋다며 우선 데이비스 북쪽의 자기 집에서 우버를 호출해 서쪽에서 라스베거스에 같이 가는 중국인 친구 WX를 픽업해서 가겠다고 했다. 우버 예약은 했는지 물어 보니 당일에 호출하면 될 것이라고 해서 나도 마음 놓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시간에 맞춰 4시 반까지 아파트 관리 사무소 앞에 나가 있었던 것인데, 이미 밖에 나와 기다리고 있다고 누나한테 문자를 보내니 늦을 것 같다는 답장이 왔다. 그렇게 계속해서 기다리다 보니 결국 차는 저녁 5시 반 조금 넘어서 도착했다... 누나네는 저녁 7시 비행기였기 때문에 나보다 더 촉박했는데도 상당히 여유로워 보였다 (차 타고 이동하는 내내 수다쟁이인 내가 한사코 입을 열지 않자 누나가 도중에 화 났냐고 물어 보면서 자기도 변명 거리조차 없다고 사과했는데, 거기에 나는 전혀 화 나지 않았으며 다만 내 옆 우버 드라이버가 마스크를 제대로 착용하지 않은 데다가 코로나 시국에 대중교통 타면 원래 조용히 있는다고 대답했지만, 솔직히 상당히 짜증난 상태이기는 했다. ㅋㅋ). 그래서 허겁지겁 공항으로 출발하니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하필이면 퇴근 시간이랑 맞물리는 바람에 평소라면 20분만 소요됐을 거리를 한 시간을 훌쩍 넘겨 걸려 이동했다 - 하지만 그날따라 길이 막힌 것은 후술할 다른 이유로 인해서였다.
비행기 체크인 시간이 긴박했다는 점과 차 막힘 현상만 제외하면 공항 가는 길은 꽤 재밌었다. 데이비스는 사실상 미국 특유의 광활한 농지 및 평야에 둘러싸여 고립된 대학 도시인데, 따라서 차를 타고 도심으로부터 15분만 이동해도 끝없이 펼쳐진 아몬드, 포도, 밀 등의 밭을 볼 수 있다. 약 한 달 전쯤 기차로 새크라멘토에 다녀올 때 확인하니까 데이비스 서쪽으로는 나름의 야생동물 생태 보호지처럼 지정된 평야가 위치했다. 바로 그 평야의 북쪽 부분이 새크라멘토 국제공항 가는 길에 내 눈앞에 전개됐는데, 해가 지기 시작해 분홍색과 보라색이 뒤섞인 파스텔톤 색깔의 하늘과 광야의 풍경이 맞물리니 내 눈은 즐거워 어쩔 줄 몰라 했다. 덕분에 간간이 핸드폰으로 사진도 찍고, 동영상도 찍으면서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데이비스 집에서 공항까지는 ‘ㄴ’을 직각으로 돌린 경로를 따라가면 된다. 다시 말해, Pole Line Road를 따라 쭉 위로 올라가다 우드랜드 아울렛 근처에서 동쪽으로 방향을 틀어 다시 직진하면 공항이 나온다. 그리고 ‘ㄴ’을 직각으로 돌린 도로들 안쪽에 갇힌 구역은 대부분이 농지 혹은 야생동물 보호 지역이다. 동쪽 방향으로 이동하는 중에 차가 ‘본격적’으로 막히기 시작했고, 덕분인지 때문인지는 아직도 모르겠지만, 그동안 우버 차의 사이드미러에 비친 노을과 고속도로, 그리고 평야의 사진을 몇 장 찍었다. 나는 자라면서 앞좌석에 타 본 적이 손에 꼽히기 때문에 사이드미러 뷰가 그렇게 인상깊을 수 있을지 전혀 몰랐다. 그래서 풍경 그 자체가 아니라 사이드미러에 비친 풍경을 이중으로 찍는 나의 시도가 매우 독특한 것으로 한동안 착각하고 있었는데, 얼마 안 가 SNS에 게시된 친구들의 사진을 통해 나는 후발 주자에 불과했음을 깨달았다. 항상 특별하기를 원하는 사람에게 자신의 예술적 취향이 보편적이라는 사실을 맞닥뜨리는 순간이 얼마나 씁쓸한지 타인은 가늠할 수 없을 것이다. 내 친구들 중 적지 않은 수가 미국에 살고 싶어하지만, 역설적으로 공항 가는 길의 아름다운 정경으로부터 나는 크나큰 이질감을 느꼈다. 도로의 왼편으로는 여전히 데이비스인지 우드랜드인지 모를 지역의 이층집들이 쭉 늘어 서 있고, 오른편으로는 드문드문 ‘이제 막 딴 과일에서 짜낸 싱싱한 주스를 맛보세요’ 같은 팻말이 말뚝에 박힌 농경지가 숨 막힐 정도로 넓은 규모를 자랑하고 있었다. 하루 이틀 정도면 그런 ‘문명의 흔적이 느껴질랑말랑하는’ 곳에서 지내는 것도 기분 전환을 위해 좋겠지만, 평생 차가 없으면 돌아다니기도 힘든 곳에서 해가 지는 모습만 한 시간 넘게 바라보는 것은 되려 마음마저 황량하게 만들 것 같았다. 뭐, 대도시에 살면 되지 않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지만, 대도시에 살 요령이라면 서울이나 도쿄 같은 편한 도시를 놔두고 굳이 태평양을 건너고 싶지 않다.
길이 너무 막혔던 나머지 슬슬 ‘비행기에 무사히 탑승할 수 있을까’라는 걱정이 들었다. 때마침 기사님께서 무슨 터미널로 가야 되냐고 물어 보셨다. 부끄럽지만, 나는 그 순간까지 항공사에 따라 공항 터미널이 다를 수도 있다는 점, 그리고 같은 공항이라고 해도 어떤 터미널이냐에 따라 우버의 목적지가 달라질 수 있다는 점조차 몰랐다. 내가 여지껏 다녀본 모든 공항 중에 터미널이 있는 곳도 전무했고 - 솔직히 두 해 전까지만 해도 미성년자였으므로 부모님만 따라가면 됐으니까 애초에 관심이 없었다. - 특히 인천 공항은 최근에 제2터미널이 개장하기 전에는 국내선도, 국제선도 모두 같은 곳에서 체크인 했기 때문에 이번 여행의 기점에 대해 완전히 순진무구했다. 그제서야 핸드폰에 미리 설치한 사우스웨스트 항공사 앱으로 체크인 장소를 확인하니 터미널 B로 가야 했다. 마침 알래스카 항공으로 예매한 B 누나네도 터미널 B에서 체크인해서 우버를 타고 나만 다른 곳에 가지 않아도 됐다. 기사 아저씨께는 어떤 터미널인지 확인하기도 전에 사우스웨스트와 알래스카 항공을 타야 한다고 말씀드리니까 바로 터미널 B로 행선지를 바꾸셨다. 역시 현지인은 달라도 한참 다르다고 느꼈다… ㅋㅋ
터미널 앞에 내리자마자 B 누나네는 허겁지겁 짐 부치러 뛰어갔기 때문에 제대로 인사하지도 못했다. 나로서는 SMF에 처음 간 것이었기 때문에 약간 긴장한 채 천장에 달린 표지판을 읽느라 바빴다. 애초에 여행 자체가 3박 5일밖에 안 되기도 했고, 또 처음으로 미국 국내선으로 이동하는데 일정에 차질을 빚고 싶지 않아서 배낭 하나에 모든 짐을 쑤셔 넣었다. 아예 캐리어를 포기하니 짐 부칠 일도 없고, 포틀랜드 공항에 도착해서 짐 찾을 일도 없어서 편하기는 했다. 다만, 여행 첫날과 마지막날 내 어깨가 꽤 고생했다. ㅠㅠ 그래서 체크인도 끝냈겠다, 보안 및 신분 검사대를 찾으러 조금 헤맸는데, 세상에 SMF는 터미널이 여러 개 있는 것으로도 모자라 환승장마저 터미널과 다른 건물에 위치했다. 트램을 타고 약 1분만 가면 됐는데 - 그럴 바에야 차라리 인천 공항처럼 두 장소를 연결하는 편이 나을 것 같지만 - 생판 모르는 곳이다 보니까 나 혼자 트램 정류장에 서 있을 때는 반신반의하다가 ‘누가 봐도 캐리어를 부치고 와서 들 짐이 없는’ 여행객들이 삼삼오오 내 주위로 모여들고 나서야 안심했다. 보안 검색대는 환승장 트램 정류장 바로 앞에 있었다. 저녁 7시에 가까운 시각이었는데도 꽤 많은 사람들이 줄 서 있었다. 2월 중순까지만 해도 아직 미국인에 대한 편견 - 미국인은 평소 코로나 방역도 잘 하지 않고, 마스크도 제대로 착용하지 않을 뿐더러 코로나 자체에 무심하다. - 이 가시지 않았기 때문에 나 혼자 앞 사람과 1미터 이상 거리를 두고 있었다. 그런 나의 방역을 위한 선입견 가득한 노력이 가상했는지 지금까지 한 번도 코로나에 감염되지 않았다. ㅋㅋ
무사히 보안 검색대를 지나니 여느 공항과 마찬가지로 면세점과 이런저런 식당이 나타났다. 공항에서 저녁을 해결할 생각으로 와서 음식점을 돌아보니 뭐 하나 특별할 게 없어서 결국 Burgers&Brew에서 아보카도 샌드위치를 사 먹었다. 새크라멘토 혹은 SMF에서만 맛볼 수 있는 메뉴를 찾고 싶었지만, 시간이 늦어서인지 아니면 원래 공항에는 무난한 것들밖에 팔지 않아서인지 금세 포기하고 말았다. 아보카도 샌드위치를 먹으면서 엄마, 아빠한테 이제 포틀랜드로 출발한다고 문자를 보냈다. 그다지 자주 연락하고 지내는 사이는 아니지만, 그래도 타지에 나가면 항상 생각나는 것 같다. 물론, 아빠는 예나 지금이나 그다지 보고 싶지 않다. 어쨌든, 식사하면서 SMF의 환승장을 천천히 둘러 보니 휘황찬란한 샹들리에를 포함해 인상적인 조형물이 여러 개 있었다. 나름 캘리포니아 주도랍시고 인테리어에 공을 들인 듯했다. 그리고 저녁을 주문하기 전에 B 누나한테 아까 우버 안에서 화 났던 게 아니라고 신신당부하면서 라스베거스에 잘 다녀오라고 안부 문자를 넣고 지금쯤 하늘을 날고 있겠거니 하고 있었는데, 웬걸, 답장이 와 있었다. 결국 우려했던 일이 실제로 벌어졌던 모양이다. 6시 반쯤 터미널에 도착해서 바로 짐을 부치러 가니까 알래스카 항공 직원이 시간이 너무 지체돼 더 이상 짐을 받아줄 수 없다며 탑승을 거절했다고 한다. 결국 B 누나네는 다음날 예정돼 있던 그랜드 캐니언 투어를 포기하고 새크라멘토 시내에서 하룻밤 잘 수밖에 없었다. 괜찮냐고 물어 보니까 그냥 낮에는 새크라멘토 돌아다니다가 저녁 비행기 타고 가면 된다고 답하던 B 누나의 긍정적인 마음가짐이 참 부럽기도 하면서 신기했다. 아마 WX와 같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그렇지만 내가 만약 그런 상황에 놓였더라면 일행의 유무와 관계 없이 하루 종일 인상을 찌푸리고 다녔을 것 같다. 아, 그리고 식사하면서 연락하던 중 B 누나 왈 공항 가는 길이 유독 막혔던 것은 우드랜드에서 새크라멘토로 가는 길목에서 유괴 사건이 발생했기 때문이었다. 총기 사고도 모자라 대낮에, 그것도 캘리포니아 주도 인근 지역에서 유괴라니… 절로 ‘This is America’를 외치게 되는 소식이었다. 앞으로도 내가 ‘This is America’라는 추임새를 덧붙이는 사건이 있다면, 그것은 결코 좋은 일은 아니리라.
사우스웨스트는 저가 항공사 중에서도 저렴한 편에 속하는 듯하다. 티켓을 예매할 때 가격도 가격이지만, 시간대와 항공사 리뷰도 중요하게 고려했는데, 사우스웨스트는 모든 측면에서 가성비가 좋다는 것이 나의 잠정적 결론이었다. 시간이 지나 나의 판단은 완전한 사실로 드러났다. 다만, 비행기 자체는 상당히 작고 부실해 보였다. 아마 작아서 부실해 보였다는 것이 올바른 표현일 것 같다. 모든 것을 최대한 경제적으로 운영하려는 항공사의 부단한 노력이 돋보였는데, 특히 좌석 간 간격이 상당히 좁고 심지어 좌석 앞에 개인 모니터도 없어서 출발 직전에 남성 승무원이 직접 구명 조끼를 시범 착용하며 안전 교육을 ‘말로’ 진행했다. 그 점만 충격적이었고, 나머지는 모두 괜찮았다. 이륙할 즈음에 바람이 많이 불었는데, 비행기도 작다 보니까 이러다 바람에 휩쓸리지는 않을까 걱정하기도 했지만, 그로부터 세 달도 더 지난 지금 멀쩡히 살아서 기행문을 작성하고 있지 않은가. ㅋㅋ 하늘을 가로지르는 한 시간 반 동안 책이나 읽으려 했는데, 비행기 타기 직전까지 하도 일이 많아서 그랬는지 얼마 안 가 골아떨어졌다. 푹 자고 일어나니 어느덧 포틀랜드 국제공항(PDX)에 착륙하기 직전이었다.
PDX는 잿빛이었다. 단순히 깜깜한 밤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 만약 주변의 명암을 얘기하고 싶었다면 차라리 어두웠다고 표현했으리라. - 모든 구조물이 조금의 우울을 품은 듯했다. 환승장에는 최소한의 조명만 켜져 있었고, 전반적인 인테리어 또한 톤다운돼 있었다. 바닥에는 버건디색 카펫이 깔려 있었는데, 명색이 장미의 도시인만큼 카펫에도 붉은 끼가 더 눈에 띠는 적갈색 장미들이 그려져 있었다. 이외의 구조물, 예를 들어 창틀이라든가 기둥이라든가는 대부분 회색이었다. 게다가 밤 9시 반이 약간 넘은 시각이어서 사람들도 별로 없었다. 코로나 바이러스의 확산세를 고려해도 올해 2월 즈음이면 여행을 떠날 수 있는, 혹은 떠나고 싶은 사람들이라면 충분히 포틀랜드 정도는 다녀올 수 있었을 텐데도 공항의 분위기는 전혀 밝거나 활기차지 않고, 대신 잿빛 첫인상에 걸맞게 차분했다. 심지어 환승장 밖의 메인 로비에도 대체로 불이 꺼져 있었다. 찾을 캐리어도 없었기 때문에 바로 공항 밖으로 나와 우버를 호출했다. 밤이어서 잘 안 잡힐까봐 걱정했는데, 의외로 금방 드라이버와 연결됐다. 차를 기다리는 동안 주위를 둘러보니 동양인이라고는 나 하나밖에 없는 것 같았다. 유색 인종 자체가 드물었고, 대부분 백인이었다. 그런데 같은 백인이라고 해도 뉴욕이나 샌프란시스코 같은 ‘국제적인 대도시’에 사는 백인과 ‘조금은 구석진 도시’에 사는 백인 사이에는 말로 표현할 수 없어도 선명한 괴리가 분명 존재하는데, 포틀랜드의 경우 후자에 속했다. 게다가 여행객들을 맞이하러 혹은 배웅하러 도착한 차량도 세단은 별로 없고 SUV 아니면 트럭이 대부분이라서 약간 긴장했다. 아무래도 잘 모르는 고장에서 나와 확연히 다른 사람들에 둘러싸이면 그곳이 얼마나 안전한지와 상관없이 자연스레 부자연스러운 감정을 느끼기 마련이다. 우버가 도착해서도 자그마한 에피소드가 하나 발생했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사람들이 공항 바로 앞에서 차를 타고 시내로 나가길래 우버도 내가 서 있는 쪽으로 올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우버 및 택시 탑승장이 따로 있었다. 그래서 20분 동안이나 가만히 서서 차를 기다렸는데도 차가 도착했는데 2분이 지나서야 탑승했다는 이유로 사소한 지각비를 내야 했다. 쓰는 동안 돌이켜 생각하니 포틀랜드 여행은 처음부터 끝까지 아주 삐걱거렸다.
호텔은 다운타운에서 조금 빗겨간 곳에 자리했다. 호텔로 가는 길에 소방차 몇 대가 경보음을 울리며 지나가서 경각심이 더 심해졌다. 그래도 얼마 안 가 윌라메트 강을 낀 다운타운 포틀랜드의 멋진 야경이 보이자 마음이 한결 놓였다. 사진이나 동영상을 남기고 싶었지만, 안타깝게도 나의 아이폰 SE2으로 야경까지 담기에는 기술적으로 무리였다. 이러나 저러나 다리를 건너 포틀랜드 서쪽으로 넘어갔다. 깜깜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그냥 멍하니 차창 밖만 보고 있다가 기사님께서 도착했다고 말씀하셨다. 주변에 아무것도 없길래 놀라서 ‘여기가 호텔이라고요?’라고 되물으며 고개를 두리번거리자 ‘Hotel DeLuxe’라는 간판이 보였다. 호텔 딜럭스는 어느 네이버 블로그를 통해 알게 됐다. 사실 포틀랜드에서 관광객들에게 가장 유명한 숙소는 지상에 스텀트타운 커피숍이 입접해 있는 4층인가 5층짜리 호텔인데, 거기는 비싸기도 하고 너무 도심 한가운데에 있어서 ‘덜 관광객스러운’ 호텔에 가고 싶었다. 하지만 초보 여행자가 그런 허황된 꿈을 가진다는 것 자체가 잘못된 일이었다. 블로그에는 고전 영화를 테마로 꾸민 4성급 호텔이라고 소개돼 있었는데, 포틀랜드의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해당 호텔을 3박 예약했다. 아니나 다를까 호텔 로비는 근사했다. 은은한 주황빛 조명으로 가득 찬 로비의 천장에는 멋스러운 샹들리에 몇 개가 달려 있었고, 바닥에는 진한 갈색으로 장미가 새겨진 황갈색 카펫이 깔려 있었다. 한 가지 단점이라 하면 현관 가까이에 벨보이나 경호원이 없는 듯했고, 또 현관에서 로비 사이에 계단이 있어서 리프트가 필요한 장애인이나 노인들에게는 다소 불편할 것 같았다. 계단을 올라가기 전 현관 바로 오른편에는 내가 알아볼 수 없는 어떤 고전 영화의 한 장면을 캡쳐한 사진이 액자에 걸려 있었다. 밤 10시가 넘어서 도착한 탓에 로비에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내 체크인은 신입처럼 보이는 어리벙벙한 여자가 담당했다 - 스탭이 그 사람밖에 없기도 했다. 여자는 내게 신분증과 카드를 요구했다. 1월 중순에 샌프란시스코 챈슬러 호텔에 숙박할 때 이미 미국 호텔에서는 보증금을 지불해야 한다는 점을 경험했기 때문에 놀랍지는 않았다. 그런데 호텔 딜럭스는 예약 대행 사이트에서 결제할 때는 서비스 수수료가 미포함돼 있기 때문에 3박에 해당하는 서비스 요금도 보증금과 같이 결제됐다. 대충 하룻밤에 만 오천 원 안팎이라길래 한 5만 원 정도 나갔겠거니 하고 방 키를 받고 올라갔다. 내가 배정받은 방은 재수없게도 2층이었다. 비수기라서 손님도 별로 없었을 텐데 도대체 왜 2층을 줬는지 도무지 모르겠다. 여하튼 그 어리숙한 여자 때문에 나는 포틀랜드를 여행하는 내내 찜찜한 기분을 느껴야 했다 - 곧 후술하겠다.
설레는 마음으로 방문을 열자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좋은 방이 내 눈앞에 놓여 있었다. 약 한 달 전쯤 샌프란시스코에서 묵었던 3성급 챈슬러 호텔은 위치만 좋았지 방 자체는 다소 형편 없는 축에 속했는데 - 굉장히 낡았다. - 호텔 딜럭스의 방은 그와 비슷한 가격에 공간도 넓고, 화장실도 아주 깨끗했다. 챈슬러 호텔의 화장실 역시 깨끗하기는 했지만, 호텔의 연식을 숨김없이 보여 줬다. 그에 비해 포틀랜드 숙소의 화장실은 마치 얼마 전에 리모델링한 것처럼 변기나 세면대, 욕조 등 모든 기구가 윤이 났다. 무엇보다도 방이 넓직하고 온도도 적당히 맞춰져 있는 데다가 방문을 딱 열었더니 라디오에서 은은하게 흘러나오는 클래식 음악이 잔뜩 긴장했던 심신을 안정시켰다. 여담이지만, 호텔에 머무는 내내 라디오를 어떻게 끄는지 몰라서 잘 때는 볼륨을 줄이고 낮에는 높이는 식으로 조절했다. 역시… 나는 상당히 기계치임이 분명하다. 방의 조명도 내가 좋아하는 은은한 주황색이었다. 한국에는 4, 5성급 호텔이 아닌 이상 주황 및 노랑 계열의 조명이 별로 쓰이지 않아서 아쉬웠는데, 외국에 나가니 그 점 하나는 원없이 누릴 수 있다. 또 여담이지만, 아무리 그래도 공부할 때는 LED가 잠도 덜 오고 눈 건강을 위해서도 더 나은 것 같다. 어쨌든 방이 무척 마음에 들어서 흥분했지만, 당장 다음 날 아침 7시에 기상해야 했으므로 더 이상 지체하지 않고 씻었다. 데이비스 집은 (분당 본가와는 비교 대상조차 될 수 없지만) 대체로 다 좋아도 욕조가 낡아서 딱히 욕조 바닥에 앉거나 드러눕고 싶은 생각이 일절 들지 않았는데, 포틀랜드에서는 폭포를 맞으며 수련하는 소림사 무술 고수처럼 욕조에 가만히 앉아 마음껏 물에 몸을 적셨다. 다만, 여기서도 슬리퍼를 제공하지 않아서 불편하더라도 까치발로 운동화를 신고 돌아다닐 수밖에 없었다. 샤워를 마치고 나서는 침대에 누워 TV를 틀고 이런저런 채널을 기웃거리다가 스티븐 콜버트의 심야 토크쇼에 정착했다. 때마침 우크라이나에 전쟁이 임박했던 시점이라 우크라이나에 파견돼 있는 리포터와 화상으로 대화하고 있었는데, 사태가 꽤 심각해 보여서 걱정스럽기도 했고 유튜브에서나 보던 스티븐 콜버트를 TV에서 라이브로 본다는 점이 신기하기도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설마 전쟁이 나겠어?’라고 가볍게 치부하고 있었는데, 설마가 진짜가 됐다. 세상은 우리가 예상할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가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내가 역사의 현장을 목격하고 있다는 점은 아직도 실감 나지 않는다. 푸틴은 스스로를 21세기 마키아벨리로 여기는 모양이지만, 나는 2020년대에도 마키아벨리즘이 (잘못된 방향으로) 실현될 수 있음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겠다. 하루를 마무리하기에 산뜻한 소식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여행 첫 날을 평화로이 보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오산이었다. 자기 전에 체크인할 때 얼마나 결제됐는지 확인하려고 우리은행 앱을 확인하니까 5, 6만 원이 아니라 무려 64만 원이나 출금돼 있었다. 너무 놀라서 내가 자리를 맞게 셌는지 다시 봤다. 눈 씻고 쳐다봐도 64만 원이었다. 그래서 바로 호텔 로비에 전화를 걸었더니 아무도 받지 않았다. 24시간 상시 대기해야 하는 리셉션이 투숙객의 전화에 응답하지 않는 일이 4성급 호텔에서 일어날 수 있음에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하는 수 없이 다급하게 상황을 설명하는 문자를 보내니 몇 분 뒤에 ‘나는 잘 모르겠다. 일단 나는 퇴근하니까 내일 아침에 로비로 내려와 다시 설명해 달라.’라는 성의 없는 답장을 받았다. 정말 어이가 없었다. 세상에 본인이 직접 가격을 띄워 놓고 내 카드를 긁었는데 어찌 된 일인지 모르겠다니, 그것이 말인지 방구인지. 애초에 내 방 키를 만드는 중에 계속 버벅거릴 때부터 그 컨시어지의 멍청함을 알아차렸어야 했다. 너무나 당황스러운 데다가 이 불상사로 인해 남은 2박 4일을 불행하게 보내고 싶지 않았기에 곧바로 호텔스닷컴과 우리카드 해외 문의 센터에 전화했다. 우선 호텔스닷컴 한국 지사에 내 상황을 설명하니까 직원은 아무래도 호텔 측에서 숙박비를 한 번 더 결제한 것 같다고 진단했다. 내가 호텔 측에서 체크인할 때 결제된 금액을 환불해 주지 않는다는 최악의 상황에 대한 우려를 내비치니까 직원 분께서는 호텔스닷컴은 어디까지나 예약 대행 업체이기 때문에 이미 자기네 손을 떠났다고 말했다. 내가 내일 아침 리셉션에 문의하러 갈 때 필요할지도 모르니까 3박 숙박비를 이미 결제했다는 영문 영수증을 발급해 달라고 부탁했다. 해당 영수증을 이메일로 받기는 했지만… 영문이 아니었으므로 결과적으로 호텔스닷컴은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했다. 그래서 우리카드에 전화해서 자초지종을 설명하니 상담원 분께서 우리나라 카드는 결제가 완료되지 않고 처리 중이더라도 해당 금액이 출금됐다고 표시하기 때문에 64만 원이 아직 결제되지 않았을 수도 있다고 말씀하시며 만약 최악의 경우가 발생한다면 그때는 우리카드 측에서 결제 자체를 취소해 버리면 된다고 말씀하셨다. 절차는 꽤 복잡해 보였지만, 그래도 64만 원을 아끼기 위해서 뭘 못하겠는가. 국제전화 두 통을 마치고 나니 호텔스닷컴에서 ‘체크인은 어떠셨나요?’를 묻는 설문 이메일을 보내 왔다. 평소 같으면 무시하고 말았을 이메일이지만, 호텔의 무성의하고 무책임한 대처에 화가 머리 끝까지 났던 나는 모든 항목에 가장 낮은 등급을 매겼다. 그 날 30분간 국제전화 두 통을 걸었던 탓에 3월 AT&T 요금 청구서에 220불이 덤으로 얹혀졌다. 호텔 딜럭스의 그 멍청한 직원 덕분에 나는 포틀랜드 여행 내내 언짢았던 것으로도 모자라 한화로 25만 원 정도 되는 요금까지 추가로 지불해야 했다. 나는 착하지 않다. 상호성이야말로 이 세상이 멀쩡히 돌아갈 수 있는 이유 중 하나라고 믿는 자로서 그 멍청한 여자에게도 황당한 일이 닥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2月19日
1. Blue Star Donuts에서 아침 식사
2. 포틀랜드 시내 구경: Portland Art Museum ~ South Park Blocks ~ Arlene Schnitzer Concert Hall
3. Salmon Street Springs
4. Mill Ends Park
5. Waterfront Park Trail
6. Portland Oregon White Stag Sign
7. Stumptown Coffee Roasters
8. Powell's City of Books
9. Washington Park: International Rose Test Garden ~ Portland Japanese Garden ~ Shakespeare Garden
10. Salt & Straw
11. The Freakybuttrue Peculiarium and Museum
12. Pioneer Courthouse Square
13. Pioneer Place
14. Hawthorne Bridge
15. Huber's Ca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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