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폴 사르트르는 소크라테스나 플라톤 같은 고전 철학자들 외에 내가 처음으로 공부했던 사상가다. 아직 옥스퍼드 PPE에 지원할 줄 알았던 고등학교 1학년 초, 나는 <아르케>라는 신생 철학 동아리에 가입했다. <아르케>에서는 매주 한 명씩 자신이 관심 있는 철학자 및 철학 사상을 골라 그에 대한 발제문을 작성하고, 부원들과 공유하고, 토의를 진행했다. 내 차례가 다가왔을 때, '누구를 소개할까'라는 질문은 머릿속에 오래 머물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동아리에 가입하던 순간부터 나는 사르트르의 실존주의에 대해 공부해 보리라고 다짐하고 있었다. 지금 와서 돌이켜 보면 '공부'라는 단어를 쓰기에는 너무 미숙한 수준이 아니었을까 싶다. 고등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읽었던 <지식인을 위한 변명>과 <처음 읽는 현대 프랑스 철학>의 사르트르 편 덕분에 나의 자신감에는 충분한 근거가 뒷받침돼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그 근거란 피상적이기 짝이 없을 뿐, 나의 믿음은 소위 근거 없는 자신감이었다. 자유도, 자기기만도, 구토도 모두 수박 겉핥기식으로 깨쳤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기억나는 개념이 없다. 어쩌면 이번에 읽은 <말>이라는 자서전도 시간이 지나면 또 다른 자기기만이 될지도 모른다. 말년의 사르트르가 그토록 혐오했던 '문학병'을 그대로 앓고 있는 나로서 작가의 말을 온전히 이해하기란 불가능했다. 그러나 적어도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라는 유명한 구절이 어떠한 과정을 거쳐 사르트르 실존주의의 표지가 됐는지는 어렴풋이 알겠더라.
<말>은 사르트르가 노벨상 수상자로 지정된 해에 출간됐다. 이미 너무 유명한 사실이지만, 1964년 그는 "노벨상의 서양 편중과 작가의 독립성 침해, 문학의 제도권 편입 반대 등을 이유로 수상을 거부했다." 그렇기에 나는 <말>이 더욱 의미심장한 작품으로 거듭났다고 생각한다. 사르트르, 그는 누구인가. 20세기 중반의 가장 떠들썩한 이슈를 몰고 다닌 스타 지성인이기 전에 그는 천생 작가였다. 자서전에 "말"이라는 제목을 붙이고, 구성을 "1부 읽기"와 "2부 쓰기"로 설정한 사실에서도 자명히 드러나듯 그의 인생은 오로지 글로써만 정의된다. 작가로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영예를 스스로 물리쳐 사르트르는 자신이 유년 시절부터 무려 30년 동안이나 간직했던 '문학병'을 극복한다. 물론, 역자인 정명환 교수는 과연 사르트르가 살아생전 '문학병'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났는지에 대해서는 회의하지만.
읽기와 쓰기는 모두 글을 매개로 하는 인간 활동(human behaviour)이다. 동물에게도 저마다 고유한 언어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과학적으로 입증되기는 했으나, 문자를 통해 소통하는 종은 아직 인간밖에 없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한 맥락에서 사르트르가 '문학병'을 극복해야 한다는 강렬한 투지로 유년 시절을 성찰한 끝에 다다른 결론은 그만의 고유한 휴머니즘과 연결된다. 작가는 선택받은 인물이며, 비록 이승에서의 삶이 비극적일지라도 후대의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누구보다 위대한 지위를 점하게 되리라는 오래된 "신경증." 그 신경증이 바로 '문학병'임을 간파하고, 척수에 새로운 피를 수혈한 뒤에도 남은 유일한 자아는 "세상의 모든 사람들로 이루어지며, 모든 사람들만큼의 가치가 있고 또 어느 누구보다도 잘나지 않은 한 진정한 인간" (272). 그 인간적 정체성의 보편성이야말로 모든 작가들, 더 나아가 모든 사람들이 자기기만을 하지 않더라도 이 세상에 정당한 존재 이유를 확보할 수 있다고 사르트르는 말한다. 적어도 나는 이렇게 해석한다.
일종의 사후 확신 편향이기는 하지만, 모든 책은 그것을 읽을 당시 독자의 삶과 매우 유기적인 관계를 형성한다고 생각한다. 이를테면 책이 현재 내 삶에서 부족한 요소들을 채워 주거나 당장의 처지를 반영하는 듯해 텍스트 속 작가의 목소리와 독서하는 자아가 결합한다. 사르트르 역시 유년 시절에는 쥘 베른의 모험 이야기 등에 등장하는 탐험가형 영웅들에 자신을 투영해 아버지의 부재와 할아버지의 연극으로 인해 유실된 자신의 존재 가치를 발견하려 애쓴다. 처음에는 '읽기'라는 비교적 수동적 행위로써 자기기만에 빠져들었다면, 이내 그 한계를 인식하고 '쓰기'의 단계로 넘어간다. '쓰기'란 문자를 매개로 자신이 바라는 세상을 마음껏 창조할 수 있도록, 다시 말해 자신의 존재 가치를 '발견'이 아니라 '정립'할 수 있게 한다. 그렇지만 아홉 살의 사르트르가 고백하듯이 '쓰기'가 아무리 자유롭더라도 말의 본질은 결코 대상에 선행할 수 없다. 실존은 본질에 앞설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러한 깨달음의 연속 덕분에 자기만의 성에 갇혀 있던 왕자님은 비로소 광장으로 걸어 나온다. 자신의 개성도, 사명도 잊은 채. 애초에 사명이라는 표현 자체가 지극히 미래적이지 않나. 내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하늘이 나에게 부여한 운명이란 것이, 한동안은 나의 존재 이유가 되겠지만, 그 부조리함을 눈치챈 순간부터는 너무나 슬픈 이야기처럼 들릴 것이다. 사르트르처럼 실존의 문제로까지 끌어올릴 수는 없지만, 나도 최근 나만의 문학병을 감지해 버렸다. 정확히 말하면 감지는 예전부터 하고 있었지만 이제는 그것이 인식될 정도로 분명해졌다. 대학 오케스트라에서 스스로 걸어 나가길 강요받는 경험, 내가 그리던 미래와 현실의 괴리, 이 모든 것들이 이제는 나 역시 자기기만을 그만두어야 한다고 합창한다. 하지만 사르트르도 30년 이상 걸린 일을 내가 어느 세월에 이룩할 수 있을지, 두고 볼 일이다.
나의 작품과 나의 죽음이라는 두 개의 열쇠, 나의 비밀을 풀어 줄 그 두 열쇠를 갖게 될 2013년의 사람들은 이 갑작스런 불안과 의혹을, 이러한 목과 눈의 움직임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P.S. 지난 겨울에 제작했던 박완서 타계 10주기 다큐멘터리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의 제1부인 "만인의 작가, 글에 살다" 중 모든 작가들은 자신의 최신작이 최고작이길 바란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그 말을 한 <조선일보>의 김민철 기자는 봉준호 감독의 구절을 인용했다고 밝혔지만, 아마 봉준호 감독은 <말>의 "나의 가장 훌륭한 작품은 내가 지금 쓰고 있는 작품이다" (256)라는 구절을 빌렸던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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