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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Reviews

무라카미 하루키, <태엽 감는 새 연대기>

by 도미니크앙셀 분당점 2022. 1. 21.

오랜만에 읽는 하루키. 사실 '참 오랜만에'라고 쓰고 싶었지만 오늘 낮에 읽던 3권 후반부에 "나는 잘 모르겠네. 오랜만이라는 거, 참이라는 거."라는 대사가 자동으로 상기되는 바람에 한 글자짜리 부사를 빼 버렸다. 그러게, 정체를 알 수 없는 여자의 말마따나 오랜만이라는 거, 참이라는 거, 나도 잘 모르겠다. 얼마나 시간이 지나야 '오랜만이네'라고 말해도 자연스러울까. 지구가 몇 번이나 회전해야 '참'이라는 수식어를 붙여도 어색하지 않을까. 하루키의 소설을 읽다 보면 아무렇지 않게 흘려 보냈던 수많은 일상의 파편이 다시 제 뾰족한 끝을 되찾고 빛을 반사해 내 눈을 따갑게 한다. 여느 문학 작품이나 그러한 효과를 자아낸다고 누군가는 반문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하루키는 분명 그만의 뚜렷한 색채를 가지고 있다. 강렬한 동시에 거의 투명에 가까운 문체로 독자의 주의를 순식간에 사로잡고 금새 그가 태연하게 풀어내는 이야기 속으로 우리를 끌어들인다. 아마 스스로 하루키와 벽을 둔 것 같다고 느끼는 사람들 - 그렇다고 내가 하루키 팬이거나 그의 소설을 특별히 좋아하지는 않은듯 하다 - 도 그가 특출난 이야기꾼임에는 동의할 수밖에 없다.

 

출간 25주년 기념 민음사 완역본을 이번에 읽으면서 하루키가 옛날에 '했다는' 말을 떠올렸다. 세상 사람들은 프루스트를 읽은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으로 나뉜다고. 예전에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를 읽을 당시에는 해당 코멘트와 프루스트의 존재조차 몰랐기에 눈치채지 못했지만, 소위 성인이 되고 난 후에 하루키 작품을 읽으니 확실히 프루스트의 그림자를 감지할 수 있었다. 지나친 사후 확신일까. 그래도 나는 프루스트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선보인 특유의 내러티브 양식, 즉 속되게 표현하면 별 것 아닌 일도 세세히 표현함으로써 하나의 현상으로 탈바꿈시키는 재주가 미국 문학에서나 볼 법한 짧고 쿨한 문장들 안에 스며들어 있다고 느꼈다. 어쩌면 <태엽 감는 새 연대기>처럼 하드보일드한 작품을 통해서 선과 악, 환상과 현실, 그리고 이 모든 이분법적 인식 체계의 붕괴 같이 미묘한 이야기를 전달하려면 프루스트적인 감성이 반드시 필요했을지도.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고 지금 여기에 쓴다.

 

3권짜리 시리즈물을 12월 중순부터 읽기 시작해 1월 중순에 완독한 꼴이니까 1, 2권의 경우 내용도 가물가물하다. 그러나 내가 이미 말하지 않았나. 하루키는 치명적일만큼 뛰어난 이야기꾼이다. 나는 그가 주인공 오카다 토오루의 입을 빌려 그리는 한적한 도쿄 주택가의 여름과 겨울 풍경에도 감동했지만, 그러한 잔잔한 일상과 동시에 전개되는 온갖 자극적인 사건들이 뇌리에 훨씬 깊숙이 박혀 있다. 1권 후반부에 마미야 중위가 편지로써 전한 그의 끔찍한 전쟁 경험은 등골에 소름을 돋게 하기에 충분하다 못해 지나치게 생생하게 서술돼 있었다. 제2차 세계전쟁이 끝나갈 무렵 만주, 대몽골평원, 그리고 시베리아에서 벌어진 광기 어린 폭력 사태. 20세기 후반 도쿄에서 조용히 하지만 서슴없고 맥락없이 이어지는 '넌센스'의 연속. 버려진 주택의 깊숙한 우물 바닥에서나 출입할 수 있는 '도저히 알 수 없는' 미지의 세계. 이 세 가지 줄기의 이야기는 별도로 전개되며, 마치 알고리듬의 노드처럼 각각의 줄기가 서로를 잠시 스칠 뿐, 그것들이 어떤 연관을 맺는지는 끝까지 모호하다. 그러니까 <태엽 감는 새 연대기>는 불친절하기 그지없다. 하루키는 이 모든 장대한 서사에 대한 이해를 독자의 몫으로 떠넘길 뿐, 나처럼 우둔한 사람을 위한 해설을 굳이 덧붙이지 않는다. 오히려 그렇기에 그의 '공백이 많은 듯한' 글에는 텍스트를 읽을 당시의 심상이 곁들여져 더 개인적인 경험이 탄생하는 듯하기도 하다. 예를 들어 너무나 고된 한 해를 보냈던 나로서는 오카다에게 나 자신을 상당히 투여할 수밖에 없었는데, 주인공도 소설이 시작되는 지점에는 몇 년간 근속하던 법률사무소를 관뒀기 때문이다. 더이상 아무것도 정해지지 않은 텅 빈 일상을 <도둑 까치> 서곡을 들으며 파스타를 만드는 등의 소소한 일들로 채워 나가는 오카다와 그의 정갈하고 하얀 - 외벽이나 인테리어가 하얗다는 언급은 어디에도 없지만 왠지 모르게 흰색이 보인다 - 집을 떠올린다. 그러면 나도 절로 80년대의 한적한 도쿄 주택가에 우두커니 서서 한가로이 매미 우는 소리를 듣고 있다. 현실과 환상 그 중간의 어딘가에서 오카다는 방황하고, 태엽 감는 새 아저씨의 모험을 읽어 내려가는 나도 소설이라는 허구와 따뜻한 침대 사이 제3의 공간에서 그를 관망한다. 튼실한 지지대도 없이 우리는 끝없이 부유한다. 오카다 토오루가 와타야 노보루의 마법으로부터 와타야 구미코, 아니 오카다 구미코를 구원하기 직전까지.

 

자, 어차피 일주일 뒤면 대부분의 내용을 까먹을 나 - 혹은 나처럼 기억력이 좋지 않은 여러분 - 를 위해 대강이나마 줄거리를 정리하자. 벌써 정확한 배경을 잊어 버렸지만, 제1권 <도둑 까치>는 80년대 중반 도쿄의 어느 적당히 부유한 주택가에 거주하는 오카다 부부가 '와타야 노보루'라는 고양이를 잃어 버리면서 시작된다. 사실 와타야 노보루는 오카다 구미코의 친오빠 이름인데, 어딘지 모르게 그 와타야를 닮았다고 그런 달갑지 않은 이름으로 불린다. 참고로 오카다네, 특히 오카다 토오루는 와타야 노보루를 싫어한다. 참, 생̇각̇ 없̇는̇ 부부 아닌가. 어쨌든, 사라진 고양이가 일주일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자 구미코 - 와타야家는 원래 점쟁이 등의 영적인 무속인들을 신뢰할 뿐만 아니라 가문 대대로 그런 영험한 세계와 끈끈한 관계를 유지해 왔다 - 는 가노 마르타(몰타섬의 '몰타'를 일본식으로 읽었다)라는 수수께끼의 여자에게 실종 사건을 의뢰한다. 구미코가 사라진 고양이를 되찾는 데 열중인 와중에 구미코는 바쁘다는 '핑계'로 가노 마르타는 대부분 오카다 토오루가 대면하게 된다. 그런데 시리즈를 완독하니 가노 마르타는 애초에 고양이보다도 구미코가 와타야家의 인물이라는 점과 오카다라는 인물에게 접근할 생각으로 의뢰를 접수한 듯하다. 가노 마르타는 고양이 찾기와 관련된 힌트는 하나도 주지 않고 오카다를 처음 만나자마자 대뜸 자기 여동생인 가노 크레타(크레타섬의 크레타다)가 와타야 노보루에게 겁탈당했다고 토로한다. 사실 그 충격적인 사실을 무척이나 대수롭지 않게 전하기에 '토로'라는 단어는 조금 부적합해 보인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온 오카다는 - 내 기억이 맞다면 - 구미코가 남긴 편지를 통해 그녀가 가출했을 뿐만 아니라 일이 바쁘다며 늦게 귀가하던 한동안 죄책감도 없이 불륜을 저질렀으며, 심지어는 이혼하기를 원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오카다는 차분히, 그리고 서서히 패닉 상태에 접어들게 되지만 수수께끼의 여자가 걸어온 이상한 전화를 몇 번인가 더 받게 되고, 가노 크레타를 직접 만나기까지 한다. 사실 가노 크레타는 현관이 아니라 무̇슨̇ 벽̇을̇ 통̇과̇한̇ 것̇처̇럼̇ 오카다네 집 안으로 침투한다. 오카다가 그녀에게 어떻게 들어왔냐고 물어 봐도 그녀는 모른다고 할 뿐이다. 어쨌든 가노 크레타는 자신의 고통스러운 삶을 차근차근 얘기하다가 비로소 와타야 노보루가 어떻게 그녀를 더̇럽̇혔̇는̇지̇를 설명하는 대목에서 불현듯 사라진다. 그녀는 앞으로도 연기처럼 나타났다가 연기처럼 사라진다. 그후 며칠이 흘렀을 때 오카다는 혼다라고 하는 늙은 점쟁이의 부고 소식을 듣는다. 혼다는 구미코네 부모님의 추천으로 신혼 초기에 오카다 부부가 정기적으로 방문했던 점쟁이인데, 그런 그가 오카다에게 유품을 남기고, 오카다는 유품을 마미야 중위로부터 전해 받는다. 참고로 유품은 텅 빈 상자였다. 아, 그리고 혼다는 살아생전 오카다를 볼 때마다 '물을 조심해야 해. 위로 가야할 때는 위로 가고, 아래로 향해야 할 때는 아래로 가야 한다'와 같이 모호한 예언을 중얼거렸다. 마미야 중위는 혼다의 전우로, 일본이 패전하기 직전 만주에서 복무하고 있었으며, 노몬한 전투 중 소련 장갑차에 깔려 왼팔을 잃었다. 사실 그는 노몬한 전투 전에 조직된 대몽골 평원 비밀 탐사대에 혼다 하사와 함께 파견됐을 뿐 그 이후에는 혼다와 재회한 적도 없었다. 제1권은 마미야 중위가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간 뒤 오카다에게 써서 보낸 편지의 내용을 곧이곧대로 소개하며 끝난다. 그런데 그 내용이 상당히 충격적이다. 비밀 탐사대는 마미야 중위와 혼다 하사를 포함해 총 네 명으로 구성됐는데, 그중 군장은 달고 있지 않았으나 누가 봐도 군 내부 관계자 같은 사내가 탐사대를 안내했다. 그들의 주된 업무는 지도 제작하기였다. 따라서 대학에서 지리학을 전공한 마미야 중위가 파견됐던 것이다. 할하강을 건너서 그들은 마침내 만주국의 국경 지대를 넘어 소련 치하의 몽골 땅으로 침입했다. 그런데 얼마 가지 않아 그들의 행방이 몽골군에게 적발돼 탐사대는 몽골 및 소련군 추적대의 눈을 피해 다시 도강하려 했다. 하지만 불행히도 그들이 자고 있는 동안 몽골군은 그들의 텐트를 발견했고, 결국 4인의 탐사대 중 한 명은 몽골군에게 이미 칼로 베여 죽고, 탐사대의 정체불명의 리더 역시 고문 당하다가 죽는다. 하루키는 그 고문을 매우 생생히, 그리고 잔인하게 묘사한다. 어떤 고문이냐 하면, 바로 사람의 거죽을 벗겨서 과다출혈로 천천히 죽게 하는 고문이었다... 그 고문을 집행한 소련 비밀 경찰관이 바로 보리스라는 작자로, 그는 이후 시베리아의 탄광 수용소에서 마미야 중위와 재회한다 - 무슨 질긴 인연이람. 마미야 중위는 운̇ 좋̇게̇ 살아남아 버려진 마을의 깊은 우물 속에 내던져진다. 그리고 깊숙한 우물 바닥에서의 초월적 경험으로 인해 마미야 중위는 삶의 의지를 완전히 박탈당해 버린다. 그런 그를 저멀리 따로 떨어져 그 모든 끔찍한 광경을 지켜보던 혼다 하사가 우물로부터 끌어내 단 둘만이 만주의 일본군 기지로 귀환한다.

 

여기까지가 제1권의 줄거리인데, 제2권이나 제3권의 내용까지 일일이 열거하자니 너무 힘들어서 그만두겠다. 여하튼 이 거대하고 장대하고 시공간을 그야말로 초월하는 이야기는 오카다가 와타야 노보루에게 치명적인 상해를 입히고 현실 세계의 구미코가 물리적으로 오빠의 목숨을 앗아감으로써 막을 내린다. 자, 그런데 갑자기 왜 와타야 노보루가 죽냐. 왜냐하면 와타야 노보루가 이 소설 속에서 실질적인 악역을 담당하기 때문이다. 물론 하루키는 적나라한 이원적 구분법을 싫어하겠지만, 이 연대기에서 대충 善은 오카다 토오루 - 마미야 중위이고, 惡은 와타야 노보루 - 거죽 벗기는 보리스로 추측된다. 그런데 여기에 구미코, 가노 마르타와 가노 크레타, 가사하라 메이(라는 여자 고등학생도 비중있게 나온다), 넛메그와 시나몬이 나름의 조력자로 등장한다. 앞에서는 세 줄기의 이야기가 독자적으로 전개되고 있다고 썼지만, 실은 넛메그와 시나몬 - 둘은 모자 지간이다 - 을 통해 마미야 중위의 만주 이야기와 오카다의 투쟁은 연결된다. 오카다는 원래 지극히 평범한 인간이다. 하지만 구미코가 떠난 후에 이유도 없이 오른쪽 뺨에 커다란 파란 반점이 생기고, 또 몇 년 전 훗카이도의 어느 카페에서 마주쳤던 기타를 멘 사나이를 갑자기 신주쿠에서 재회해 그를 추적하다가 난데없이 난투극을 벌이다가 사나이가 들고 있던 야구 방망이로 사나이를 내리친다. 그렇게 그는 야구 방망이를 손에 넣는다. 오른뺨의 파란 반점과 야구 방망이. 이 두 가지 특징은 패전 직전까지 만주국에서 동물원 수의로 일하던 넛메그의 아버지 역시 똑같이 지니고 있었다. 이 말인즉슨, 넛메그가 신주쿠의 어느 고층빌딩 앞 벤치에서 도넛을 먹고 있던 오카다를 발견해 그를 자기 사업의 새로운 수행자로 삼은 것은 전혀 우연이 아니었다. 넛메그의 아버지는 아내와 넛메그만 일본으로 향하는 배에 실어 보내고, 자신은 만주에 남아 마지막까지 동물원을 관리하고 결국 시베리아의 탄광 수용소에서 일종의 홍수로 사망한다 - 심지어 '물을 조심하라'라는 오카다에 관한 예언까지 일치하지 않은가. 그리고 비슷한 시베리아의 탄광 수용소에서 마미야 중위는 운̇ 좋̇게̇ 러일 통역사로 일하다가 보리스를 다시 만나게 된다. 수용소에 갇혀 있던 일본인 포로들의 본국 귀환이 결정됐을 때 마미야 중위는 보리스의 사무실에서 그를 향해 총알 두 발을 발사하지만, 모두 빗겨간다. 그리고 마미야 중위는 또 운̇ 좋̇게̇ 살아남아 나고야인지 나카타인지 하는 고향으로 돌아와 살아야 하는 이유도 의지도 박탈당한 채 '텅 빈' 인간으로 살아간다. 우연처럼 보이지만, 우연이 아니다. 이 모든 일련의 사건들은 과거 전쟁터에서 무수히 쏟아진 끈적끈적한 적갈색 피 웅덩이로부터 시작된다. 근대를 정의하는 피의 얼룩이 완전히 지워지지 않은 채 우리는 현대를 맞이했다. 만주국에서의 참상은 실패한 전쟁 정도로만 기억될 뿐, 일본 본토에서는 그에 대한 대중의 관심도, 정치적 관심도 전무하다. 그렇게 인간의 惡은 여전히 밋밋해 보이는 도시의 이면, 즉 오카다가 우물 벽을 통과해 도달하는 그 평행 세계에서 유유히 흐르고 있다. 마치 호텔 방 안 공기가 농후한 꽃 향기로 가득 찬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그 폭력의 주체는 여전히 교묘한 정치가의 혀를 내두르며 대중을 기만한다. 와타야 노보루 - 자신의 큰아버지가 죽은 뒤 큰아버지네 지역의 중의원으로 선출된다 - 역시 처음에는 이해할 수 없는 경제학 용어, 다음에는 TV 프로그램에서의 이지적 이미지, 마지막으로는 냉철한 듯하지만 실속 없는 신문 칼럼을 통해 자신에게 내재한 악을 키워 나간다. 오카다 토오루는 바로 그 악에 대항했어야 했다. 그리고 그는 성공했다. 구미코의 도움과 함께.

 

폭력과 악의 순환은 어떻게 저지될 수 있을까. 그 답을 미리 알았더라면 세계 곳곳에 불필요하게 산재해 있는 국제기구들이 쓸모없어질지도 모른다. 혹자는 최후에는 와타야 노보루의 목숨줄을 구미코가 직접 끊어냈으니까 폭력을 막기 위해서는 비등한 정도의 물리적 힘이 행사돼야 한다고 주장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하루키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물론, <태엽 감는 새 연대기>는 거의 모든 문장이 메타포라고 단언하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해괴망측한 소설이지만, 오카다가 구미코를 구해 내기 위해, 그리고 와타야 노보루와 대적하기 위해 한 일을 떠올리자. 그는 무얼 했는가. 다름이 아니라 그는 버려진 집의 메마른 우물 바닥으로 스스로 기어들어가 몇 번의 낮과 밤을 거기서 고립돼 보내며 계속 '생각'했다. 하루에 딱 한 번 찬란한 빛줄기가 내려올 때를 제외하면 대체로 어두컴컴한 그 공간에서 그는 인고의 시간을 가졌다. 과연 그동안 그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성찰했으며, 무엇을 깨달았는지 나로서는 모를 일이지만, 우물 속의 시간은 분명 그에게 모든 잘못을 바로잡을 기회를 제공했다. 현대인들은 지나치게 많은 자극 속에서 살아간다. 그리고 마치 누군가가 정해준 것 마냥 쉬지도 않고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장소로 가서 정해진 일을 한다. 만약 와타야 노보루 같은 사람이 정̇해̇진̇ 것̇을̇ 정̇하̇는̇ 사람이라면? 그때도 '하는 수 없지'라며 앞만 보고 갈 텐가. 우리는 과연 스스로 무엇이 가능할까. 가끔은 오카다처럼 삶의 한가운데 멈춰서 각자의 우물 안으로 내려가야 하지 않을까.

잘 들어 보세요, 오카다 씨도 잘 알다시피 이곳은 피비린내 나는 폭력적인 세계입니다. 강해지지 않은 채 살아남아서는 안 돼요. 하지만 동시에 그 어떤 작은 소리도 놓치지 않도록 차분히 귀를 기울이는 것도 중요한 일입니다. 아시겠어요? 좋은 뉴스는, 대부분의 경우 작은 목소리로 말해진답니다. 아무쪼록 그 점을 기억하세요.
- 가노 크레타, 제2권 <예언하는 새>
태엽 감는 새는 그때도 계속 울고 있었다. 하지만 그 소리는 다른 이들에게는 전혀 들리지 않는다.
- 제3권 <새 잡이 사내>

 

P.S. <태엽 감는 새 연대기> 내내 하루키는 몇몇 글자 및 문구 위에 강조점을 찍었는데, 나는 그런 강조점이 정말 마음에 든다. 이유는, 모른다. 하지만 하루키가 텍스트로 구현할 수 있는 모든 스토리텔링을 이 소설에 적용함은 틀림없다. 아, 그리고 이 시리즈에는 매력적인 인물들이 여럿 등장하는데, 내 최애는 물론 시̇나̇몬̇이다. 나를 아는 사람들은 설명이 없어도 충분히 이해하리라 생각한다. 그리고 글 쓸 능력도 시간도 부족한 나는 이 흥미로운 서사에 대한 감상을 얕은 수준으로 남기는 바이지만, 더 깊은 해석이 궁금하다면 코우에오리 호타루 씨의 서평(https://sonhakuhu23.hatenadiary.jp/entry/2013/09/23/071342)을 읽어 보기를 권한다. 등장인물의 '이름'에 대한 해석은 부족한 듯하다. 관심이 있다면 '이름'의 중요성에 대해서 따로 페이퍼를 써 봐도 좋을 듯.

무라카미 하루키. 『태엽 감는 새 연대기』. 김난주 옮김, 민음사, 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