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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dyssey

험프리스를 떠나며.

by 도미니크앙셀 분당점 2024. 3. 1.

숫자 9에 근접하는 시침을 보고서도 전혀 조급해 하지 않은 지금에서야 전역을 실감한다. 전역하는 당일에는 비도 추적추적 내리고, 전날 살짝 무리하기도 해서 기쁘거나 슬프거나 해야 마땅했을 마음에 일말의 파동도 일지 않았다. 다만 한시라도 빨리 평택 땅을 벗어나고 싶어서 안달이 났다. 한 번에 작별을 고하고 깔끔하게 떠나고 싶었다. 이미 ‘안녕히 계세요’ 혹은 ‘안녕히 가세요’라고 말한 이상 자꾸 얼굴이 마주치면 가는 이나 남는 이에게 모두 실례지 않은가. 그러나 워킹 게이트까지 가려고 마지막으로 블루 버스를 타는 순간까지 계속해서 부대원과 만나게 돼서 몹시 민망했다. 그냥 엄마 부를걸. 그냥 동기 차 얻어 타지 말고 기차 타고 갈걸. 그냥… 몇 가지 선택지를 앞에 두고 갈팡질팡하다 결국 말짱 도루묵이 돼 버린 꼴이 마치 내 군생활 전반을 비웃는 듯했다. 끝까지 바라는대로 일이 풀리지 않음은 나의 비루한 마음씨에서 비롯된 것일까. 분당으로 달리는 차 안에서 줄곧 생각했다.

 

남들이 보기에 참 편안하고 풍족한 군생활이었을 것이다. 사실 내가 봐도 그렇다. 일반 육군 부대에서는 당연한 훈련을 나는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다. 다양한 카투사 보직 중에서도 운 좋게 어학 특기 딸린 행정병이 돼서 추운 날에는 따뜻하게, 더운 날에는 시원하게 근무했다. 방금 문장 말미에 사용한 동사를 자연스레 뱉었다는 것 자체가 지난 일 년 반이 얼마나 평탄했는지를 방증한다. 보통 복무, 복역 따위의 말을 쓸 텐데 말이다. 그래도 마냥 놀기만 하지는 않았다. 한창 열심히 일하던 시기에는 나름대로 바빴다. 그래봤자 한 달에 오래 잡아 일주일 정도의 빈도로 일감이 몰리기는 했지만. 특별한 경험이라면 마침 미 군사경찰대대의 작전과에 전속돼 미군의 군사경찰 교육 절차에 직접 관여하고, 일종의 관행으로 신병 시절에 테이저건을 맞고, 또 후임에게 테이저건을 발사해 볼 수 있었던 것 정도가 있겠다. ‘정도’라고 표현했지만, 그것이 군생활 약 사분의 오에 해당하는 기간 동안 내가 하던 일의 전부라 뭐라 덧붙이기도 겸연쩍다. 교육받은 내용을 실제로 행하는 군사경찰 카투사들에 비하면 나의 역할이 사소해 보이는 현상은 어쩔 수 없다. 미군 부대에 머무는 동안 누군가에게 인정받거나 향후 진로의 가닥을 확고히 하는 계기를 얻겠다는 대단한 포부를 안고 입대하지는 않았으나, 언젠가 들었던 대학 및 카투사 선배의 사례는 상기할 때마다 ‘너는 무얼 했니’라는 질문을 포석처럼 내게 쏘아댔다. 인생의 어느 시기에 무얼 하든 항상 효율성을 따져가며 나의 잘잘못을 가리고자 하는 나. 그리고 이내 피곤해져 속절없이 시간에 굴복하는 패턴의 반복은 평택에서도 그대로였던 듯하다.

 

퇴근 후 개인정비 및 자유시간이 기본 네다섯 시간은 보장된다는 사실 역시 내가 누린 안락함의 큰 일부였다. 그 시간 덕분에 앞서 언급한 자유전공학부 선배만큼 인상적인 군복무는 못 됐더라도 돌이켜 보았을 때 마음이 넉넉해지는 추억을 겹겹이 쌓을 수 있었다. 우선, 이룬 목표부터 열거해 보자. 당장 전입해서 한 달쯤 지났을 때 한국사능력검정시험 1급에 합격했고, 그다음 해인 23년도 5월에 독일어 괴테시험 A2, 12월에는 일본어 JLPT N1을 취득했다. 세 번의 수험기에는 공통점이 있다. 바로 벼락치기의 산물이라는 점이다… 주변인들에게도 줄곧 말했지만, 한국사 시험의 경우 제대로 주객이 전도됐다. 원래는 논산에 있을 적 동기들과 이야기하던 중 국사를 좋아하고 잘했던 아이 치고 내가 참 무지하다는 반성 어린 생각에 한국사를 다시 꼭꼭 씹어먹듯 공부해 보자고 결심했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의 유홍준 교수처럼 유적지를 방문해서 그와 관련된 배경지식을 술술 설명하는 수준을 목표로 삼았지만, 어쩌다 보니 시험을 2주 앞두고 최태성이 낸 시험준비용 책을 가까스로 1회독한 후 시험만 치르고 끝나 버렸다. 자격증에 만료일이 없으니 망정이지, 현재 나는 논산 수준 혹은 그 이하로 퇴화했다. 독일어 학습도 남은 것이 없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다. 아무 생각 없이 기초 문법 교재부터 천천히 읽다가 시험을 한 달 반 앞두고 카투사 동기 형이 특정 레벨에는 특정수 이상의 단어 암기가 요구된다고 말해 준 다음에서야 발등에 불 떨어진 기분으로 매일 공부에 매진했다. 유럽 언어를 배워 본 적도 없으면서 무슨 자신감으로 회화까지 독학하려 했는지 의문스럽다. 당시에는 월급도 적고 엄마한테서 용돈도 타는 마당에 과외비까지 달라고 하면 너무 염치가 없어서 독학 이외의 선택지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덕분에… 주어별 동사 어미 변화처럼 기본 중의 기본도 까먹어 버렸다. 지금은 기억나는 것들이 별로 없어도 한창 과몰입하던 중에는 새로운 세상이 열리는 듯했다. 독일어 문화권의 사람들은 이렇게 사고하는구나, 저렇게 살아가는구나 따위의 간접 문화 체험이 가능했다. 사피어-워프 가설은 틀렸다고 판명됐지만, 그럼에도 아침에 일어나서 새벽에 잠들기까지 독일어만 붙들고 있던 때에는 나도 모르게 독일어로 생각한 적도 있어서 언어 공부의 짜릿함을 다시금 느낄 수 있었다. 무엇보다 오랜만에 ‘하면 된다’를 실행에 옮길 수 있어 꽤 뿌듯했다. 마지막으로 일본어에 관해서는 말해 뭐하나 싶다. 고교 졸업 이후 숙원 사업처럼 남아 있던 것을 처리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우리 부대에는 예나 지금이나 일본을 좋아하는 카투사들이 참 많다. 어쩜 꼬리에 꼬리를 물고 JLPT를 응시하려는 사람들이 계속 생겨나는지 신기했다. 일본 및 일본어에 대한 주변의 왕성한 관심에 오히려 나는 무심해졌달까나. 하지만 나는 그 덕을 톡톡히 봤다. 선임 중 한 명이 열심히 N1 단어 목록을 작성하길래 나도 그 프로젝트에 숟가락을 얹어 때때로 한 시간씩 스터디도 진행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분이 전역하고 나서야 또 시험이 한 달밖에 안 남게 됐다는 속물적인 이유로 더 열심히 공부한 것 같기는 하다. 걱정했던 것에 비해 150점이라는, 내 나름의 기준에서 높은 점수를 받기는 했지만, 딱히 일본어가 더 유창해진 느낌은 전무하다. 이렇게 단타로 쳐내지 않고 꾸준히 공을 들인 과목은 복학해서 재수강할 선형대수학뿐인데, 그마저도 띄엄띄엄 임해 버려서 프리드버그 교재의 절반까지밖에 못 봤다. 군생활에 관한 몇 가지 감회 중 언어보다도 수학에나 더 집중했어야 한다는 후회가 가장 절실하다.

 

절실함과 별개로 가장 뼈아픈 실수는 역시 인연에서 발생했지 않았나 싶다. 상병 3호봉쯤부터 동기들에게는 끊임없이 불평을 늘어놓았다만, 그럼에도 인복이 풍성하다는 생각은 살면서 처음 들었다. 솔직히 고백하면 입대하기 전까지의 나는 제 잘난 맛에 사는 아이였다. 누군가는 지금도 별반 다르지 않다고 일침을 가하고 싶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군생활 동안 다양한 사람들과 교제하면서 나의 시야는 분명 넓어졌다. 학보사 기자 경력과 교환학생을 통해서도 세상에는 나와 다른 이들이 참 많고, 나의 기준이 어디서나 통용되지는 않겠다는 탈(脫)-라스콜니코프적 결론에는 이르렀다. 그러나 그런 깨달음을 소화하는 데는 또 시간이 걸렸고, 어렵게 받아들인 가르침을 몸소 실천한 것은 훨씬 나중의 일이다. 내게 이러한 숙성의 기회를 제공해 준 것은 다름 아닌 지난 일 년 반 동안 나의 옆에 있어 주었거나 스쳐 지나간 수많은 인연이다. 감사하게도 나는 줄곧 배울 점이 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입대하기 전의 경험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꽤 단단해졌다고 믿었는데, 군대에 와서 여러 인생담을 듣다 보니 여전히 온실 속 화초였음을 자각했다.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부끄러웠던 적도 적지 않다. 성인으로서 독립하기 위해 감정적으로나 현실적으로나 미비한 자신을 돌이켜 보며 나이테의 두께에 별 차이도 없으면서 저 사람은 어쩜 저리 성숙할까, 부럽기도 했다. 퇴근 후의 자유시간 동안 그렇게 멋있는 사람들과 어울려 지내며 그들의 생각을 배우고, 토론하고, 각자의 장점을 나눌 수 있어서 무척이나 행복했다. 또 그러한 자리에 맛있는 음식을 곁들이기라도 할 때면 즐거움이 배가 됐다. 탈 많고 말 많은 내게, 참 많은 분이 내가 가진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베풀어 주셨다. 한편으로, 상술한 ‘배울 점’은 비단 삶의 방식 말고도 학문적인 부분도 포괄한다. 확실히 평균 학력이 높은 집단에 속해 있다 보니 각자의 전공에 대해서도 이래저래 오가는 말을 통해 수박 겉핥기식으로나마 알아갈 수 있었다. 이전에는 미처 몰랐는데, 나는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켜 주는 사람과 교제하기를 상당히 좋아하는 듯하다. 상대방이 펼쳐 보이는 지식의 향연 앞에 자꾸만 작아지는 기분은 어쩔 수 없었지만, 그래도 잘 몰랐던 분야에 관해 - 금세 잊어 버리더라도 - 무언가를 새로이 알게 될 때의 기쁨은 따뜻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그러한 의미에서 복무하는 동안 가장 행복했던 시기를 함께한 그에게 나는 죄인일 수밖에 없다. 내가 유쾌했던 때를 그와 공유한 것인지, 그와 공유한 순간이 유쾌했던 것인지 이제는 분간조차 못하지만, 모두 나의 잘못이라는 사실만큼은 명백하다. 그래서 나는 전역이 몹시 기다려지면서도 두려웠다. 해결해야 할까, 해소해야 할까, 무시해야 할까. 고민 끝에 나는 도망쳤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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