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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dyssey

짧은 수기_7

by 도미니크앙셀 분당점 2023. 6. 4.

바다, 절벽, 비 온 직후의 쌀쌀함. 여행에 있어 나를 가장 들뜨게 하는 삼박자가 이날 딱 한 데 모였다. 교환학생 첫 학기로 데이비스에서 겨울을 보내고 떠난 봄방학 여행의 첫 날이었다. 데이비스의 자그마한 암트랙 역에서 출발해 산 호세를 경유, 산타 크루즈와 산타 바바라를 거쳐 로스엔젤레스와 오렌지 카운티로 대미를 장식하는 기다란 여정의 첫 단추를 잘 끼우고 싶었다. 어느새 눈에 익은 샌프란시스코의 독특한 고층 빌딩들을 뒤로 하고 산 호세로 천천히 나아가는 기차 안에서 나는 일출을 경과했음에도 여전히 음침한 하늘을 잠자코 바라보았다. 혼자 떠나는 길이었기에 말 걸 상대도 마땅치 않았다. 조용히, 어쩌면 오늘부터 우비를 개봉해야 할지도 모르겠네, 이런 나름의 대책. 날씨 때문에 듣기 시작한 박화요비의 노래는 기분을 더욱 멜랑꼴리하게 만들기만 했다.

 

산타 크루즈에 도착해서 몇 시간 동안은 내내 비가 내렸다. 사계절 내내 화창한 날씨라던 캘리포니아는 자취를 감추고, 한 번은 한국의 장맛비를 방불할 정도로 두꺼운 빗줄기가 우산 밖으로 살짝 나온 팔을 따갑게 내리쳤다. 그래도 나는 걸음을 멈출 수 없었다. 꼭 보고 싶은 풍경이 있었다. 미국만큼 차가 없으면 불편한 나라가 또 있을까. 자동차로 이동하면 십 분 남짓 걸리는 거리를 나는 두 발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 시내에서 목적지와 그나마 가장 가까운 정류장까지는 버스를 타면 됐지만, 문제는 그곳에서도 6km를 더 가야 했다. 어차피 그때 내가 가진 것은 시간뿐이었다. 우비를 쓴 채 계속 걸었다. 비가 많이 올 때는 우산까지 곁들였다. 내가 서 있던 길을 걸어가는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몇 번 자전거를 타는 무리가 지나쳤다. 반대쪽에서 열심히 달려오던 커플과는 반갑게 인사까지 나누었다. 하늘은 우중충했어도 내 얼굴은 줄곧 싱글벙글했던 것 같다. 이런 무모한 여정을 패기 넘치는 이십 대 초반 아니면 언제 해 보겠냐며. 그렇게 한 시간쯤 걸으니 드디어 파도가 절벽에 부딪혀 으스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동경하던 장면을 코앞에 두고 절벽으로 이어지는 오솔길에서 마주친 한 아주머니는 상당히 벅찬 표정을 짓고 있었다. 우리는 말 대신 눈빛을 교환했다.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너도 이걸 보러 왔구나, 잘 왔어, 그동안의 수고를 후회하지 않을 거야, 네게는 마법이 기다리고 있어. 그리고 태평양이 펼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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