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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Reviews

박완서,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by 도미니크앙셀 분당점 2021. 8. 29.

박완서라는 이름 석 자가 얼만큼의 감동을 줄지 가늠하지 못한 채 코웃음을 쳤던 날들이 있었다. 항상 '잘 쓰긴 해도 확실히 노벨상을 탈 정도는 아니더라' 등의 잘난 척을 곁들였다. 지난 겨울 <대학신문>에서 한창 박완서 다큐멘터리를 준비하던 참에 토니 모리슨의 <Beloved>를 읽었던 터라 무턱대고 비교의 잣대를 들이밀기도 쉬웠다. 하지만 그로부터 몇 달이나 흐른 지금 돌이켜 보면 참 철없고 무지한 사대주의였다는 생각이 든다. 문화적 풍토가 다르고, 맥락이 다르고, 무엇보다 그동안의 삶이 확연히 다른데도 불구하고 왜 한국 작가들로부터는 모리슨처럼 환상적인 내러티브를 발견할 수 없을까 의문을 제기한 것 자체가 유아적이었다. 나에게 박완서만큼이나 '만약'이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하는 작가도 없다. 만약 그의 오빠가 죽지 않았더라면 (그렇다면 '박완서 문학' 자체의 근간이 사라지는 꼴이므로 이 질문은 되도록 하지 않았다), 만약 그의 아들이 요절하지 않았더라면, 만약 그가 <미망>을 완성했더라면, 만약 그가 더 오래 살았더라면... 달리 말하면, 나에게 박완서는 아쉬움이 많이 남는 작가다. 그가 가지고 있던 것에 비해 세상은 너무나 무정하게 흘러갔다. 만약 그의 아들이 잘 살아 있어 80년대 당시 연재 중이던 <미망>을 기획한 대로 '대하'소설로 마치고 지금까지 생존해 계셨더라면 노벨 문학상도 충분히 가능하지 않았을까. 그러나 이는 오직 나만의 생각일 뿐, 박완서는 작가로서 본인에게 주어진 소임을 탁월하다 못해 천재적으로 완수하고 타계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만약'으로 시작하는 앞의 전제들이 어디까지나 조건문으로 남았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와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그리고 <한 말씀만 하소서> 같은 명작들이 탄생할 수 있었다. 참척의 고통으로부터 헤어나오려는 몸부림이 없었다면 "소설로 그린 자화상" 따위는 애초에 거들떠 보시지도 않았으리라.

 

고교 3학년 국어 수업에서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를 공부한 이래,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2학년 국어 Paper1 산문으로 <노란집>에 수록된 "현대의 천국"이 출제된 이래 나는 매해 박완서와 일정한 관계를 형성해 왔다. 햇수로 4년째 되는 올해 겨울에 <대학신문> 다큐멘터리 3부작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로 화룡점정을 찍었을 뿐이다. 작가의 타계 10주기를 기리는 다큐멘터리 시리즈의 제목을 저렇게 단 것은 기필코 작가의 최고작이기 때문이라기보다, 대중적으로 가장 잘 알려졌을 뿐만 아니라 내게 가장 큰 의미를 가지는 작품이었기 때문이었다. 최고작은 사실 다큐멘터리 2부에서 장녀 호원숙 작가가 밝혔듯이 "소설로 그린 자화상" 2부에 해당하는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다. 굳이 다큐가 아니더라도 여타 매체에서 금방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이 그 작품의 존재조차 모를 정도로 희한하게 베일에 쌓여 있는 듯하다. 애석하게도 다큐 감독이었던 나도 들어보기만 했지 편집이 끝날 때까지 읽어 보지도 않았다. 프로젝트가 마무리됐는데 이제 와서 그 작품을 다시 집어 든 내가 의아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1학기 내내 박완서만 지겹도록 우려먹어서 '기자상'이라는 뜻하지 않은 명예까지 얻은 마당에 대작가에게 진 빚을 조금이나마 덜고 싶었다. 작가에게 고마움을 표하는 최고의 방법은 아무래도 열성적인 독자가 돼 주는 것 같아 이 여름의 끝자락에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를 펼쳤다.

 

"천의무봉의 작가." 생전 박완서와 친했던 김윤식 평론가가 그에게 내린 찬사이자 별명이다. 나는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를 읽는 내내 한동안 까먹고 있던 그 별명을 다시금 상기할 수밖에 없었다. 문학에 대한 견식이 없는 나로서는 어떻게 표현해야 적절할지 의문스럽지만, 정말 압도적인 밀도가 느껴졌다. 어느 문장 하나 마음 편히 넘길 수 없었고, 또 그렇게 스쳐지나갈 만한 문장 하나 없었다. 근래 읽었던 픽션 중에서 가장 선명한 풍경을 제시함은 물론, 박완서 문학의 원형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앞서 언급한 다큐의 3부 말미에 시리즈 제목의 의미를 설명하고 대단원을 마무리한다는 얄팍한 의도로 이런 내래이션을 삽입했다: "꼬마 박완서가 던진 최초의 질문,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싱아가 온동네에 피어 있던 시대를 기억하는 이들은 이제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줄곧 박완서의 글과 함께 성장해 온 우리들은 지금부터라도 새로운 질문을 던져 볼 수 있지 않을까요. 무수히 많은 싱아가 바람에 산들산들 몸을 흔드는 풍경을 다시 일구어 낼 수 있을까." 말이 안 되는 소리는 아니지만, 이 문구를 작성할 적에 '과연 싱아를 박완서 문학의 원점으로 해석해도 괜찮을까'라는 걱정을 품기도 했다. 아니나 다를까, 싱아와 박적골은 때때로 비수보다 더 날카로운 작가의 문체나 시선을 포괄하기에는 지나치게 싱그러웠다. 누구나 박완서 작가의 사진을 보면 푸근한 어머니, 혹은 할머니를 연상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의 해맑은 미소 뒤에는 이데올로기에 베인 깊은 상처와 징그러울 정도로 억센 인간의 생존 본능을 폭로하고자 주름진 양손이 쉴 새 없이 글자를 쏟아내고 있었다.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는 작가의, 그리고 인간의 그러한 다면성을 명징하게 보여준다.

 

책장을 덮자마자 나는 '그래서 그 산이 도대체 어떤 산이지'라는 생각이 번쩍 들었다. 왜냐하면 소설 속에 산이라 할 만한 배경이 '의미심장하게' 등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나마 스물한 살의 박완서가 올케, 그리고 갓난아기 조카 현이와 피난 중에 머물렀던 구렁재를 떠올릴 수 있겠다만, 애초에 작가가 그곳을 특별히 지목해 제목을 지은 것 같지는 않다. 이와 관련된 의문은 오히려 "작가의 말"을 통해서 해결할 수 있었는데, 다소 싱거운 해석일지도 모르겠다. 궁극적으로는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와 동일선상의 문제의식을 반영한다고 생각한다. 1.4 후퇴 이후 인민군 치하의 서울에 남겨진 자들의 역사는 그 어떤 공문서에도 기록되지 못했다. 대통령과 그 내각은 물론, 일반 시민들까지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남쪽으로 피난했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박완서네 가족은 한강을 건너기 직전 오빠가 다리에 총상을 입은 탓에 차마 피난 행렬에 합류하지 못하고 낙오됐다. 혈관에 붉은 피가 흐른다는 것보다 머릿속에 빨간 피가 찼는지 하얀 피가 찼는지가 훨씬 중요했던 시절, 타의건 자의건 서울에 잔류했다는 사실은 낙인이 될 것이 뻔했다. 그래서 차마 말하지 못했던 그때의 참혹한 생존 일지를 작가는 자전소설의 일부로 당당히 포함시켰다. 나라도 기억해야지. 기억하고 글로써 토악질해야만 벌레의 시간을 모면할 수 있다던 대학생 박완서의 결의는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에서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로 이어진다. 하지만 후자에서는 자기 구원의 차원을 넘어 역사적 기록의 성격이 더 짙게 나타난다. 전자에서의 고백으로 인해 자신과 가족은 이미 소생됐고, 이제는 하늘 위의 깃발이 수시로 바뀌는 때 인간이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는가를 써야 했다. 박완서의 그러한 결의와 독기는 소설 속 '나'의 치열한 심리 묘사에 고스란히 드러난다. 후반부에는 서서히 죽어가던 오빠가 마침내 숨을 거둔 이후의 이야기가 전개되는데, 그 시절 박완서네 가족이 얼마나 '삶'에 천착했는지 생생히 묘사된다. 경황 중에는 죽음도 스치는 비극에 불과하다는 것을, 그로 인한 슬픔은 밀물처럼 천천히 스며들어 평생의 족쇄가 된다는 것을 그 시절의 사람들은 너무도 자연스럽게 체득했다.

 

박완서 문학의 원형은 어디에 존재할까, 참 많이도 고민했다. 크게는 한국전쟁의 경험을 꼽을 수 있겠다. 그런데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의 결말 부분을 읽다 보면 결국 엄마와의 끝없는 대결이 아니었을까도 싶다. 작가의 어머니인 홍기숙 여사와 박완서는 놀랍도록 서로 닮았다. 정작 작가는 자기 엄마의 알량한 자존심과 현실을 애써 외면하고 싶어하는 뻔뻔스러움을 줄곧 비판했지만. 미군 PX 초상화부에서 화가들에게 핀잔을 주던, 근숙이 언니와 동업해 세운 베이커리 카페를 망하게 했던, 다른 가족과 함께 천안으로 가지 않고 향토방위대원들을 따라 온양으로 갔던 스무 살 남짓의 박완서는 자기 안에서 엄마의 흔적으로 뼈저리게 느낀다. PX에서 근무하며 자신이 그렇게 특별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은 후에야 그는 조금씩 변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우직하지만 평범한, 중인 가문의 남편과 결혼했을 때 마침내 그는 엄마와는 다른 궤도에 첫 발을 디딘다. 그렇게 엄마와의 대결 역시 시작되고, 박완서 문학의 뿌리가 형성된다. 그러나 우리 모두가 알다시피 박완서 작가는 절대 평범한 인물은 아니었고, 그 점에서는 홍기숙 여사의 "내가 너를 어떻게 길렀는데. 너는 보통 애하고 다르다. 공부 많이 하고, 마음만 먹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고, 될 수도 있는 애야."라는 장담이 꼭 들어맞았다. 다만, 범인의 세월 동안 숙성된 경험이 그를 위인으로 떠받쳐 주지 않았을까.

 

우리는 둘러앉아, 사랑하는 가족이 숨 끊어진 지 하루도 되기 전에 단지 썩을 것을 염려하여 내다 버린 인간들답게, 팥죽을 단지 쉴까 봐 아귀아귀 먹기 시작했다.

박완서.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웅진지식하우스, 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