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 정류장을 몇 걸음 앞두고 나는 시원한 나무 그늘 아래 벤치에 짐을 내려놓고 숨을 골랐다. 실제 프루스트가 장기간 묵었던 역사적인 호텔 방에서 오랜만에 늦잠을 청하고 난 뒤 일어나자마자 거닐었던 카부르의 해변은 온통 구름으로 뒤덮여 있었다. 오늘은 비가 오겠구나. 비가 내리기 전에 서둘러 체크아웃을 하고 캐리어 두 개를 컨시어지에게 맡기고 카부르 시내와 발벡 대성당의 모델인 디브-수-메흐의 노트르담을 구경했다. 모처럼 꿈에 그리던 '그' 그랜드 호텔에 왔는데 프루스트처럼 우아하게 1층 식당에서 조식을 즐기고 싶었으나, 가격이 너무 비싼 나머지 아침 식사 자체를 포기했다. 애당초 늦게 일어난 탓에 식사 시간이 애매해진 것이 가장 컸다. 성당을 다녀오는 길에 카부르의 메인 스트리트에 자리한 파티세리 뒤퐁에 들어가 크루아상 하나에 에스프레소를 한 잔 곁들여 허기진 배를 채웠다. 그리고 마들렌 선물 꾸러미 하나를 사서 다시 호텔로 돌아가 짐을 찾았다. 혼자서 대중교통을 타고 캉 기차역까지 가야 했기 때문에 웬만해서는 짐을 늘리고 싶지 않았지만, 마음과는 달리 파티세리 쇼핑백만 하나 더 달고 캉행 버스가 서는 정류장을 찾아 나섰다. 체크아웃할 때 프론트 직원에게 버스 정류장의 위치를 묻고 디브-수-메흐에 가는 도중에 해당 정류장을 직접 방문해 뒀기 때문에 길을 헤메지는 않았다. 다만, 양손에 각각 15kg, 20kg이나 되는 캐리어를 들고 배낭에 쇼핑백까지 챙겨 15분 정도를 걸으니 힘들기도 하고 땀이 비오듯 쏟아졌다. 그나마 인도가 벽돌로 매워져 있어서 다행이었다. 여느 유럽 도시처럼 돌로 포장돼 있었다면 과장하지 않고 팔이 빠졌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겨우 버스 정류장 근처에 도착했다. 버스 정류장은 지붕으로 덮여 있었지만, 애초에 의자도 세 개밖에 없는 데다가 투명 플라스틱 파티션으로 좌우가 닫혀 있는 구조라 가만히 앉아 있기에도 후끈했다. 짐도 많고 땀범벅이던 나는 어차피 버스 도착 예정 시간까지 어차피 40분이나 남았으니 근처의 그늘진 벤치에 앉아서 쉬다가 정류장으로 이동하기로 했다. 호텔 직원이 버스 시간을 알려 주기도 했고, 성당 가는 길에 내가 직접 정류장 벽에 부착된 버스 시간표의 사진을 찍어 놓기도 했지만 혹시 모르는 마음에 주위에 아무도 없음을 확인하고 짐만 벤치에 둔 채 시간표를 다시 확인하려고 정류장까지 후딱 뛰어갔다 왔다. 벤치에 편하게 앉은지 얼마 안 된 바로 그때 멀리서 그가 나를 향해 걸어왔다.
원래 여행 도중 휴대전화를 자주 들여다 보는 편이 아니기에 가만히 앉아서 주위를 둘러 보았다. 평일 낮인데도 불구하고 벤치 앞의 거리는 한가했다. 초등학생 남자 아이를 학교에서 데려오는 아주머니 한 명과 나와는 반대로 도빌 방향으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는 중년 여성 한 명이 내가 본 행인의 전부였다. 한적한 주변환경에 맞춰 나 역시 나른해지려는 찰나에 내 쪽 정류장을 향해 저 너머에서 걸어오는 한 남자가 시야에 들어왔다. 멀리서 봐도 남루한 행색에 뜨거운 햇빛에 한껏 탄 까무잡잡한 피부, 무엇보다 들쭉날쭉한 누렁니. 샌프란시스코의 노숙자들만큼 더럽지는 않았지만, 별로 정갈하지 못한 첫인상으로 인해 나도 모르게 그를 못 본 척 고개를 앞으로 돌렸다. 물론 도시의 노숙자나 강도에 견줄 정도였다면 대낮에 배낭을 메고 카부르 같은 휴양지를 돌아다니지도 않았을 터였다. 그럼에도 당시에는 동행도, 익숙한 동양인도 없는 프랑스 시골 마을에서 온갖 귀중품을 혼자 지켜야하는 입장이었으므로 잔뜩 경계를 세웠다. 제발 나한테 말 걸지 마라. 제발 그냥 지나가 주라. 속으로 눈을 마주치지도 그의 관심을 끌지도 않기를 바랐다. 그러나 내가 정류장과 벤치 사이를 허겁지겁 왕복하는 모습을 지켜본 그로서 내게 말을 걸지 않을 수 없었나 보다. 정류장 벽의 버스 시간표를 다시 확인하기 전 주변 위험 요소를 점검할 때 버스 정류장 너머의 다리 초입에 누군가가 나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는데, 그 사람이 지금 내게 말을 건 남자였다.
「혹시 당신도 버스를 기다리고 있나요?」
아마 처음에는 불어로 물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내가 어설픈 불어로 「저는 불어를 못 합니다.」라고 답하니까 금세 영어로 다시 물어본 듯하다. 워낙에 이런 일이 비일비재해서 벌써 여러 기억이 서로 엉켜 버렸다. 그런데 그는 나의 불어 답변에 헤픈 표정을 지었는데, 나중에 캉 기차역에서 알아보니 내가 「pas」와 「parlez」의 순서를 바꿔 말한 탓이었다.
「네, 맞아요. 캉으로 가는 버스를 타려고요. 캉행은 이쪽 정류장이 맞죠?」
「그럴 겁니다. 혹시 몇 시에 버스가 오나요?」
「지금으로부터 한 30분에서 40분 정도 남았어요. 시간표에는 55분 도착이라고 돼 있기는 하지만, 저도 이 동네가 처음인 데다 노르망디 버스를 타 본 적이 없어서 정확한지는 모르겠어요.」
「시간표에 그리 나와 있다면 55분에 버스가 도착할 거예요. 시간이 꽤 남았군요, 저는 간단한 볼일이 있어서 이만 실례할게요. 곧 또 봅시다.」
「네, 나중에 봬요.」
「그런데 일본에서 오셨나요?」
「아니요, 한국에서 왔어요.」
「설마 북에서?」
「하하, 남한에서요.」
「물론 농담이었어요, 하하.」
남자는 유창한 영어로 나와 대화를 이어가다 근처에 볼일을 해결하러 자리를 떴다. 유명 휴양지인 도빌도 아닌 카부르 같은 시골 마을에서 영어로 그렇게 술술 이야기를 나눌 상대를 만나리라고는 전혀 기대하지 못했기에 더욱 신기했다. 게다가 내가 받은 그의 첫인상과는 상반되게 은근 코스모폴리탄 같기도 했다. 가까이서 보니 그가 입은 잿빛 하늘색 티셔츠는 시간의 흐름인지 개인적 고초의 깊이인지 모를 그 어떤 것에 의해 해어지기는 했지만 '남루하다'고 평할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다만 등에 맨 검은색 아웃도어 백팩이 꽤 오래됐고, 또 입은 반바지에 이것저것 하얀 분필 가루 같은 것들이 묻어 있었기 때문에 그의 차림새는 여전히 초라해 보였다. 그러나 사람 자체에서 풍기는 분위기로 말미암아 나는 본능적으로 그가 카부르 '태생'은 아님을 직감했다. 그리고 삐죽빼죽한 누렁니도 교정이 절실한 수준은 아니었다. 피부는 확실히 해변의 햇살에 오랫동안 그을려 보기 좋게 익어 있었다. 비단 얼굴뿐 아니라 팔, 다리 등 옷 밖으로 드러나는 부위 모두 연중연시 구름이 하늘을 뒤덮는 노르망디에서는 보기 드문 벌건 갈색이었다. 적당히 주름진 얼굴로 짐작컨대 그의 나이는 40대쯤으로 보였다. 대화하는 동안 그는 마스크를 쓰지 않았기 때문에 한편으로 코로나에 감염되지는 않을까 걱정했지만, 몸은 이미 녹초가 된지 오래라 그가 정상적인 사람임에 충분히 만족했다.
남자는 그가 말한대로 55분 조금 전에 정류장에 도착했다. 나는 내 또래로 보이지만 덩치는 훨씬 큰 흑인 남자와 같이 정류장에 앉아서 대기하다가 버스가 정차할 자리로 미리 이동해 서 있었다. 영어를 못하는데 영어밖에 할 줄 모르는 동양인 남자가 불안 증세마냥 옆에서 자꾸만 번역기로 질문을 해대서 곤란했을 것이다. 버스를 탈 즈음에는 먼저 만난 백인 남자, 정류장에서 같이 기다린 흑인 남자, 그리고 백인 학생 무리가 나와 함께 있었다. 이윽고 버스가 도착해 짐을 모두 들고 타려는데 흑인 남자가 그러지 말고 트렁크에 실으라고 일러주면서 친절하게도 버스 트렁크를 열어 캐리어 싣는 일을 도와 주었다. 뉴욕에서 통근 버스를 타고 당고모댁으로 갈 때도 트렁크를 어떻게 여는지 몰라서 결국 기사 아저씨의 도움을 받았는데, 이번에도 낯선 이 덕을 보고 말았다. 짐을 다 싣고 나니 흑인 남자와 학생 무리는 먼저 버스에 탑승했고, 나와 백인 남자만 타면 됐는데, 그가 나보고 먼저 타라고 배려해 줬다. 나는 한번쯤 당신이 먼저 타라고 대꾸하다 못 이긴 척 그의 말을 따랐다. 인터넷으로 미리 노르망디 현 버스의 교통비를 검색해서 잔돈이 생기지 않도록 정확한 액수의 동전을 준비해 놓았다. 그런데 버스 입구에 서서 현금을 내려 하니 기사 아저씨께서 극구 손사레를 치시면서 불어로 뭐라고 계속 말씀하셨다. 당황한 나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Parlez-vous Anglais?」만 반복하다가 뒤에서 대기하던 그 남자가 내 앞으로 불쑥 걸어들어와 대신 버스 기사의 말을 통역해 줬다. 버스에서 내려 그로부터 들은 바는 이러했다:
「이 버스는 오로지 교통 카드만 결제 수단으로 받는다는군요. 현금은 낼 수 없대요.」
「정말요? 하지만 저는 교통 카드가 없는데 어떡하죠...」
「걱정 마세요. 기사가 말하길 5분 후에 현금도 받는 똑같은 버스가 도착한대요. 그걸 타면 될 것 같아요. 마침 저도 현금밖에 없으니 저도 당신과 같은 버스를 타야 하고요.」
「그렇군요. 통역해 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프랑스어를 전혀 공부하지 않고 이 시골까지 여행하기로 한 제 불찰이에요. 당신 같은 사람이 저를 도와 주시니 망정이지, 저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했을 거예요.」
「천만에요. 프랑스인들도 영어를 더 열심히 배워야 해요, 하하.」
자초지종을 설명하기 전에 그는 버스 트렁크에서 짐 내리는 일부터 도와줬다. 내가 트렁크에 가까이 가기도 전에 그가 먼저 트렁크를 열어 내 짐을 내리려 했다. 부탁하지도 않았는데도 외지인을 그렇게나 서슴없이 도와주다니, 무척 감사했다. 다음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에는 그 남자와 딱히 대화를 나누지 않았던 것 같다. 다만, 어느 흑인 학생 커플이 저만치에서 헐레벌레 뛰어오더니 대뜸 나한테 방금 떠난 버스가 혹시 캉으로 가는 편이었냐고 거친 숨을 내쉬며 물었다. 아무래도 버스를 놓쳤다는 절망감에 휩싸이는 듯해서 내가 '그렇기는 하지만, 5분 뒤에 똑같은 버스가 한 대 더 온대요.'라고 답하니 그제서야 다행이라며 뒤로 물러났다.
(지금부터는 편의상 그 남자를 M.X라고 부르겠다.)
기다리던 버스가 도착해 미리 준비해둔 만큼의 동전을 요금함에 떨어트리고 무사히 자리에 앉았다. 아, 이번에는 M.X가 트렁크에 캐리어 놓는 일을 서슴없이 도와 줬다. '드디어 간다'라는 안도감에 아침부터 켜켜이 쌓여온 긴장감이 스르륵 풀리는 것 같았다. 최악의 경우 귀국해서 쓰려고 아껴 둔 상비금까지 깨트려서 택시를 타려고 했기 때문에 가뜩이나 팍팍한 지갑 사정이 악화되지 않았음에 가장 안심했다. 이제 조금 마음 놓고 편하게 가볼까, 라고 생각하며 블루투스 이어폰을 착용하고 노래를 틀었는데 - 어떤 곡이었는지는 까먹었다. - 복도 너머의 옆자리에 M.X가 털썩 앉더니 나한테 말을 걸었다.
「그래서 카부르는 어떻게 오셨나요? 외국인들 사이에서 유명한 관광지는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금방 대화가 일단락될 것 같아서 왼쪽 이어폰은 그대로 껸 채로 답했다.
「맞아요, 얼마 안 있다 가기는 하지만 여기서 동양인은 저를 제외하고 한 명도 못 본 것 같아요. 마르셀 프루스트의 소설을 좋아해서 왔어요. 혹시 읽어 보셨나요?」
「아니요, 들어 보기만 했어요. 마을 안쪽에 프루스트 동상이 있는 기념관도 있는데, 가 보셨나요?」
「아니요, 동상이 설치된 정원까지만 가고 기념관 안에는 들어가지 않았어요. 입장료를 내야 하더라고요, 하하.」
「그랬군요. 그래도 프루스트를 무척 좋아하시나봐요, 파리에서 거리가 꽤 되는 이런 시골 마을까지 발걸음을 옮기시고.」
「예,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완독하는 것이 일종의 제 숙원 사업이에요. 카부르에 오기 직전에 이곳을 배경으로 썼다는 제2권을 끝냈어요.」
「아, 그러면 당연히 그랜드 호텔에 묵으셨겠네요?」
「맞아요. 프루스트를 안 읽으셨다고 했는데 잘 아시나요?」
「이 근처에 당신 같은 외국인 관광객이 묵을 만한, 혹은 당신 같은 사람들을 끌어들일만한 요소가 그랜드 호텔말고는 더 없으니까요. 하하.」
「그렇군요, 하하. 카부르는 소설에서 발벡이라는 가상의 도시로 등장하는 반면에 그랜드 호텔은 그 명칭이나 구조는 굉장히 유사하게 나오더라고요.」
이쯤에서 캉 역에 도착할 때까지 대화가 계속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어 나머지 한쪽 이어폰마저 빼 버렸다. 그동안 M.X 쪽에서만 질문한 것 같아서 나도 도의상 그에게 역으로 물었다.
「혹시 카부르 토박이신가요?」
「어우, 절대로 아니죠. 이렇게 지루한 동네에서 어떻게 평생을 보내나요, 생각만 해도 끔찍하네요.」
「하하하, 말 조심하세요. 우리 주위에 다 이 동네 분들밖에 안 계시잖아요, 누가 고소하면 어떡해요.」
「마음대로 하라 그래요, 어차피 저도 곧 있으면 그리스로 바캉스 가니까 상관 없어요.」
「그리스요? 정말 좋겠어요.」
「굉장히 기대하고 있어요. 요 며칠 새 카부르는 너무 추워서 따뜻한 햇살이 그리웠어요. 저는 그리스의 어느 섬에 가서 서핑도 하고 해수욕도 하면서 쉬려고요. 지금 캉에 가는 것도 파리에서 그리스행 비행기를 타려고예요. 공항 가는 것도 꽤 오랜만인데, 잘 찾아갈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잘 찾으실 거예요. 저처럼 불어를 일절 모르는 사람도 여기까지 무사히 왔는 걸요. 그나저나 서핑도 하시다니, 평소에 스포츠를 좋아하시나봐요.」
「물론이죠. 사실 카부르에도 서핑하러 온 거예요. 저는 원래 파리에 살았거든요. 파리는 정말 아름다운 도시예요. 하지만 돈이 없는 사람에게는 자비를 베풀지 않죠. 마음 같았으면 파리에 계속 머무르고 싶었지만, 퇴직한 이후에 수입이 딱히 없으니까 더 이상 생활비를 감당할 수 없더군요. 게다가 도시 생활도 오래 했더니 얼마간은 한적한 동네에 살고 싶어졌어요.」
「저런, 저는 유럽은 복지가 잘 돼 있어서 은퇴하고 나서는 벌이가 없어도 되는 줄 알았어요.」
「전혀 아니에요. 프랑스는 노인들한테 잔인한 나라예요. 일자리를 구해야 하는데 일정 나이 이상이 되면 더 이상 회사에서 고용하지를 않아요. 그런데 또 먹고 살려면 돈은 벌어야 하니까 답이 없죠.」
「힘드셨겠어요. 그래도 그리스에서 휴양하다 오시면 다시 기력도 되찾고, 일자리도 구하실 거예요.」
「고마워요, 그러길 바라야죠. 그런데 당신은 혹시 스포츠를 좋아하지는 않나요?」
「저요? 저는 딱히...」
「그렇군요. 저는 서핑 말고도 사실 비행하는 것도 좋아해요.」
「비행이요? 그러면 파일럿이셨나요?」
「아니요, 취미로 즐기죠. 카부르 근처에 일자로 쭉 뻗은 해변가가 또 있어서 비행 연습하기에 안성맞춤이에요. 그런데 이제는 비행 한 번 하려면 힘이 너무 들어요, 나이가 그만큼 들었다는 뜻이겠죠. 하하.」
「그러셨군요. 그래도 되게 활발하신 것 같아요. 그리스에서 서핑, 노르망디에서 비행이라.」
「저는 한동안 미국에도 있었어요. 정말 좋았죠. 카부르처럼 재미없는 동네보다 훨씬 좋았어요.」
「카부르가 그렇게 별로셨나요? 저처럼 하루, 이틀 머물다 가기에는 나름 특색 있는 동네 같은데.」
「음, 저도 처음에는 좋았어요. 그런데 한 주, 한 달, 그리고 이제는 세 달째 이곳에 머무르다 보니까 더 이상 할 게 없어요.」
「하기사 저도 하루만에 동네 한 바퀴를 다 돌았네요. 한 달 이상 있으면 정말 지루할 것 같기는 해요.」
「그나마 며칠 전에는 노르망디 영화제가 당신이 묵은 그랜드 호텔에서 열려서 온 동네가 떠들썩하기는 했어요. 외부에서 사람들이 정말 많이 왔죠.」
「오, 영화제라니! 가셨나요?」
「아니요. 레드카펫 이벤트 같은 것에는 가지 않았어요. 대신 <탑건>을 관람했죠. 정말 재밌었어요.」
「<탑건>이라니, 미국에서도 엄청나게 흥행했어요. 저는 안 봤지만요, 하하. 1편도 보셨나요?」
「당연하죠. 저는 톰 크루즈의 엄청난 팬이에요. 그의 액션 연기는 세월이 흘러도 변함이 없더군요. 멋있고, 인간적으로 무척 존경해요.」
「그러시군요. 톰 크루즈 나오는 영화로는 <미션 임파시블 5> 정도만 본 것 같네요. 그 나이에도 직접 액션 연기를 소화화다니, 정말 대단하죠.」
「맞아요.」
... 이외에도 많은 이야기를 나눴고, 금세 캉 역에 도착했다. 우리가 수다를 떠는 동안 꽤 많은 사람들이 타고 내렸지만, 승객들 중에서 말하는 사람들은 우리밖에 없었다. 분명 한국과 관련해서도 M.X는 상당히 해박했는데, 내가 왜 그런 기억을 가지게 됐는지, 그 발원이 되는 발언들은 기억나지 않는다. 어쨌든, 캉 역에 도착해서도 M.X는 트렁크에서 내 캐리어 중 하나를 내려 주고 쿨하게 손을 흔들며 언젠가 다시 만나자며 역사로 걸어갔다. 그는 분명 내가 올 여름 유럽을 여행하면서 마주친 모든 현지인들 중 가장 독특하고, 또 재미있는 사람이었다. 지금 그가 재미 가득한 삶을 만끽하고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